철학과
철학과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옛날 한신대, 아직 아파트가 없던 공활지,
학생들이 모였다 사라지는 시기에,
정말 가난한 집안의 사람에서부터
추측이 불가능한 부자들에 이르기까지
나는 거기서 신학철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아주 앉아있는 것에서부터 불만이 많고
이상적인 일류대가 저기 있는데
안녕리에 있는데, 나는 양산리에
왔다고, 마음이 그런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보통 그런 것들이 더러 책을 읽는다.
약간 싸가지 없고, 주목을 받는 것들이
책임감에 책을 읽는 것이다. 김연아가 일년 후배로
들어온다. 철학을 조금도 못했다.
한번 울리고는 데리고 다닌다.
김연아가 세계 일류 피켜스케이터라고 한다.
나는 카타리나 비트가 아닌가 했다.
좀더 날씬한, 샤라포바처럼 생긴, 옥주현이
같은 후배로 들어온다. 세계 일류 테니스 선수라고
했다. 나는 나브라틸로바가 아닌가 했다.
그러니까 그만큼 관심이 있고,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통 그런
자기 중심적인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
그렇다고 적중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 책을 읽는데, 좋은 것들 투성이었다.
그것은 적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만큼 국내유학자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책을 함께 읽고 싶었으나
여자 아이들은 대게 혁명적이지 못했다.
남자들은 힘쓰는 일들이, 그런 섹스투스 같은
세계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끔 꿈을 꾸었는데
참다운 철학자가 되는,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 이름을 테오앙겔로푸스라고 지었다.
사람들이 농구공을 링에 던지는 것은
영원히 이데아를 선망하겠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선진국이라면 그래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
나는 슈퍼샤이언인이 되어야 했고,
동양에도, 멍청한 서양에도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시를 썼는데,
그것이 그렇게 각광을 받기도 했고
또 다른 클리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김연아와 샤라포바가 따라다녔다.
시를 팔아먹기 위해서, 나는
그녀들을 팔아먹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 것이었다.
피겨스케이터면 카타리나비트
테니스 선수하면 나브라 틸로바가 아닌가?
갑자기 철학과 사라진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내가 신학과이기도 하니까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형이상학적 신론
혹은 존재 신론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각광하는지 혹은
나의 유명세가 좋은지 모르는 기자를 앞에 두고 있다가
전화로 그런 소식을 주고 받고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공중에 걸린
철제 철학과들 같아졌다. 나는 서둘러 수원으로 돌아갔고,
싸리눈이 내리는 것이었다.
보통 단어가 각광받으면, 유명하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인파르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 관한 시평을 보았고,
다른 그럴 듯한 사상들과 벌써 함께 연구되었던 논문도
보았다. 순간 함께 달리고 있는 한국 영화들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 것들은 모두 멜로드라마의
주제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철학적 존질, 그러니까
본질론적 갑각류가 보고 싶으면,
나는 한강의 파충류다 선언한
최근의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를 다만 축적으로써 감각하는 것이지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논리적 기대치, 객관적인 선반에서
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병점에서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도로에도 테이프가 쳐져 있었다.
나는 내가 한신대학교
철학적 신학과 과대표이며
나름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시인이라고 밝혔는데도
경찰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키가 컸고, 힘도 좋았다.
갑각류의 마지막 항거에 있었기 때문에
기초 체력이 유디티만 했다.
그래서 가볍게 바리케이드를 뛰어넘고
기거서부터 벌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신대를 처음 갔을 때도, 그렇게
원서를 내러 갔을 때도
정문이, 학교 교문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는 것이었다.
국문학과만 해도 감각적인 확신이 있다.
윤동주만 배워도, 세상을 얻는 것 같다.
그러나 신학적 철학과는
하이데거의 존나 야한 책 밖에 없다.
그러니 없어진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