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악인가?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에게 미래, 그러니까 이론이 있는가 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병아리에서부터 시작하고, 개나리에서부터 시작한다. 민족주의는 연변에서 시작하고, 강촌에서 시작한다. 민족주의는 그렇게 티비에서 기타 치는 피크를 이룬다. 우리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부르고, 그것의 대가를 찾으려고 하면, 서양의 하이데거, 율리시스, 그리고 데리다를 들곤 한다. 동양에서는 신현균을 든다. 그것은 마치 흑룡강처럼, 주인 없는 거대한 배가, 드디어 바다로 향하는, 행진 나팔 소리 같은 것이다. 어째서, 김용옥은, 그리고 이문열은, 마치 천안함 사태처럼, 마치 어떤 정신과 의사의 죽음처럼, 일을 못하고 돌아와 착잡한 신현균의 반열에 이르지 못하고, 숱한 인드라망에서 풀려나고, 다시 인드라망으로 체결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반드시, 제법무아하고, 만파식적하고, 지란지교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독립하지 않고, 다만, 풀이 흐드러져, 밥풀이 짓이겨져, 그들에게 걸쳐 있는 것이 악마의 시선으로는 탐탁치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 유행하는 차를 가지고, 도대체 신현균이 아니면, 누가 액션 워리어가 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있다. 차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며, 그와 같은 레토릭은, 실재이기도 하며, 천재이기도 하고, 지입 차주의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는 것이다. 차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소승불교를 뜻하는 승용차를 탈 때에도, 금세 대승불교가 된다. 어떤 미술가가, 그의 시화에다, 황지우가 그 옛날에, 몇 개 없는 좌석 가득히, 사람들과 지리산을 놀러갈 때, 고장나서, 타이어를 갈아끼웠던 적이 있다고, 회고하였었다. 사람은 소승이다. 사람은 대승처럼, 여럿이서 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픽션일 뿐, 점점 더 사이언스 픽션이 되어갈 뿐, 우리가 우리 몸을 걱정한다면, 내일이라도 소승불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의 기저는 대승불교이다. 그러니 그와 같은 상해, 임시, 정부의 것과, 헌법과, 우리들의 성정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밀어서 보게 된 시를 보면, 분명 소승을 벗어나, 단독행동하여 사탄을 신봉하는 게오르규 이십사시를 벗어나,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여럿을 만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숫자가 항상 우리들은 궁금했고, 그와 같은 시도에 아낌 없는 투자를 하였었다. 그러니 대승불교는 일본에 있는 것이고, 호오류사 담징 벽화에 있는 것이며, 청수사, 금각사, 그리고 또 다른 멋진 절에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애니메이션을 만난다. 어제 내가 믿거나 말거나, 슬픈 영시를 썼다가 지웠는데, 피플 쉐입스 라이크 쉐도우, 댓 이스 더 새디스트 센텐스 인더월드라고 하였었다. 우리들의 소승은, 세상에는 없는 것 같은, 관념의 수필을 읽다가 말고, 그것을 실험하면 굉장히 우스운데, 정말 우리가 아는 것이 없고, 우리가 고집하며, 분별하고, 무식함을 멸시하고, 반드시 똑똑한 이성과 섹스하고자 하는 열정이 아니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인 것이다. 반면에 대승은 그렇지 않다. 대승은 그래서, 기대승은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남의 성기를 지적하는 스위스 시계를 갖게 되고, 자신은 사탄의 룸메이트가 되어서, 일사부재리의 원칙, 파멸과 우스트의 전개 속에서, 마치 학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공포 영화는 모두 대승불교이다. 영화 미스트 마지막에, 대단히 잘 기록이 되어 있다. 사탄은 영화를 자주 본다. 우리가 영화를 자주 보는 것처럼, 그리고 이차 계급의 사탄도, 부모님이 해괴하여서,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사탄을 교육하는, 그런 아타락시스들인 경우에는, 영화를 정말 자주 본다. 그러니 공부자가, 쓸쓸하고, 외롭고, 고추잠자리가 없고, 양배추가 없고, 걷고 뛰고, 소설가 구보씨가 되고, 공부에 갈수록 힘이 빠지고 할 때, 그런 뒤늦은 사춘기처럼 영화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는 초교파적이고, 초사탄적으로, 그 모든 이들에게 달이 되어주는 것이다. 어려운 관념들과 어떻게든 씨름하면서, 자지만 빨개지는 부작용을 걷는 한이 있어도, 선배 나한들은 정진하고, 정념하였으나, 항상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이 부끄러운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을 모범으로 해야하는지, 모두가 걸그룹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김완벽선과 같은 요수도시를, 그와 같은 계보의 절정과 같은, 관념에도 갔다가, 고추잠자리에도 갔다가, 톰보우, 그리고 대승불교에도 갔다가, 한국 문학에도 갔다가, 하는 이와 같은 산문 시평을 쓴 달 때, 그것은 분명 인젝션, 사람들의 기쁨인 것이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없고, 가족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인 것이다. 가족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주자가, 떵떵거리며, 숱한 울 밑에선 봉선화들과만 놀 때에, 그래도, 소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분침도 아닌 것의 하모니처럼, 다소 아날로그풍의 감성일지라도, 그와 같은 문학이 잡히고, 그와 같은 섬이 보이고, 그와 같은 시스루에서 독립적으로 노는, 마한, 변한, 진한과 같은 사람들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주 옛날에는, 우리나라의 티비가, 사회 현실이 너무나 정열적이고, 축귀적이며, 사탄을 보면, 김재규처럼 그 자리에서 매그넘을 꺼내, 이마를 쏘아 죽이는 세상으로부터, 상처 입은 이마를 붙여주고, 이마를 치료하고, 오직 이마 만을, 마귀들은 마자만 붙어도 위로를 얻으니까, 그와 같은 극치를 우리가 살아보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는가? 평생 쫓기면서 사는 사탄이라니, 티비가 적당히 여의도 같고, 밤섬 같고, 안면도 같고 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사탄에 질식해 있다가, 군사 정권의 서슬 퍼런 칼날에 있다가, 티비를 보면서, 도리어 드라마적인 여유를 얻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그런 것이고, 과학적으로 그러했던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시기에, 홍콩 영화가 있었고, 일본 대승 불교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처럼, 사탄이 선명해지자, 이 모든 것들이 옛 것이 되었고, 가상이 되었으며, 주자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생각도 없고, 자지도 없으며, 그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 좃도 모르는 이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행석을 좋아한다. 고행석의 내용을 보면, 그 옛날의 실천문학 문학잡지와 함께, 요수도시가 내비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스럽고, 그것이 비상하며, 그것이 절대적으로 보인다. 이론으로 들어가면, 설명을 많이 해야 하고, 그때문에 다시금 사람들의 자지만 빨개지는 현상이 발발하게 된다. 그래서 독일철학에는 인튜이션이 없으나, 나는 독일철학에서 선물 받은 그와 같은 직관으로 말을 풀어가는 경향이 있다. 고행석은 마치, 그와 같은 이진의 사탄의 가계를 잘 아는 것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가상이다. 그것은 연출이고, 그것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그런데, 마치 실제하는 것 같은 것이다. 민족주의는 아름답고, 민족주의는 경제적이지만, 민족주의는 민족사관학교 같지만, 민족주의는 아무런 이론이 없는 것이다. 영문학은 민족주의인가? 이와 같은 서슬 퍼런 포스트 모더니즘의 칼날을 내비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는가? 우리가 관념의 노예로 살고, 평생, 범주의 하수인으로 살지만, 가끔은 아무도 없는 관계로, 관념의 주인이 되고, 카테고리의 교황처럼 군림할 때가 있는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타이거를 보면, 어찌 보면 굉장히 불쌍한 것이다. 뚱뚱한 시베리아 호랑이가, 저기 어디 북쪽으로 흐르는 강에서 자주 발견된다고 하는데, 시적인 매력의 대결에서, 그냥 시베리아 호랑이가 언급만 되면, 그것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이고, 지이십이며, 그것은 다음을 위한 것이다. 영문학의 관념에는, 마음껏 사탄의 애니메이션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마음껏. 그렇다면, 영국 고전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동이 나더라도, 동인문학상, 일본의 넘치는 괴물 만화, 괴수 만화, 초능력 만화, 일본의 초월 철학 만화를 볼 것인가? 우리의 마음껏은, 그렇다, 대승이란 본질이 귀신론인 것이다. 우리가 한발짝, 관념의 에세이를 읽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정말 모든 문학의 끝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이번의, 죽은 다음에는 안타까운, 누구나, 대구의 정신과 의사도, 그 모든 귀신들의 대승들을 가리켜, 한번 싸워보고, 소승의 에세이적인 스피릿을, 남들과 똑같이, 잘은 모르지만 쇼미더머니의 레퍼들처럼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도 그 젊은 배우를 비슷하게 생각한다. 배우에게는 영화가 분신과도 같다. 사탄이 어사일럼을 운영하는 영화 학교에서는, 인간이 거기에 들어가, 천사가 찾아왔어, 싸바싸바, 프랑스 말이라고 하는, 싸바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아무도 모른다. 대구 정신과 의사는, 강촌을 지나는, 민족주의 청년 학생을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배우는 시카고 타자기를 찍으라면, 찍어야 하고, 내 특급 칭찬이야 찍으라면 찍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말살되어 있고, 그의 공부는 무엇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꼬네의 거대한 음악이 넘쳐 흐르는, 학생들이 마침 타고 있지 않는 경춘선의 기차 안에서는, 공부도 하고, 섹스도 하고, 공부도 하고, 말도 영문학적으로 솔직한 사람이 엿보이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사탄의 카테고리에 깨지고, 세월호의 아이들은 사라졌으며, 유조선인 경우에는 양명학만이 바다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사탄의 카테고리에 깨지는 것이 먼저이고, 다음의 속성은, 설명은 불확실하고, 아직도 그것의 내용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다.
민족주의가 뒤늦게 왕권으로 회귀되는 것도 비슷한 시각일 것이다. 우리 청년 학생들이, 모두 모여, 힘을 뭉쳐, 일본 애니가 아닌 대승기신론을 펼쳐보자는 운동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