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은 실존주의인가?
우리는 지금 서구 철학의 한계를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목도리 도마뱀 같다. 철학의 한계를 목도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가리켜, 약간 취기 오른 채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니체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라는 말을 한 것은, 제목을 정한 것은, 어쩌면, 철학을 못하는 인간의 운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플라톤은 위기에 있다. 아름답고 진정성 있는 것은, 성경이나, 피동적이고, 이명적이며, 로봇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면, 다만 하나의 플라톤의 책에도 정신적인 자부심이나, 이력이나, 신학적인 입장을 과시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학교에서는, 밀레토스 학파를 가리켜, 신플라톤주의적인 이단이라고 배웠었다. 둘 다 무슨 뜻인지를 잊어버렸다. 아마도 신대방역에서가 아닐까 한다. 서울에서는, 많은 것을 배우는데, 전 세계적인, 그러나 돌아다니다가,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게 된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는 신플라톤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제기한 사람이 없다. 우리는 대게, 도착하기 전에, 앵글로 섹슨처럼, 결혼하고, 도착하기 전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 모든 것을 편안하게 알기 전에, 내 자신에 관한 전체를 잊어버리곤 한다. 성경이 지금과 같은 책으로 되기 전의, 신학생의 바쁜 시간 속에서, 숱한 기사와 이적의 위협 속에서,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 것으로다가, 플라톤의 책을 읽게 되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황망하였겠는가? 그러니, 아주 악질적인 사탄이 아니고서는, 아무데나 그렇게 이단이니, 삼단이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신플라톤주의라고 하면, 도리어, 신학적인 속성이 강한 플라톤주의인가, 성빈학사를 들고 날 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자들의 책은, 거짐 다, 철학책들만 같았다. 겉으로는, 신학적인 교리를 찾고, 내용으로는 성경을 인용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우리가 그나마 주석서에서 만날 수 있는, 형상과 설명의 접합 단계를 만나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거짐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피니티와 인피니티의 관계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밀레토스 학파는, 아마도 종말을 강요한 것 같았다. 그 말조차, 어떻게 기독교와 떼어내어 생각할 수가 없다. 종말에 경도되어,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 신플라톤주의 복음을 들고 찾아간 것도 같았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서로 비슷하다. 철학책들이 서로 다른 것 같아도, 정확한 독방의 문법은 서로 비슷한 것이다. 우리가 전철을 타고, 새로 연결된, 기존의 노선에서, 길을 타고 가다가, 숲세권을 지날 경우, 많이 놀라곤 한다. 그것을 꿈에 본 것 같기 때문이다. 숲은 어째서 꿈인가? 그리고 전철은, 어째서 꿈인가? 그리고 서울은? 보이지 않는 인서울대학교는 어째서 꿈인가? 막상과 선망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좀비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대학에서 떨어지면, 그렇게 좀비에게 물리고 나면, 금방,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좀비가 되고 만다. 그러나 대학을, 서강대학교 영문학과 대학원을 한 학기 다니면, 뭐 기쁜 일이 있는가?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목적과, 좋은 영어를 해야 한다는 목적이, 마운트 에베레스트만 한데, 대학원을 다닌다 한들, 산들, 그렇지 않는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내게 안겨주는 것은 있다. 가족과 같은 것이 없으면, 우리는 가족주의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들의 진단키트와, 우리들의 의료 장비들을, 중국을, 세계에 파는 이유는, 어느새 그것이 가족주의적인 신화를 띠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서울은, 지금의 더 킹처럼, 가족주의로 이뤄져 있고, 그것을 과거처럼, 군부독재 시대의 공무원들처럼, 그 이전의 관료들처럼, 과시하지 않는 것일 뿐인 것이다. 형식적인 만남이었는데, 먼 친척이면, 그 기쁨을 가로막을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신학대학이라는 가족주의를 내가 인지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보면, 서강대에서, 신부들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한신대를 졸업하고, 나는 극심한 안셀무스, 그러니까 안숲세권의 도시로만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서울대학교에서도, 숲이 반갑고, 나무가 반갑고 하였지, 상대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문에서 사회대를 거쳐, 인문대를 가다보면, 키가 작고, 머리가 짓눌려져 보이는 것들이 인문대학이었다. 나는 조광조처럼, 거의 모든 나뭇잎들에 이름을 써넣고 다녔다. 그렇다 보니, 대학에서 반역으로 몰렸던 것이다. 겨울이 되면, 거짓 교사들만 연장하였다. 나는 석류 같았고, 정물화 같았고, 내 옆으로는 사다코가 우물을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다시 한신대학교를 다녔었다. 그냥 다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독립적인 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수업을 들었고, 철학과 수업도 들었으며, 그런 것들에게서 숙제를 받았고, 대학원 학생처럼 숙제도 하고 그랬었다. 나는 나의 개인적 이념이, 숲세권을 유지하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내가 아는 것의 트루 칼라즈를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그것의 브러쉬가, 수십 년을 지나, 논리학을 뜻하는 것인지는, 지금에야 깨닫는 것 같다. 나는 여자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연예인, 대학이나, 등단, 그리고 취업 같은 것을 못해도, 좀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최신의 중국 영화들처럼, 스펙타클이 늘 새로우며, 무시할 수 없는 원소들이지만, 촉나라, 손권, 우리들의 일그러진 과제들의 연속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 오래된 무협 만화처럼. 서구 철학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같은 중국 무협의 소용돌이 안에서, 누군가 잠시 커리어를 챙기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불귀의 혼이 되고 만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우리는 잊고 말았다. 그것의 동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학생 운동권에서, 그것의 이념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 학생 운동은, 늘 언제나, 엠네스티, 여름의 냉차 같은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지엽적인 통일 운동에, 언젠가는 실증을 느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관심도 그렇다. 지나치게 단조로운 진행의 복음성가도, 부르다가 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은 자경단을 조직하고, 미국에서 사격 연습을 하고, 국제적인 마약 집단과 대립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 대학생들은, 과거 시민 학생 운동의 좀더 전문적인 현실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취직 공부에, 자기들의 코어가 깨지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은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렇게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다가도, 군대를 다녀오면, 군대 이야기 밖에 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세상 모든 미스테리어스한 곳들로 따지면, 거의 버뮤다 삼각지의 급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이념의 힘도 약해서, 취직이 어려우면, 온통 취직 공부와 걱정에만 매몰되었다. 결혼도 안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위선적인 마성이 침입할 틈도 없이, 학생 운동 때부터도, 커플들을 부러워하는, 영혼의 깊은 심연이 있었던 것이다. 중산주의자 이문열을 비난할 것 같았지만, 막상, 너무 잉여 시간에 술만 마셔서, 더 이상 관념적인 독해가 불가능해질 무렵으로다가, 고르는 책이 그의 것들었다. 그러니, 국제 사회는, 한국 운동권 학생들을 너무 과신한 것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어받을 만한, 먼저 대학교 교수도 있지 않았고, 과신한 나머지, 천재적인 한국 학생이 나올 것 같았으나, 거의 아무데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정상인 것이다. 우리가 산을 오르면, 정상에 서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어쩌면 처음의 지시체가, 한국이었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그보다 먼저 있었다. 우리가 뭐든 잘하면, 국제 관념의 유행이 바뀐다는 원리에 따라, 실존주의를 우리가 잘한 것도 없는데, 끝내는 포스트 모더니즘에까지 도달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풀 수 없었고, 그 결과로써 관념은 항상 서구에서 우위를 가져갔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말뚝이라는, 희한한 반소설 같은 것을 누군가 쓰고, 우리가 읽고, 소설보다 낫다, 논문 같은 서유기보다 낫다 했었다면 모를까? 우리는 우리 식대로, 서양을 무시하는 버릇이 있어서, 단지 그것이 건축의 한 장르인가보다 했던 것이다. 문학의 새로운 묶음인가보다 했던 것이다. 서양은 우리가 가까운 줄 알았고, 우생순하는 것처럼, 그렇게 실존주의로 부르자, 우리는 대답할 줄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부르자, 우리는 마침내 전광렬의 허준 했던 것일 수 있다. 우리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우리는 존재 상호 간에 성실했고, 우리는 처음으로, 뿌듯하게 지는 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지리산으로 내리자, 거의 모든 철학이 사라지고 말았다. 독일은 통일도 되고, 소비에트 연방도 무너지고 그랬다. 그렇다면 서구 철학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그들의 정신은, 우리를 무엇으로 여겼던 것일까? 돈 코자크 합창단,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쯤으로 여겼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들의 학습과, 우리들의 학교 분위기가, 그와 같은 이상한 정신적 선민 의식과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늘 언제나 알 수 없는 부작용 같은 것이었지, 가능은 하지만, 불온하고, 불순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철학적 동기를 갖고, 도리어 과장된 계급 의식을 조장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백신 주사 때문에, 다른 관념이나 칼라, 함수나 패션 같은 것에서, 인간 본질을 능가하는 시선이 가능하다고 여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공통된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작가가 많고, 관념의 연합이 많고, 그에 관한 개설서, 포스트 맑시즘 같은 연구서가 많은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러운 것이었다. 영화는 원래, 도덕의 한 줌 같은 것들이다.
한국어는, 과연, 그것의 모든 화용들과, 집합과, 가능성의 영토가, 서구의 모더니즘을 능가하는 것일까? 우리는 정확한 물리적 수식은 몰라도, 단어가, 단어 자체가, 역사와 동시에 화용적 영향, 가치, 그리고 단절적인 빼어남을 갖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경천동지할 만한 서구의 역사는, 그들의 새로운 어휘에 정당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고, 오래된 것들과는 그들 인간 자신이 매개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으로써 우리는 알아서 기고, 생각하고, 존경하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그러니까 노래를 만들고, 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더라도, 스위스 시계처럼 그것들끼리 연결되고, 그럴 듯한 세계사적 문화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모든 것들의 능지처참적인 매개가 되고 나자, 오래된 한국어가, 우리들 좀비들을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공간이 있는 것이었다. 소설가들은 알지 못한다. 서양 철학자들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동양철학자나, 한국철학자들도 알지 못한다. 사탄과 싸우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나, 반드시 그와 같은 육본 건물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만 능지처참적인 매개가 아닐까? 인간이 경험하는 것이, 경험하는 인간에게는, 다 맞는 것으로다가....
사탄들은 말초적인 단일 권력을, 대게, 민중들을 향한 총부리로 여기곤 한다. 그래서 과거의 그와 같은 총부리였던 실존철학이, 그만 이상해지고 만 것이다. 하이데거는 실제로, 나치 권력의 내부에 있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중구난방하다 보면, 반드시 다시금 나치즘적인 하이데거 권력으로 귀결될 것으로, 그들은, 그 시절에는,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존재와 시간을, 한국 청년이 통독을 할 것으로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읽지 않는 이에게는, 좀비의 이빨처럼 될 것이 분명하였으나, 읽은 사람에게는 숲세권적 영혼의 자유로움 같은 것로나 있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음악이나 체육, 사진이나 미술, 그리고 건축, 그런 것들을 두루 가리키는 것일 때가 많다. 현대인은 반드시 경험이 전통과 떨어져 있고, 게토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는 곳에서, 철학을 마감하게 된다. 항상 빼어나려고 하나, 감각적이 되고, 다시금 정리하려고 하나, 혼란해지고, 그래도 인격을 기억하려고 하나, 이미 초록 물고기처럼 경험적 공간이 달라져 있는 것이다. 감각에는 눈이 없다. 모든 시도는 논리와 같고, 사회적인 연결은커녕, 개인적으로도 그것이 불가능해지면,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개개인이 답답해지는 것은, 옛날과는 다르게, 그 때문인 것이다. 관념이라도, 신문 지상에서의, 평론에서 얻고자 하나,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 금세 그것은 감각적이 되는 것이다. 좀비는 감각이고, 감각은 사라지는 것이나, 누적이 된다는 것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더 킹이라는 드라마의 작가가, 좀비 드라마도 연출했다는 것이 생경한 것이다. 한 번 좀비에 물리면, 미국 감각의 자부심에서는, 좀비가 된다는 것이 기정 사실이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책을 모두 읽으면, 실존주의조차도, 좀비가 된다는 것도, 미국 감각의 자부심 같은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영원히 서양 철학은 할 수 없는 운명의 것들로 여기곤 하였다. 그와 같은 절망에는, 내가 일본 공포 액션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는 원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는 아무런 승자가 없는데, 항상
항상
한국에서는 뭔가가
나오는 것이다.
지옥의 입에는, 논리학이 기생충들처럼 짜여 있는데, 그것을 반대로 연출하면, 아름다운 성가곡이 되는 것인가......
한국 사람들이
코로나
그것을 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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