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석과 버무려진 14편에서의 슬픔의 극치
사람들이 평범한 외모의 작가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해석과 감상이 인격의 배 나온 모습과 버무려져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음색과, 모습의 인기와 구원을 받는다. 그와 같은 순환은 아름답고, 작가가 있는 풍경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동묘지 뷰의 아파트에서 너무 오랫동안 피서를 즐겨왔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모든 화면에 힘이 있는 것 같지만, 자유가 있고, 실상은 힘이 없는 것이다. 작품은 우리에게 감동과 기독교적 은혜만 주는 것 같지만, 실은 정신병도 주는 것이다. 능력이 있고, 해석이 밑바탕이 되고, 외국의 작품이라면, 금세 국내의 인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내면적인 기계가 있는 사람만이, 서울을 즐거이 활보하고, 아무런 독성이 남아 있지 않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그와 같은 한국어적인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기회주의적으로 언급을 하자면, 우리는 예배 시간에 독을 주입받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독자이고, 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위로와, 부활의 영광을 받는 사람이다. 얼마나 세계가 불쌍하면, 독일이 다 있겠는가? 독일이라고 하지 않고, 은하수라고 하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일을 가리켜, 독일 독일 그러니까, 불쌍해지는 것일 수 있다. 은하수 은하수, 혹은 할리데이비슨 밀워키, 그렇게 부르면, 얼마나 국민들이 까닭 없이 행복해 하겠는가? 작품은 우리를 외롭게 하고, 사람들이 독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예배는, 전후에는 아무런 독성이 없었고, 독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교회가 되었었다. 목사들은 성경의 내용처럼, 교회를 짓자고 했고, 신도들은 성경 속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교회를 지었었다. 그리고 아직은 에디슨 등불들이 장악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가난 속에서, 은하수를 바라다보곤 하였던 것이다. 전후 문학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처럼, 손쉬운 것일 수 있다. 지금은 목사들의 성장의 한계가 있고, 말씀들에 독이 많다. 멈추면 독이라는 물리학적이거나, 환경생물학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이중집합이나, 양가감정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악역을 맡았던 히브리 사람들이나, 헬라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그 어디로 말씀이 진행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티비가 독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티비는 홈쇼핑이고, 티비는 뉴스이며, 티비는 전문적인 정치 채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늘 부적당한 곳에서 멈추고, 그것을 사람들의 멈춤에 전가하며, 항상 새로운 사탄의 가능성에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든다. 사랑은 독이다. 그 좋은 사랑의 기술마저도, 지금의 주자의 눈에는, 독이 가득한 문장들인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사디즘, 마조히즘, 자주자주 언급하는 것도, 내 학생 때는 독성 변환의 것을 마음으로 느껴서 피했는데, 마땅한 언급이 없으면 그것 자체가, 사람들의 한정된 지능 앞에, 오또리터리어니즘인 것이다. 그리고 숱한 생각의 대가들, 공동 묘지 뷰가 있는 아파트나 호텔에 다시 올라서면, 우리는 놀고 싶어서 실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퀴즈의 바쁨 때문에, 퀴즈 풀 때마다 답이 틀리는 희한한 현상 때문에, 실직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기업이라는 말이 무엇이겠는가? 현상은 그러하나, 우리에게는 기업이 있다는 주장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교회라고 안하고, 세속적인 영어적 명칭을 따오면, 컴퍼니라고 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진정 누군가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기업을 사실 잘 느끼지 못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극빈할 때는, 우리 대한항공을 비롯한, 서양의 현대식 기업들이 그것들의 로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와 같은 공간을 내다보거나, 진행하거나, 그와 같이 허우적대거나 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다. 미국 영화가, 그렇게 산업적이고, 지식적이며, 나름 미군들처럼 단단함에도 불구하고, 공포의 현상에 매혹되는 것은, 그것의 영광의 뿌리가 자기들에게 있다는 것이 실감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미군들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끄러워 안 내비치는 것이 아니지만, 에리히 프롬의 덕분이었다. 마르쿠제. 아도르노. 아도르노는 재즈 사람들에게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는, 실질적인 사상가가 없고, 영화적인 감동으로, 혹은 아름다운 팝송들로, 그것의 존재를 내비쳤던 것이다. 어째서 미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어째서 베트남에서 패전하여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레너드 번스타인이, 학생들에게, 클래식 음악에 대해 설명해줄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미국식 자유 같은. 미국식 음식 같은. 자동차의 시동을 걸 때마다, 켄터키. 미국이 없을 때마다, 텍사스, 캐나다를 보면 되고, 캐나다가 미국과 거의 같고, 아이스 하키만 조금 더 잘하는 것 같고, 그것도 아닌 것 같을 때는, 멕시코가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사람은 외국 존재에 의지해서, 마르케스라든지, 보르헤스라든지, 성장할 수 있고, 영화와 같은 그림자가 아니라, 지식인의 선명한 사진들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잔인한 사건과 사고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미국인들의 완벽한 형상이, 달을 탐사했던 우주인의 우주복, 그런 것이라는 주장도 하마터면 나올 뻔 했다. 일본도 지금 공허상태이다. 이상화의 호가 탄허일 것이다. 갑자기 생각났다. 아니면, 나의 마음이 공허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안 바이러스 상태로, 대단히 잘난 척 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사람들을 거기다 집어넣는 것을 정신이 발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학생 때는 아무런 메이커도 좋아하고, 새로운 바지나 치마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것이 나중에는, 다만 몇 개만 되어도, 그마만큼 좋아하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싫어한다는 극단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지 못하는 상태로다가.....
내가 꾸준히 야쿠르트를 파니, 사람들이 그와 같은 것만 먹은 것일 수 있고, 내가 꾸준히 자동차를 파니, 그것으로만 여행하고, 음악 듣고 한 것일 수 있다. 내가 꾸준히 말의 신기함을 자랑하니, 도대체 나보다도 말을 잘하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있는지, 진실로 알고 싶은 마음으로다가 책들을 구입하였는 것일 수 있다. 동서양의 영화에 나의 평론이 없으면,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들도 나처럼, 똑같이 한국에서 학교 공부를 했을 텐데, 자부심이 별로 없다. 이 모든 현상학들을 다 모아놓으면, 국가 기획재정부에서, 새로운 시대라고 명명할 법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를 괴롭히니, 지금을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 정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이 처음에는, 티비가 부가적이고, 진정 이름이 아깝지 않는 부가티 같고, 사람들에게 속도감을 선사했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멈춤이 생기는 것이다. 음악이 사람이 멈춘 자리에서 흐르고, 생전 경험한 적이 없는, 그 옛날 가난했던 우리들의 도시 오후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TV문학관 사람의 아들......
프랑스 에세이들과 함께, 내용을 정확히 모르는, 에어쉘, 그리고 팡세, 죽음에 이르는 병, 아우얼 바하의 미메시스, 딱 한 조각이면 전체를 알 것 같은 김윤식의 이광수, 이광수는 조금 다른 서울대 정문을 가지고 있는.
다시 사는 것 같고, 성경의 과학적 언급처럼, 우리는 분명 그것과, 사람들의 영혼과 연장하여 살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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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들의 성경과 예배에 독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모세가 가나안에 여호수아와 함께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의 이유는 진부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고, 플라톤이 그렇게 그 모습을 슬퍼하였었다. 그것은 저녁 풍경의, 골프 웨어, 알바트로스 같다.....
김은숙 작가의 이번 티비 사랑 드라마처럼, 그렇게 성경의 말씀이 슬프다.
사람은 슬픔으로 오래산다......
그것이 대학이고, 약간은 나쁜 버릇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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