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삼사킹들이 있었다.
이태진에서, 불이 난 것인가? 마태오. 태국에서 사람들이 온다고 하니, 마중을 나가야 할 텐데. 그것이 아니라, 제발 돈을 벌어, 태국으로 여행을 오라는 말일 것이다. Víkingur Ólafsson – Bach: Organ Sonata No. 4, BWV 528: II. Andante 이것을 유트브에서건, 음악방송에서건 듣다 보면, 그렇게 슬프다. 내가. 좀더 소리 높여 내가. 눈물의 황제가 된 것 같은 것이다. 아무리 작가나, 이가나, 배우나, 음악가가 싸가지없다고 해도, 처음 몇 번은 연예인 디씨를 해줘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세포라고 부르는 것이 반드시, 인체 세포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포끼리는 활성 뭔가가 있어서, 함께 종양 세포를 무찌르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기 때문이다. 내가. 좀더 오래 전의 내가. 철학책을 읽을 수 없고, 영어 원서를 읽을 수 없는 때에도, 비 오는 날에, 우산을 쓰고 나가다 보면, 유니버셜 피겨처럼, 그것이 된 것처럼, 숨이 막혔었다. 구원이란 친구와 같은 것이다. 구원이 없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진태오에서 사고가 나고, 불이 나고, 사람들이 다치고, 소방차가 출동을 하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막연한 것이고, 다만 불이 난 것일 수 있다. 사건과 사고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탄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않는 이유는, 모든 사건사고가 사탄이 저지른 것 같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야비하게, 그들을, 그들의 모임을, 그들의 행복을 비난한 것일 수도 있다. 사탄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그들이 원채, 약간의 신학적인 네메시스를 받을 만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구원과 친구가 없는데, 사탄은 거의 모든 것과 연결이 되고, 사탄은 취직이 되고, 사탄은 잘 살고, 사탄은 행복하고, 사탄은 마방진에도 잘 살 것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한계상황에 도달하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돌아오는 기분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사탄의 결계로 연결되어 있어서, 집에만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거의 같은 심리적 압박이 아닌가 한다. 내 어렸을 때는, 우산을 쓰고, 교회에 갈 수도 있었고, 친구, 혹은 구원에 갈 수도 있었고, 좋아하는 누나와는 미래를 약속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인 고민에 짓눌려, 가슴이 극심하게 조여온다고 해도, 조여정, 그렇게 국소마취를 하고 나면, 견딜 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앞의 것은 하나도 없는데, 지금, 사탄과 형이상학의 연대에 짓눌려, 아무런 더 킹, 영원의 군주를 못하겠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 말을 대충 하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친구들을. 그런 신학생들을. 교회까지 갈 것이 아니라, 네가 만나는 거리를 다윗의 장막으로 여겨라하는 말이 있다. 내가 한 말이다. 세상은 예술품과 같다. 철이 부식이 되어 있다면, 그렇게 예술 작품 같을 수 없다. 꽃이 피어 있다면, 그렇게 예술 작품 같을 수 없다. 언론과 기사가, 사탄에 대한 해석 없이 발표하는 것이 그렇게, 독자 반응 비평 같은, 독자 팔일오 독립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거대한 도시 공장, 버려진 창고를 개조해, 술집으로 만들고, 거기서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태진에서, 마방진에서, 유나이티드 킹덤에서, 프리메라리그에서, 고선지에서, 불이 나고,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소식이 사람들을 그렇게, 현실 감각을 떨어뜨려 놓는다. 몇 개의 킹은 내가 본 적이 없다. 내가 유일하게 본 킹은, 더 킹, 영원의 군주,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루갈은 사탄과 결투를 하나보다 했더니, 변죽만 울리고, 중국만 키우는 것 같아, 보다가 말았다. 우리는 눈이 커지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킹이다. 킹. 우리가 햄버거를 보고 눈이 커지는 것은,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소리이다. 많이 좋아하는 여자가 앞에 와 있는데, 눈을 가늘게 뜨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연결, 조금 부드러운 연결 느낌에서 그치나, 영어에는 도킹이라고, 뭔지 모르게, 좋아하는 사람과 학춤을 추는 것 같은 게 연상되는 것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끊임없이, 드라마를 보면서 도킹하나, 정신의 연결은 미미한 것이다. 연결이, 드라마를 보면서 연결되는 것도 뜻할 것인데, 마치 이 모든 작전과 연결을 본 것처럼, 미리, 연결이라고, 산뜻하게 이름했는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자기가. 자기 자신을. 연. 결. 리. 련. 결. 그러니 황비홍이, 노을 포스터를 두고, 학생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우리들의 도시적 심리에서는, 자주 있었던 일인 것이다. 드라마는 끊임없이 도킹하나, 우리는 부단히 이연걸하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북한이 끊임없이 도발하지 않는가? 우리는 규탄했다. 그 모든 것의 끝에는, 사탄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절대의 식인종이 하루에 딱 한 사람만 잡아먹는다면, 우리 지구의 인구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우리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드라마인 것이다.
그래도 마태오. 그대는 이번의 방화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탄은 그렇게, 사람들의 관념의 풍선을 도시 상공에 불어놓고, 사람들의 하마평들을 쓸어 담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섬찟하지 않겠는가? 엄마가 섬 그늘에. 섬찟. 우리가 보통 썸 탄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내가 사회에 있을 때는 사용하지 않던 것인데, 그것은 남녀의 사귐이 조금은 두렵다는 것인 것이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옛날에는 아마추어 같았고, 옛날에는 순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욕정을 참지 못해서, 결혼하는 것이라는, 아주 선명한 흑백 사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감각에 솔직해지고, 대신에 감각의 계급이 선명해진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경제적, 심지어는 문화적 계급과 상관이 없다. 감각에 눈이 있는가? 삼국사기에 나온 표현이다. 고래는 감각인가? 일본 고래이다 감독이 있다 하는데, 그에게는 감각이 있고, 그에게는 눈이 있을 것이다. 내가 비오는 서울을 돌아다닐 때면, 나는 금방, 훌륭한 소설가가 될 것으로 예상을 하였었다. 사람들도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따랐었다. 그러나 나의 글과, 말에, 이상한 메달들을 끊임없이 매다는 것들을 볼 때에, 사람은 인과의 존재이고, 논리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것이 싫고, 그와 같은 더 깊은 무례함이 싫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례함이라는 것은, 식인종이나, 실험실이나, 그것의 두 가지의 길을 갈 뿐이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배반하는 것이다. 그것의 발레리나 같은 형식을, 배반이라고 부르면 곤란한 것이다. 그것의 실랑이 속에서, 여자도 드디어 배반하는 경우가 있고, 세상 누구보다도 충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남자가 손을 내밀면, 비가 오는 하늘은, 나의 우산은, 후두두두 소리를 낸다. 그것이 제네시스의 도형적 시원에서는,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그처럼, 마음만, 마음만 충성인 경우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받아줄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을, 바하의 슬픈, 아무런 말처럼, 받아줄 수 있는 것이다.
먼저의 두 킹은, 그냥 한국적인 남자들 같았고, 좀비가 나왔던 유니이티드 킹덤은, 이름이 킹덤이었기 때문에, 킹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좁혀보면, 이렇게 제법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슬픈 이층 구조의 장례식장에 와서, 구석에서 술 먹고, 화투치는 객처럼, 말을 다는 것이 차원의 의무이기도 하겠지만, 잘 사는 내 친구 같은 더 킹 영원의 군주는, 그것의 피피엘 때문에서도, 우리들의 사전에 보다 꽉 찬 의미로써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그것에는 드라마가 있다. 여자가 손을 뻗지 못하는 것이다. 주인공 이민호는, 극중의 '드라마'와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정은채는 좀더 시스루나, 가슴 파인 자켓을 입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여자 주인공이 어째서 옷차림이 그런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반대편의 여자가 좀더 경찰처럼 입고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우리가 옛날에, 드라마를 없애려고도 했었다. 독일처럼, 다큐멘타리를 많이 만들고자, 방송사 사장들이 회의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랬다. 드라마는, 운명이다. 그러니까, 덜된 반성의 작품을, 긴급하게 만들 수 밖에 없고,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볼 수 밖에 없다. 대신에 훌륭한 감상이나 평론을 만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비오는 날, 사호선만 타도 좋아한다. 그것의 표지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인물들이 늘, 과도한 한국어를 한다 해도, 때로는 참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태진에서 화끈하게 놀다 보면, 드라마로 가득했던 호박들을 빼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환상에서 환상으로.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섹스 영화가 나오지 못했다. 국가가 나서서 그와 같은 훌륭한 정부 영화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태도가, 세계관이, 사탄의 연결 속에서, 영원히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섹스 영화가 나오면, 세상에 충실하고, 열과 성을 다하고, 훌륭한 인격으로 살았던 사람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변태나, 다중인격, 동성애, 삼피나 사피 아니면 잠을 못자는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보통의 우리는 훌륭한 인격이라는 감각이 없다. 자기가 이미 세상의 권력적 댓글자들이니까. 하지만 이상성애자들인 경우에는, 끊임없이 미적인 씨미트리를 맞추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글들도 그렇다. 훌륭한 글들을, 기성의, 닳고 닳은, 이상하고 변태적인 출판 권력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면 드라마의 겹치는 출연처럼, 배우가 직업으로 그것을 임하지 않으면, 아무리 엇비슷한 인격일지라도, 시각 장애라도 생기지 않겠는가? 인격과 인격이 만나, 잃어버리는 것만 생기는 곳에서는, 도리어 미등단 작가의 정신이 눈에 확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인간의 신체에 닿아있는, 거기 어딘가에 보편적인 형상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책 한 권 읽지 않다가, 핸드폰이 변기에 빠지는 것처럼, 생각이 물에 젓는 글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반드시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가는가? 우리가 마음으로 어디에 가는가?
킹이라는 것은 섹스의 은어이다. 그러니, 드라마가 대단히 실험적이고, 혁신적이며, 남성적인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죽음의 풍선을 도시의 하늘에, 박학기나, 마종석처럼, 올려놓기 좋아한다.
이런 나의 평론은, 이태진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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