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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대학생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by 마음대로다 2020. 6. 9.

대학생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책을 이렇게 내면, 서점에서 그날 최고 매출 부수를 달성할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정신이, 무로부터의 창조, 군인으로부터 학생으로 옮겨갔고, 사운드 마인드, 사운드 바디의 원리에 따라, 경제적으로도 꽃을 피우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군인을 영웅으로 볼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 볼 수 있는 것이고, 학생이 뭔가를 받았다고 하기가, 우리들의 기억이 매우 불분명하고, 투명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나의 말들이, 기가 막힌 에어쉘로 인해서, 대상을 포착하고, 상습적이고, 진부한 과거 시험의 문제들 사이에서, 매우 막강한, 광개토대왕비 같은 느낌을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것 같다. 모나드로까지 소급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연결은 알 수가 없다. 사탄은 성장시키지 않으나, 만에 하나 성장시킨다면, 지금의 우리 모나드는 사탄의 것인지, 하나님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공평하게 죽어갔다. 죽음 앞에 모나드는 평등하고, 사탄이 포기한 자리에서, 적군의 손을 잡아주는 한 선율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학생이 되어도 그렇게 모나드는 것일까? 평생을 모나드는 것일까? 피아노 음악이 그렇게 서양 문명의 자랑거리가 될 때, 사람들은 이진법의 컴퓨터 세계에 진입하면서, 완벽한 서양 문명의 지배를 예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음표는 모나드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장하는 공포 영화적 주제, 한 자리에서 수만 명이 죽을 수 있는 이진법이, 차라리 열만 셀 줄 알아서, 전쟁에 끌려가는 돌쇠보다 나은 것인가 하는 주장도 그것을 거드는 것이다. 학문적 사탄적 자부심은, 이슬람에게 한동안 건네지고 빼앗겼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법들에서 이미 고지되었던 것이다. 사탄들의 눈에 플라톤은 그냥 한국 국군 같았다. 조금만 공부해도,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아리스토텔레스인지. 사탄은 이미 엎질러진 은하수처럼, 백 번 생각해도, 고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과, 습관과, 생각의 대상과, 일치할 때가 많았고, 사탄도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사탄도 솔직한 것이 좋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위도의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으니, 생각을 이진법 이상으로 따지고, 사람들을 협박하지 못하는 그들은 포기하였던 것이다. 전쟁에서는 포기하지 않으나, 언제나 되살아나고, 남들을 전쟁터에 보내니까, 아리스토텔레스, 그런 것에는 포기하는 것이 있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법은, 연장하는 것이 없다. 딱 문법만 하다. 그리고, 영원히 그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문법은 가시나 뼈와 같고, 그래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문법주의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도 남기고, 피직스도 남기고, 윤리학도 남기고, 미학도, 레토릭도 남겼다. 별로 플라톤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의 학자들은,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법에는 미학적인 연장이 없고, 오직 가시와 뼈의 공간 안에서, 피의 유출만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다 뭔가 싶지만, 어린이 같고, 어린이의 학교 같고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문법이 기록된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단계로 이뤄져 있고, 판단하여 멈추는 것도 있고, 잘 몰라서 멈추는 것도 있는 것이다. 잘 몰라서 멈추는 때는, 죽음밖에 없고, 판단하여 멈추는 때는, 휴식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법에는, 그래서, 다른 유명한 작품들처럼, 판단이 있고, 휴식이 있는 것이다. 동일인의 작품인데, 어찌 그 정신이 다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모나드 안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휴식하지만, 사탄들은 모나드를 가로지르는 가시와 피의 현상들을 늘 언론에 흘리는 것이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그들의 저변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충격이 깊고, 그들의 무리에, 그러니까 고국의 임마누엘 칸트에 돌아갈까 전전긍긍하는 편이다. 그들에게 반대할 수는 없고, 다만 이곳에서 활약하기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균도 보면, 그의 전기가 사뭇 구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동쪽으로 가도 지옥이요, 서쪽으로 가도 지옥인데, 그래서 동인이고, 서인인데, 허균은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들 무리 중에는, 창이 없는 모나드 안에서, 피를 보지 않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항상 멍이 들어 있고, 항상 병이 들게 되어 있고, 항상 더러우며, 항상 미세먼지들을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을 보면, 그런 것들이, 그런 기미가 있는 것 같더니, 과정을 거듭할수록, 도리어 밝고, 환하고, 힘이 넘치고, 사람들과 사이가 좋고, 푸른 빛이 가득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영국에서는 영국 문학이 발전할 수 있었는가? 독일이 그처럼, 크랑켄하우스, 영국을 침범한 것은 오래된 정원 전통에서는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영국 문학이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어째서, 라이트 형제나, 포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가? 우리는 에디슨도 없고, 맥도날드 햄버거도 없었다. 사탄들도 행복하고, 사탄들도 불안하고, 사탄들도 증오하고 그런 것이다. 대신, 우리들의 일반적인 과정과는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은 것으로 인해서, 얻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사탄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코뮤니티에, 그들의 집단과 의료 정책에 의존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부터 사탄이었는지는, 우리나라가 언더우드, 아펜젤러 이후로, 이렇게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의료 선진국일 수 있었는지, 그것을 묻는 것보다 어려운 것인 것이다. 과정은 선명하지만, 정확한 경계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사탄은 움직일 수 없다. 동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행복할 수는 있다. 우리가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아무런 차별 없이 행복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능력도 없다. 반드시 뭔가를 깨야 하고, 그것을 벽 속의 CCTV에 비춰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게 사람은 도자기처럼 생겼다. 움직이지 못하는 도자기를, 자꾸 때려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이 그들의 산파술적인 교육 방법인 것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정신주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한국 현대사적 주장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매우 약한 관념의 주장들을 하고, 실제에 걸쳐서는 사탄의 산파술을 따르는 편이다. 박정희도 그렇다. 그의 행적과 기록은 아름답기 그지 없으나, 그에 대한 이런저런 보고는 사탄의 산파술, 그러니까 깨는 것들의 연속이었고, 다름 아닌 군인들이 그런 깨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거칠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전쟁 이후 정신은 군인에게 있었고, 일반인들이 전부 군인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신은 학생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전후에 우리는 공부하고, 우리는 생각하였으며, 우리는 좀더 옳은 것이 무엇이고,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 고민하였었다. 그러나 항상 모나드는 것이 있는 것이다. 모나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생각이 멈춘다. 노랫소리가 나오면, 그나마 그것을 붙잡고, 마법의 성처럼 날아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영화들을 보면, 항상 서구 주체의 문화상에 비추어서, 사탄과 이진으로 싸워도 되는 행복감이나 여유를 챙길 수 있었다. 우리는 서양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서양은 한번 그런 생각을 안했던 것 같은데. 여자들은 주자를 상대할 때, 자기들은 차라리 무지주의자이다 주장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들 무리에 가거나, 그들 무리 안에서 남자들을 만나게 되면, 다시금 교육주의자나, 문화주의자로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백번 그렇게 돌아와도, 주자 앞에서는 다시금 무지주의자로 바뀌곤 한다. 사탄은 보이지 않는 틈을, 내비치는 틈을, 모두 여자들의 성기로 바꾸는데 천재와 같은 하늘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늘 감동을 받는다. 문학 공부를 하고, 연애를 하다 보면, 그때 열리는 것은 마음이기도 하지만, 성기이기도 하는 것이다. 무지주의와 주지주의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 여자들의 이상형인 것이다. 바보 온달이, 온달이나, 장군으로 나아가지 않고, 바보로 나아가는 것을 어떠한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사탄의 감시 아래, 마땅한 대책은 없는 것이다.

 

 

 

반듯한, 일자형 도로의 연세대 교정이, 최루탄으로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행여 다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는데, 학생들의 사진을 좀체 찍어주지 않고, 비존재로 밀어내려는 사탄의 오래된 계략을 알게 된 지금, 차라리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들의 사진을 남겼구나

 

 

뜨거운 여름날, 느티나무 아래서, 존나 반가사유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들의 정신이, 요나의 고래 뱃속에서처럼, 매우 깊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