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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대한제구에 관한 명상

by 마음대로다 2020. 6. 29.

대한제구에 관한 명상

 

 

 

 

 

 

 

우리는 클래식에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혼자 사느냐 물음을 받았는데, 실제의 감각은 먼지를 하나 가득 마시는 느낌이었다. 그런 것은 좋지 않고, 옳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감각이 그렇게 알아서 뛰고, 날고, 뒹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핫트럭 갖다 줘도, 김옥균의 삼일천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만 장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다수, 주변 사람들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나같이 공부 아니면, 휴식만 있던, 혼자만 바쁜 철학생이었던 내게, 겨울에, 교회 친구들이 다른 잘 모르는 친구 이사를 돕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싫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가니까, 몇 명 없었지만, 떠밀려서 이사 현장에 가고 말았다. 교회는 봉사의 천국인 것 같아도, 나 같은 인원을 보면, 막상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어째서 저녁에 이사를 하는지 모르겠고, 하필 눈이 그렇게 내리는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지금 있는 집이, 이층에 있었는데, 내 눈에는 좋아 보이는 집을 그렇게 떠나는 것이 배가 아프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문학적 불만자를 제외하면, 여자 친구의 가족들이 많았고, 어쩌면 아이 때부터 있던 곳을 처음 벗어나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이사 물품들이 그렇게 고급스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고급스러웠다. 그런 것은 미시적인 것이고, 순간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며, 그렇게 영영이 생각나는 것들도 아니다. 내가 사랑해서 그런 것일 수 있고, 내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족을 등한시하는 멘탈, 그러니까 철분을 갖고 있어서, 반대로 가족을 위하는, 남의 가족을 위하는 자리에서는 마음이 더욱 쏟아져 내린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고급스러웠고,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 소금을 뿌리자고 했다.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소금이 물과 반응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였고,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자 한 명 없다가, 그와 같은 실험에, 남자의 목소리를 또한 거절할 수 없어서,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 어머니가 바가지에 소금을 담아, 계단에 뿌리니, 오가는 발길에 딱딱하고, 얇고, 미끄러웠던 곳이, 금세 눈이 녹는 것이었다. 사람들도 배웠던 것이다. 엔에이씨엘. 우리 여자 가수들 중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좋아하는 것도, 사용 한도가 있었고, 무덤덤하게 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계단이 미끄럽지 않으니, 금세 가재도구들을 골목에 있던 용달차에 실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의 아이디어를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감격으로까지 넘어가고자 하나, 그것을, 그런 일본 영화 같은 장면을, 우리가 사는 실제의 공간에서 연출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내 친구가, 집에 가는 길에, 너무 좋았다고 했다. 나는 무관심했다. 나는 매사에 그랬다. 나는 평범한 지방 여자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재고, 빼고, 자랑하고, 멸시하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항상, 형식을 의식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나를 기분 좋게 해서, 자기 딸과 결혼하게끔 하려는, 지방 토호들의 작당인 것으로도 생각했다. 그것이 사업이 될 수 있고, 가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으나, 우리 비좁은 한반도에 급한 것은, 그와 같은 경제적인 상상력을 기본으로 해서, 김현의 전체에의 통찰, 그리고 유종호의 현실주의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의 유예나, 자칫 돌아올 수 없는, 전진할 수 없는 머무름에 있을 수 없었다. 가족주의적인 상상력은 무한한 것이고, 사람들은 제논처럼, 학교에서 배운 것들, 그래서 갖게 된 그렇지 않은 능력들이 거기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계단이 클래식이다.

 

 

철학적인 용어가 아니고, 권위적인 문인들의 이름도 아니다. 책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클래식이 아니라, 화초를 가꾸고, 레옹처럼 그것을 서로 들면서 거리를 걸어다니고, 자기 사는 곳을 전혀 다른 도시의 사랑방처럼 여기는 것이 마음의 계급이며, 유월의 뱃노래와 같은 클래식 음악인 것이다. 그래서 꽉 막힌 말들의 잔치를 보다 보면, 그들 사이에서 언젠가 깡패 새끼들이 나올 것이 연상이 되고, 천장이던, 앞면이든, 면이 아주 훌륭한 글들을 보면, 언젠가 거기에서 졸부가 마부가 되는, 그리고 사이좋은 놀부와 흥부가 되는 것이 연상이 되는 것이다. 노신을 보면, 참혹한 신체가 있다. 그것은 도저히 소설 같지가 않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향해, 그와 같은 신체를 갖고서도, 나아가고자 했는지, 읽는 순간에서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노신이, 그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취미가, 그의 책상 서랍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데 알레고리를 계급이 아닌,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금세 해석이 된다. 같은 예술가이면,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라도,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선물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비슷한 종합적 의지는 김동인에게서도 발견이 된다. 그래서, 그것이 조금 우습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처절하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드라마로 만들면, 마땅한 음표를 구할 수 없고, 있던 것을 활용할 수밖에 없고, 아무래도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차선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공을 던졌을 때가 있었다. 정말이지, 고시엔, 나의 상대성으로서는 꿈의 구장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의 상대성에서는, 사회인 야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상대성에서는, 내가 곧 죽을 시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체력을 키우기 전에, 빠졌던 것이 그렇게 신의 한 수 같고 그렇다. 나는 아직도, 공에 자신이 없는 투수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기어코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처럼, 뿌띠 부르조아 같은 투수가 있고, 제구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고 무조건 살기 위해 던지는,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 같은 투수들이 있을 것이다. 전자가 싫고, 후자도 마땅치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후자처럼 살다가, 가끔은 멋지게 전략을 짜고, 굉장히 뿌띠, 그렇게 던지는 사람을 우리는 이상형으로 여기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 비슷한 야구 능력의 아이들 사이에서, 제구가 가능한 투수였었다. 공을 느리게 던지면, 제구가 되는가? 그것이 야구의 처음이다. 그것이 바로, 야구의 첫걸음이다. 나는 마음껏 제구하였고, 그런 공을 타자가 치면, 존경심이, 리스펙트, 생기곤 하였다. 바깥 공을 그렇게 던지다가, 파울을 어느 때는 열 번도 하다가, 그러면 친구들이나, 적들은, 이러다가 안쪽 공을 던지면 어떻게 하나, 좋을 텐데, 배운 것은 있어가지고, 하지 않겠는가? 제구가 되지 않으면, 그런 재미주의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만화책처럼 그렇게 던졌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쓰지 않는 학용품이나, 작은 스티커들, 인형들, 시계들, 그런 것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공을 던지면, 스윙 폼이 굳어져 있어서, 그 공을 친다는 것은, 그리고 눈이 가재나 게의 것처럼, 거기에까지 빠져 있어서, 서둘러 줄어들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을 치는 것이 반드시 어려운 것인 것이다. 아주 기량이 뛰어난, 독립한 운동 신경의, 그런 사람만이 칠 수 있는 것이다. 공을 스윙하고도, 타자들은 만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좋아했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공이 빠른 것이 아니었다. 빠른 공을 던질 수도 없었다. 제구가 항상 급했기 때문에, 빠른 공은 제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빠른 공이 필요할 때가 있었는데, 나의 마음은 라스베거스 호텔에 있었고,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같은 위치의 곳에, 평소에 던지지 않는 속도로 공을 던지면, 반드시 헛스윙을 하게 되어 있다. 정말 선동열처럼, 온몸을 마운드에서 벗어날 정도로, 굽히고, 팔을 늘리고, 방금 던진 곳으로 공을 또 던졌다. 그러면 나의 플랜대로, 스윙이 나왔고, 가끔은 히팅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속도는, 내게서 처음이었기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나와 같은 문학에 열광하는 것이다. 문학은 마운드의 투수와도 같고, 투수의 공의 속도와도 같으며, 사건과 사고에 늘 적절한 제구와 같은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번 선수로 뛰지 않고 사는가? 한번 장난 삼아 캐치볼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야구를 보고 좋아하는가? 조용한 야구장만큼, 마음의 클래식 음악이, 차원이 서로 어긋나는 듯이, 들려오는 곳이 없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맞춰 잡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제구에 실패하고, 쓰리 볼에 몰리고 할 때에는, 맞춰 잡는 것이다. 반드시 타자는 그날 중점 지역이 있는 것이다. 안타를 쳤던 곳은, 눈이 밝고, 스윙을 했던 곳은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맞춰 잡는 것은, 안타를 쳤던 곳을 내가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람은 미세한 차이가 있을 때는 얼마든지 칠 수 있다 여기지만, 바로 그러한 미세한 차이로 맞춰 잡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투수들이, 자신감이 떨어지면, 바로 이러한 작전이나 태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강타자들처럼, 대투수들도 실은 제구나 공의 스피드가 빨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멘탈, 그러니까 철분과 플랜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투수가 되는 것일 때가 많을 것이다. 분명 타자는 알고 있는 궤적의 공을 친다 하지만, 아주 조금 안쪽이거나, 아주 조금 낮거나 하면, 겨우 스윙의 타점을 익힌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려운 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딱딱한 돌을 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투수가, 타자의 자신감 있는 구역의 공을 그렇게 던지고 나면, 다음 타석에서는, 타자는, 마음이 아주 어려워지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안타가, 거기서 나와도, 마음이 아주 겸손해지게 되는 것이다. 공을 먼저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실은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 지금의 세계는, 그것을 겨우 덮고 지내는 것 같다. 타자가 무서운 것은, 투수가 던질 공이 없다고 느껴질 때이다.

 

 

사탄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다.

 

 

우리는 모든 시간,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알고, 오늘도 소중한 하나를 깨달으면서 살아간다. 앞으로 나아간다. 사탄이 바로 그런, 인간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신학을 그렇게 잘 알고 있다. 가족은 원래, 복음서의 지적과는 반대로, 교회요, 신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들에게는 영원한 하늘이 되겠지만, 신학적 수련과는 반대로, 사탄으로의 타락은 고래처럼 눈이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에, 태초에 궁창처럼, 먼저 그것의 전부가 달성이 되었던 것이다. 던질 공이 아주 많은 청소년들은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그것은, 적당히 삶이 어려운 평화 시기에, 영화가 필요 없는, 좋은 모더니즘 학생 영화가 되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섹스는 하고 싶은 것이, 그것의 극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가가 한번 그런 섹스에 물들고 나면, 눈이 어두워지며, 생명 연장 프로젝트로 살면서, 어둠의 자식을 낳지 않으면, 천재와 같이, 자기가 그와 같은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한번은 제구에 지쳐, 타자가 아주 복잡한 것 같을 때, 평범한 속도의 직구를 포수 미트 가운데로 던진 적이 있었다.

 

 

어떤 타자는 세상 프로야구 선수처럼 웃었고, 다른 타자는 지금까지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치찰음, 악마의 욕지거리까지 내뱉었었다. ....

 

 

그리고 투수는 한번 스트라이크를 그렇게 멋지게 던졌다고, 결혼하고, 자기가 거기에 사로잡히면, 타자를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한제구, 나는 또 비슷한 공을 던졌다......

 

 

 

가끔은 땅으로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