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전은 심리학인가?
우리가 명절날 전을 부치는 남의 집 며느리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친구에게 형이 있고, 그 형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서, 일 년 내에 결혼도 한다 하면, 얼굴을 보고, 참 복되었다 생각했었다. 친구도 좋고, 친구 형도 호남형이었기 때문이다. 영남에 있었다면, 영남형. 그리고 그들 가족들의 책을 모두 몸으로 익히고, 따르고, 채우고, 자기들의 독립적인 경제도 일구고, 마침내 평안한 스페이스, 여유도 갖게 된다면, 전라도의 아름다운 땅으로 여행도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에게만 해당되고, 남들에게는 문제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전을 부치면서, 꼭 늦게 오는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배움이 짧고, 대신에 파괴력은 빼어난, 그런 문장들을 남발하는 형님이나 동생들이 있지 않겠는가? 가족 간의 우애가 그렇게 쾌락적이고 좋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도, 사막에서, 그렇게 돌아다녀와, 가족들을 만나던 모습을 상기하여서 그런 것일 수 있다. 먼지는 바깥이고, 깨끗한 발은 가족이니까, 제자들을 가족으로 여겼던 것일 수 있다. 정치적 마인드라는 것은 인간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자기가 먹히기 전에, 먹는다는, 그런 심리전의 움직임에, 말 그대로 영원히 자기를 맡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심리전은 지금과 같은, 주자의 시대, 그리고 인터넷의 시대, 책을 어째서 읽는지 모르겠다는 시대,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는 어째서 보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피라미드처럼 우뚝 선 형체라고 할 만하다. 심리전은 표면전이 아니다. 들리는 전이 아니고, 보이는 전이 아니다. 그것의 의미론, 그리고 해석학의, 어찌 보면 전통 학문의 분야이기도 하는 것이다. 심리전은, 전쟁의 전에도 있었고, 전쟁 이후에도 있었으며, 전쟁 중에도 창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오래된 지뢰와, 병기고는, 아직 남아서 사람들을 귀신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벗어난, 전쟁의 규모나 압력, 충격에서 한 단계 빠져 있는, 그와 같은 것으로는 셀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과를 다니고, 차후에 언론 커뮤니케이션학과를 다녀서, 심리학과를 부전공으로 하여서, 모든 문장이 본문이 먼저이고, 차문이 나중이라는 감각이 생겼지만, 성경까지도, 암호해독가나, 실질로 활동 중인, 자국에서 활동 중인 간첩일지라도, 이 말이 그렇게 예리하고 정확한데, 그들의 이십사 시간으로 보면, 성경까지도 심리전의 보고일 수 있는 것이다. 심리전이 전쟁을 막을 수도 있다. 그와 같은 기능에 눈을 뜨다 보면, 이제는 모든 평화가 전쟁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심리전으로 흐르고 있다. 언론은 심리전이라고 특별한 예시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고, 발표하고, 기사들을 갖고 말하고 하는 것이지, 이것은 심리전입니다, 심리전에 조심해야 합니다. 신경 쓰거나, 너무 골몰하게 되면 두통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멋진 책임감 있는 작전장교와 같은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심리전의 끝을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의 현상이, 사람들이 친절하지 않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게 되며, 사납게 되고, 표독스러워지며, 이기적이 되고, 이해타산적이 되고, 섹스를 밝히게 되고, 섹스를 공격하게 되고, 섹스만을 생각하게 되고, 사람들이 섹스만을 생각한다 말하면서, 심리전에 그나마 활동적인 자기들을 영화 속의 주인공인 것처럼, 강철비, 원투,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의 혜택은, 그나마 뭔가에 골몰한다는 것이고, 그것의 나쁜 점은, 그래 봤자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전부가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기아 타이거즈인 것이다. 우리는 자동차의 디자인들도,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모두가 다 올케와 동서가 서로 싸우는, 가족들의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지만, 올케는 어떤 변방, 그리고 그와 같은 의식, 그리고 동서는 동양과 서양의 실크로드,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심리전으로 서로를 잡아당기고, 빠뜨리고, 호불호를 나누게 하고, 사람들을 나누게 하고, 그렇게 뒤늦게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이 자동차 디자인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가리켜서, 미국이 자동차 디자인을 하면, 크라이슬러, 포드, 로버트 래드포드, 그런 좋은 것들을 많이 만들지만, 조선 사람들은 지구공 지팔공 몇 개 만들다가, 금세 사탄의 얼굴을 한 것을 만들 것이다 한 것이, 그랬는지는, 페이크 뉴스, 내가 먼저 심리전처럼, 혹은 비판자 하는 것처럼, 자칫하면 그 말이 우리에게 모두 들어맞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말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의 읽지 않는 세계 문학을 심리전으로 하는 것처럼, 좋은 곳에 사람들이, 어린 사람들이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시계를 보고 있다가, 나오자마자, 서로 욕하고, 질투하고, 칼라일의 의상철학을 말하고, 화장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이것들이 다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말들인데, 그러는 것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애를 낳고. 그것은 사랑을 제외시키겠다는 말이 아닌가? 애를 쓰고. 애를 낳은 뒤에, 그 애를 노동시키는, 영국의 근대 풍경이, 우리나라 말, 애쓴다는 것에서 기원했는지, 또한, 내가 좋아하는 일본 영화 제목,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평생을 기성 교회 목사들의 심리전에 휘둘리고, 평생을 좋은 영화와 이상한 영화, 그리고 나쁜 영화에 시달리는, 그와 같은 시편, 영어로 하면 삶. 심리전으로 공부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고, 심리전으로 마음이 정결하게 되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심리전으로 진학했다는 말, 심리전이 논문 쓰기에 유익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자동차에 심리전을 만땅 채웠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온통 심리전을 나누고 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섹스는 그렇게 심리전 같다. 식스는 섹스이고, 핫식스, 그 식스는 다만 결여로서의 죄와 같은, 오래된 스콜라 철학적인 입장인, 심리전이기 때문이다. 심리전에 화가 나고, 심리전에 고통당하며, 애통하고, 심리전에 울고, 심리전에 사람이 싫고, 사회가 싫고, 언론과 방송, 그리고 이미자가 싫고, 심리전에 겉멋만 잔뜩 든 한국 영화가 싫고, 오직 심리전으로만 김밥 꼬투리에서부터, 다른 꼬투리에 이르기까지 가득한 일본 드라마도 싫은 것이다. 심리전 때문에, 주자만 좋고, 주자의 인과에 심리전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니까, 주자의 말만 좋고, 주자의 글만 좋고, 주자가 좋아하는 연예인만, 언급하는 시간만큼 좋고, 주자가 좋아하는 드라마만 좋아하는 것이다. 심리전 때문에, 얼굴이 녹아내려 있다가, 주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드라마라고 하는 글을 읽은 뒤에는, 그날로 열한 편을 몰아치기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자의 심리전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주자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비교적 속성이 연속하면, 그것은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니니까, 그와 같은 주희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희는 솔직하고, 아름답고, 문장이 좋고, 무엇보다도 글씨가 튼튼하고 건강하기 때문이다. 미사려구가 많고, 괜히 철학적인 척하고, 형용의 구멍이 많고, 표면은 작은데 페인트가 과대하고, 먹고 나면 화장품 맛만 나고, 하는 문장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나랏말싸미라는 심리전 영화를 보면, 무엇의 심리전인지 순간 까먹게 된다. 분명 이차대전 이후에 우리가 경험했던 심리전 영화의 계보를 잇는 것 같은, 그런 페이크 뉴스에다가, 역사 왜곡이고, 평론가들도 모든 펜을 들어 그렇게 던지고, 쓰다 말고, 잘난 척 했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의 감각은, 그리고 감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기아 타이거즈라고 말하기도 그랬다.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죽었듯이, 어떠한 심리전에 대한 오랜 인연생기적인, 그와 같은 자기 내부적인 고통처럼, 내가 영화를 먼저 보았다면, 또 사람들이 죽겠구만 했을 것이다. 심리전은 약한 데가 있어서, 사탄이 얼마든지 사망의 권세를 나열할 수 있는 터전이 되기 때문이다. 심리전의 끝은, 사탄이고, 권세이고, 지옥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부나비처럼 살라지지만, 지옥의 불길은 그 때문에 찬란하지 않겠는가?
옛날에는, 이상하게 사람들이 다들 착하고 예의가 있었다. 그것이 문명에 걸쳐, 어떠한 주소를 가지는가 알 수 없어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주소지 불분명의 사유로다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학과를 다니는 사람만이 겨우 미숫가루 같은 예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학교 학과 유물결정론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따로 전공할 필요가 없이, 예의가 문학이고, 시골스러운 착함이 문학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중 착함 같았고, 간첩,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함께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문학하는 주자만이 세상을 돌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패턴과 형상으로써, 정말 문학하는 학생들만이, 분위기를 만들고, 회사를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어는 일도 못하는데, 분위기는, 싸가지 없기는 미국 청년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국 문학이 따로 멋지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배고파서, 뛰어다니던 학교의 강의실이며, 자취방의 거리가, 한국 문학이었던 것이다.
기계는 기계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주자가 이렇게 세상을 돌릴 수 있다면, 세상에는 얼마나 문학하는 사람이 많고, 문학과를 졸업하여도, 철학과 학생들이 많은가?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그와 같은 본질실재론의 동그라미일 수도 있다. 심리전의 사람들은, 주자를 영원히 괴롭히는 심리전의 최전선에 걸쳐, 미국 드라마와 영화 안에서, 모든 인간의 언어가 사라지고, 도리어 무슨 겨우 시옷? 하는 정도의 연출과 반응, 한국 땅에서조차, 그런 그들을 영원히 받쳐주는 사망 권세로만 보이겠지만.......
그렇게 대학을 다닐 때, 심리학과를 다닌다 하면, 먼지 같은, 뱀 같은, 왠지 모르게 막강해 보이곤 하였다......
인간 동물화의 원조격인
스핑크스......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 트레인: 후롬그린 투화이트 (0) | 2020.08.18 |
---|---|
우리는 한국어를 위해 있는가? (0) | 2020.08.12 |
우리는 얼마나 슬픈가? (0) | 2020.06.30 |
대한제구에 관한 명상 (0) | 2020.06.29 |
세계는 지금 (0) | 2020.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