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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우리는 한국어를 위해 있는가?

by 마음대로다 2020. 8. 12.

우리는 한국어를 위해 있는가?

 

 

 

 

 

 

한국은 조선이고, 조선에서는 낫 하나, 칼 하나, 조총 하나 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가 버스에 볼트를 박고, 삼각형으로 된 자동차도 어렵지 않게 타고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우리가 조선의 망령, 백골징포, 황구첨정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아서, 백을 벌어서, 자본가가 팔십을 가져가고, 이십을 직원들과 노동자들이 나눠가진다고 해도, 이전에 일도 가지지 못했던 때를 떠올리며, 굉장한 한 숨이 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과학을 좋아했고, 그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은 사람이면, 너도나도 과학자가 되기를 선망하였었다. 우리가 회사에서 망하고, 회사가 망하고, 온 몸과 마음이 힘이 하나도 없는 천처럼 되어 갈 때,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티비 문학관에 아주 잘 보관되어 있다. 그래서 김포공항이라는 세트마저도, 다만 그것의 기능보다도, 그와 같은 드라마적 가능성, 영화적 영화로움을 우리가 많이 사랑했던 것일 것이다. 영종도에서부터 나는 많이 부끄러웠고, 서해대교에서부터도, 내가 도대체 뭔가 싶었다. 한번 이상한 사람을 가리켜, 그런 건축 페스티발을, 카니발을 벌이니까, 너도나도 재미가 들었던 모양이다. 학생이 운동권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쫓겨, 골짜기를 오르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조선이라는 것은, 슬픔이고, 장관이며, 오래된 것이고, 황석영, 정말 우리들의 천국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문학을 못하다 보니까, 전쟁이 나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 생각 없는 자본가가 되는 것이다. 그런 기계적인 톱니바퀴들을 어떻게 다 찾고, 어떻게 다 의미를 규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먼저고, 의미론적 톱니바퀴는 나중인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조센진, 그러니까 조선의 진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하도 일본 사람들이 조센진, 조센진 하니까, 도리어 조선에 대한 감각이 생겼던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일종의 일본의 새의 선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조센진이, 일본인 스즈키 상의 목욕탕을 다녀오는 길을, 어떻게 한국 드라마가 포착한 경우에는, 우리는 그것의 모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돈이 있었고, 발전한 과학이 있었고, 일본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으나, 이웃 민족에 대해서는 생각이 빨랐고, 깊지 않았고, 틈이 아주 많았다. 우리는 보통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해가 이마를 직접 쬐는 것처럼 싫거나 아파하거나, 땀을 흘리거나, 하는데, 아무리 싫은 사람일지라도, 비슷한 말들을 옆에서 누군가 퍼붓고 있으면, 싫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나부코, 아름다운 클래식의 아리아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꽃과 같은 한국어 때문이다. 사람은 논리학이 있기 때문에, 혼자 있으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절대 권력은 망하게 되어 있다. 남을 흉보기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이나, 비판이 아니라,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논리학이 강한 것이다. 그와 같은 부유한 재산과, 가난한 정신은, 일본 패망의 지름길이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 사람 얼굴을 하고, 일본 옷을 입고, 특히 일본 전통 옷을 입고, 클래식 음악회를 다녀오지 않고, 가면라이더 코스프레를 하지 않고, 한국 사람을 가리켜 조센진이라고 부르고, 따를 시키는 것을 연기할 때는, 유독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하이퍼 리얼러티의 관점으로 보면, 그 사람은 한국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여자들이, 가늘고, 부드러우며, 가늘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억양을 획득하게 된 것도, 근대와, 클래식 음악과,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삼중의 협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의 목소리는, 마땅한 대상이나, 출처가 없었던 것이다. 샤미센의 흐름이 약간, 우리들의 가야금과 달라서, 스페니쉬 기타를 닮았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들으면, 바이올린적인 특징들도 가지고 있다. 샤미센과 같았던 일본인들은, 동양보다는, 서양의 보편성에 보다 일찍 하나가 되고 싶은 성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클래식 아리아를 어떻게든, 그들의 흰 벽과, 건물들 사이에서 드러나게 하려고 노력하였었다. 오모시로이 하는 일본어는 그것과 충돌하였다. 한국 사람들이 바둑을 못 두고, 곧잘 오목을 두는 이유는, 그와 같은 일제의 잔재인 것이다.

 

 

서양도 그렇고, 사탄도 그렇고, 일본도 그런 절대적인, 무도덕적인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희구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만일 이런저런 대전이 끝나고, 끝날 때마다, 카릴 지브란이나, 이삭 도스토예프스키, 스트라빈스키 같은 정신 나간 듯한 봄의 제전, 그런 음악들이 창궐하고, 윤이상, 그런 국적이 없는 음악들이 사람들이 로봇과 같은 존재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들은 모여서 얼마나 좋을까, 마치 도덕적으로 결혼을 잘한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결혼한 호넷 모임의 여자들처럼 참으로 좋아했을 것이다. 결과는 그렇게 흰 벽과 같고, 극단적으로 오모시로이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흰 옷을 입고 좋아했던 것처럼, 그와 같은 과정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사회적인 것에 성적이 좋고, 판단력이 자기 재산을 초월하여 늘 재빠르지 않다. 다만 감성은 넘치고, 감성은 친구들이 많고, 감성은 언제든 여름을 선언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넘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평등하며, 언제나 호예스럽다. 공부도, 예술 공부가 좋지, 철학 공부나, 사회학, 역사학 공부는 그렇게 어렵고, 일본 사람들도 역사가 늘 싫은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이 그것인 것이다. 범주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한국에 대한 없음에 대한 희구는,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의 대상과, 시각적 형태가 선명해지는 것이다. 일본이 예술적으로 창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내부에, 자동차나, 컴퓨터, 슈퍼 컴퓨터나, 조직, 집단, 엔진 룸 같은 내부가 있지 않은가? 그들 내부에, 한국에 대한 미안함과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일본 여자와 연애하는 남자의 소설을, 영화를 찍고 싶었다. 왜냐하면,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고, 아름다운 일본을 많이 돌아다닐 수 있고, 도토리현, 그리고 미야자키현, 그리고 삿포로도 많이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방문기나 여행기 같은 것은 수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같은 수준의 산업적인 현상인 것이다. 외교적 채널인 것이다. 그가 독립적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그런 예술의 형상을 사람들에게 내비칠 수 없는 것은, 그와 같은 인간으로 구성된 육교 그리고 기계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글을 읽을 때, 왠지 모르게, 슈퍼 컴퓨터가 쓴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 것이다. 숱한 변신과 변신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잃어간다는 어떤 노랫 가사를 연상하자면, 있을 것 같은, 코스모 폴리탄들에게는 직통으로 맞는 말이 되는 것이다. 도리어 글을 잘 써서, 컴퓨터 맛이 난다고 하면,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일본에 소프트 뱅크가 있고, 그런 은행 일을 한다고 알고 있지 않은가? 숱한 변신과 변신 속에서, 우리는 트레인과 같은, 그런 드라마를 연상하지만, 코스모 폴리탄들은 언제 영원히 죽을지 모르는 상태로, 열심히 일했던 것이다. 내가 일본 여자와 한국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드디어, 이와이 슌지보다 아름답게 영화로 만들면, 사람들은 맛집 프로냐 할 것이고, 자동차나 오토바이 광고냐 할 것이고, 로만 포르노냐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의 핵심이 바로 음악인 것이다. 음악 영화냐 할 것이다. 음악적 단호함으로, 일본 여자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한국말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코리아 사람들이 조총을 줘서, 생각이 사탄과 같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한국의 평양까지 수학여행을 떠났다는 것이 임진왜란의 전체 줄거리이다. 스타쉽 트루퍼스를 보면, 무기를 생산하지 못하는 생명체가, 자기 몸을 갑각류로 만들고, 보지에서 직접 포탄을 쏘아서, 인간들의 군대를 상대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조선이라는 인명, 혹은 학명을 보자면, 국명, 반드시 그것의 최종 모습이 연상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도구적 존재이나, 그 도구를 만들 때, 머리를 쓰지, 성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늘 힘이 약하고, 모임이 없으며, 생각의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전진이 없는 민족은, 그들이 뭔가를 만들면, 언제든 그와 같은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이다. 사랑이 많은 민족은, 성기는 사랑할 때나 쓰고, 도구는 머리를 써서 할 것이나, 파씨즘적인 전쟁 형이상학의 민족은, 사랑의 충성을 반드시 도구를 만드는 데도 활용하고자 할 것이고, 반드시 그것의 성공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 모든 논리적인, 비논리적인 흐름들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아도, 모두 일본 야살의 책들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쓸쓸하고, 바람이 부는 형태가 강렬하다. 난중일기의 처음 장면 같고, 이순신 장군의 모습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사탄과 일본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좋아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습은 같은데, 그는 사랑에서도 승리하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어디에 사랑에도 승리한 모습이, 흔적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도덕에도, 전술에도, 소설을 쓰는 것에도.....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아서,

청소년 때는 그나마 한국 사람들과 구분이 없더니

남들 모르게 일본인들과만 만나면, 금방 후쿠자와 유키치 같아지고, 이런 식의 후쿠자와 유키치 같아지고, 저런 식의 후쿠자와 유키치 같아지는 것이다. 얼굴도,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들과 구분이 없더니, 금세 옷차림에서부터 뭔가 알 수 없는 변화가 생기고, 얼굴도 그렇게 변해지는 것이다. 그것을 일본 사람들은 젠젠 난데모나이 혼또니 난데모나이 하는 말로 표현하고, 때로는 성토한다.

 

 

이순신 장군상이, 중국 풍이고, 일본 풍이고 한다는 말을 우리는 제법 들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지식의 한계는, 한국 민속에 대해, 일제시대 때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쓴 일본 작가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한자 경전 경의 실 사 변이, 어떠한 민속 도구에서 연속하는 것인지, 다만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계속 읽으면, 발전하기 보다는, 다만 날염이 되는 것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고, 대신에 다른 것이 채워지지 않는다. 시간을 정리하는 방법은, 그래서 폭력 밖에, 사탄과 태공조에 의해서도, 없게 되는 것이다. 큰길을 잃어버리고, 다만 길을 몰라서, 늦추한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책의 전모일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산업화에 대한 조선인의 초조함을 보아야 할지, 일본인들의 근본적인 생각의 흐름과 운명으로 보아야 할지,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싶다......

 

 

 

 

 

 

그래도, 호모포토스 속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면,

우리들의 선비와 신사가, 밥을 먹고, 힘을 내고, 좀 더 분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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