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것이 어찌 없을까? 문학세상......
갑자기 드라마가 갈 곳을 잃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고스란히 배우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것의 균열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만 이렇게 드라마 강국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세계 각국의 타전이나, 어려움의 토로 등이 있었던 것 같다. 세계는 경제 전쟁이고, 늘, 한결같이, 마치 세포 전체가 그것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우리나라만 이상하게 경제 경제 하는 것 같더니, 그래도 학생이 나오고, 드라마가 수준 이상이고, 애증의 이문열류가 있는 것 같더니, 드디어 신허균 같은 내가 나온 것이다. 그렇게 경제 경제 하는 것 같더니, 실제로 경제에 그렇게 도움이 된다는 후문이다. 김용옥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아는 고전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케이비오 프로야구를 보면, 그것의 고뇌를 엿볼 수가 있다. 그렇게 내가 싫어하는 칼질을 내비치면서, 드라마가 하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피곤한 중에 보면서 피곤하였고, 항구에 일을 다녀오면서, 또한 그것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분명 드라마는 고뇌를 안고 있다. 하지만 김은숙이 그렇게, 나와 같은 패턴의, 나와 같은 목적의 고민을, 그토록 오랫동안 해온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도무지 자신할 수가 없다. 이것이 천재의 가능성이고, 이것이 인간의 능력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 없이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늘 다른 위치에 선다. 나는 천재를 감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세상 잘생긴 사람들을 대입하는, 그런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자. 드라마는 그렇게, 풀무질을 한다. 자칫하면 아프고, 우리는 죽는다. 아브로 팰트의 풀무질을 듣다 보면, 분명 옛 사람도 같은 생각을 했지 않았나 한다. 사람이 음식을 하다 보면, 반드시 철기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만한 일미터, 만물의 척도를 갖지 못한 것이다. 풀무질을 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어찌 보면 너무 슬프다는 생각을 하였지 않았을까? 우리는 바람이 든다. 바람기가 없으면 인간은 죽은 것이다. 인간은 바람으로 이뤄져 있다. 그와 같은 표현은 성경에 나온다. 나머지의 영역에서, 바람은, 다만 박사, 그러니까 자연적이며, 농경적인, 그것의 그림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바람은, 아담의 코에 들어간 생기였던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칼로 망하게 되어 있다. 아직은 바람일 때,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학을 제외한 모든 학과는 칼과 같다. 그것은 아시아나 항공도 그렇고, 다른 저렴한 가격의 항공사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에서 칼뱅을 배우고, 칼 바르트를 배운다는 것이 그렇게 역설적인 것 같다. 드디어 모든 버려지는 골짜기에서, 서양인들의 도움으로, 건, 그러니까 총도 만나는 것 같다.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없다. 그것이 한자 인의 뜻이다. 인은 반드시 학이 되는데, 그 학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나는 학이라고 해야 속이 편할 것이다. 서양 학자들도 그렇게 말하지만, 당연한 것이나, 처음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는, 단 한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이 먼저인가? 아니면 학이 먼저인가? 과연 학문으로만 이루어진, 한국이라는 나라가 고대에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람은 도무지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의 레플렉션이었던 것일까? 사람이 지옥에 빠지는 것은, 경제라는 목적 때문인 것이다. 학문적 목적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경제에 호응하는, 그런 인간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서양 철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밤낮 없이 그와 같은 분위기에 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딱딱 떨어지는 전치사를 쓸 줄 알아야 하며, 별 의미 없이 회전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자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경제와 관련을 맺는 것이다. 어떻게 맺는지는 아무도 모르거나, 지금은 조금씩 알려지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좀더 선명해진 것이, 나는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은 목적이고, 우리들의 미래적인 현상이다. 우리들은 대게, 학문과 지옥에서 산다. 인간은 그것의 운명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김은숙 작가의 이번 드라마가, 매우 거칠게, 자기의 긴 머리에 묵을 머금고, 방바닥 가득한 종이 위에 뭐라고 뭐라고 쓰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쓰고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전영록의 불티 같다. 우리 청년 학생 운동권은, 청년은, 그냥 학생들은, 그와 같은 표현을 좋아했지, 우리가 그것을 닮았거나, 그것이라거나, 하는 것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었다. 정은채가 아름답게 나올 때마다 그렇게 마음에 든다. 이미 우리는 불티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싫어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한다. 반드시 불티가 아니어야지만, 싫어하거나, 불티이어야지만, 대사나, 인물의 성격과 상관 없이, 마음에 들고, 좋아하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드라마는 이와 같은 불티족과, 영원, 그리고 목적이라는 막강한 중력체들 사이에서, 하나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로 나아가는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은, 그의 논문이었을 것이다. 연설은 마음 깊게 들어본 적이 없다. 논문이 매우 지난하였고, 형식적이었으며, 분량도 상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대학 논문을 읽다 보면, 김대중 대통령도 생각나고, 노무현 대통령도 생각나고 하는 것이다. 학생은 논문이다. 논문은 모두 주제가 비슷하고, 처음에는 생각도 할 수 없다가, 그 비슷한 것을 착안하여 겨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대학의 주인공은 학생이고, 모든 주권은 학생에게서 나온다. 김은숙의 폭발적인 장면 전환이, 그렇게도, 학생의 독서와 성격이 비슷하다 하겠다. 존재와 생활이 그렇게도, 학생의 것을 닮았다. 다만 선망하고 추종하면, 티비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을 이런저런 로고스로 홀루씨네이션할 때에는, 나이 어린 사람일수록 금방 자기 짧은 생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국가를 다시 세우고, 사람들의 숫자를 세려고 하자, 천사가 칼을 드러내어 그것을 막았다는 내용이 있다. 사탄은 인구수를 낭비할 뿐만 아니라, 관리도 제법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수가 없다 하면, 반드시 육성책도 강구할 줄 아는 것이다. 항상 우리는 가뭄 같은 것을 걱정하지만, 가뭄만 없다 보면, 인구수를 채우는 것은 십 년이면 충분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가 작품을 보고, 그렇게 평론을 갈망하는 것은, 우리들의 집단 무의식이, 작품과 더불어, 죽음이 쉽게 연상이 되어서일 것이다. 영문학이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죽음과 구분되어 있고, 다만 대학의 즐거운 연극처럼만 연상이 되어서일 것이다. 평론을 읽지 못하면, 인간은 죽는다. 목사들의 설교가, 다소 가혹한 데가 있는 것은, 성경의 주석마저도 인간의 희생을 당연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영웅적인 죽음이 있고, 해석할 줄 모르는 나머지 어린 인간들은,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풀무질 위에서, 인간은 서서히 화형을 당하는 것이다. 해석을 읽으면, 그렇지 않은 것이며, 내용을 즐겁게 상기하고, 막연한 의미를 재론하면서, 그와 같은 목적과 의미, 그리고 인간의 삶의 과학적인 시공간성이 자기 안에서 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다함과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 궁궐과 같은 기숙사에서, 다만 자기의 독서만으로,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중력체들을 통과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얇고 약하긴 하나, 의식은 반전 매력이 있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는 것은, 도리어, 그것의 선명한 조건을 눈으로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아무런 마찰이 없는, 평이한 시기에는, 누구도 문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 단 한 달만에 목적을 상실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 주변 학생들이 모두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도 생겨난다. 자기 학과의 각종 과제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학생이, 갈수록 자기의 존재가 작아지고, 좁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지,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학교를 돌아나가면서, 도리어 선명한 진행의 방식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숙사에 모인 학생들이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마음에 서로 맞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다. 문학생은 아벨 같다. 나의 동생 같고, 원리는 모르면서 본질에 사는 사람 같다. 내가 죽인 것은 아니나, 아벨은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작품에서는 죽음이 연상된다고. 그러나, 해설이 마땅치 않고, 소월시 연구가로 내게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국문학 연구가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이다. 마치 기적처럼, 일본 사람 류노스케가 그런 일을 했다 하면, 그것마저도 익숙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우리가 소화를 시킬 수가 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공연한 내용들은,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논문을 찾아보지만, 돌아가신 대통령처럼, 아무런 바위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산과 들은, 학문적인 데가 있다. 신학생만이, 유일하다. 율곡 이이도, 그리고 허균도 신학생이었다. 소현세자도, 정약용도, 선조도, 이순신도, 신학생이었다. 사람들은 따라간다. 사람들은 무섭고, 아는 것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우수 학생 중에 학생이요, 유일한 신학생이자, 서양서의 독서에 막힘이 없는 사람이면서도, 저녁이 되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때는 천구백구십구년이 있어서, 미국 영화 전체가, 그와 같은 준 전시체제적인 세계관이 있었다. 서울은 장횡거로써 지내간다. 철의 강도는 약하고, 결국에는 진짜 철에 의지해서, 겨우 단단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외국 철이나, 일본 철에 뒤처지다가, 겨우 진짜 철은 세계 제일이 되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문학의 집단적인 죽음 위에서, 후천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분명, 세계의 어려움에 직면해서, 최선을 다할 수도 있지만, 마음에 맞는, 적당한 섹시 여자를 데리고서, 중국 아름다운 고성의, 수많은 여행객 중에 하나가 되어, 호텔에서 십일 동안을 나오지 않고, 칼싸움을 하는 만화책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이, 허균의 홍길동전에서의 문장들이다. 그의 다른 도덕책, 사회책들은, 비슷한 선비들의 말을 하였을 것이나, 그의 작품에서는, 슬픈 불티족들의 탑에서도 진행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진행이다. 어린아이에게서 나와, 학문에 진입하여, 진행이 아니면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글에서는, 머리가 짓눌리는 것 같고, 열하일기에서는, 흥미로우나, 이렇게 많은 내용을, 이렇게 흥미로운 것으로나 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유에프토피아적인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성학집요에서는 마땅히 하나의 입장을 가질 수 없었다. 우리가 학생일 때는, 이와 같은 죽음과 평론 앞에서, 모두가 새로운 존재였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 것이나, 마치 이제는 없을 것 같은 착각이 있다. 작품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김은숙이, 김용옥도 돌이 되는 시간을, 아주 조금이나마 지나서, 돌이 되는 것 같은 것이다......
목적을 높이 사면 훌륭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면, 기숙사의 먼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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