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영상으로 전진하는가?
영상은 영의정인가? 우상은 아이돌. 이렇게까지 빵점 처리하기가 어렵다. 점심에 뭘 먹을까? 뒹굴다가, 아내가 빵 먹고 싶다 하면, 차 타고 빵 사러 가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풍요와 여지가 어떻게 없다 하는가? 그러나 지금의 세계 조건은,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빵도 먹고, 다시 잠도 자고, 다시 직유적으로 잠을 자고, 저녁에는 보쌈을 시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들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다 영의정 때문인 것이다. 옛날 조선에, 임금이 아침에 경연을 열면, 영상은 준비한 기자재를 갖고, 어디에선가 들은 것처럼, 솔거의 빔병, 영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상을 보고, 시를 읽고, 집으로 돌아간다. 임금이 집이 제일 가깝다. 다른 신하들은, 마치 경기도에 집이 있는 것처럼, 오래도록 버스를 타야 하고, 전철을 타야 하고 그렇다. 그래도, 근정전의 경연이 즐겁고, 영상이 재미있으면, 우상도, 아침에 일찍 출발하는 길이 힘들지 않을 것이다. 이러니, 세상에 이렇게도 말이 되니, 어찌 빵점 처리가 되겠는가? 사람들이 빵은 다 맛있다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얼마나 우리는 복되었는지 모른다. 미각이 아주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빵이 맛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애도 그렇다. 헤어졌다고 하나, 늙어 죽을 때까지 헤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착각을 많이 하여서, 헤어진 것이 나쁜 이유가 아닌 이상, 늘 그리워하고, 상상하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애를 근정전, 그러니까 흥분을 가라앉히고 하였었다. 젊음이란 그렇다. 젊음이란, 오전 공부를 맹렬하게 한 뒤에, 함께 까먹는 도시락처럼, 더 이상 세지 않는 작은 김치통에서 나온 김치처럼 맛있고, 멸치볶음처럼, 그 안의 파란색 고추처럼 맛있고 하는 것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 사람은 연애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교태가 없어서는, 또한 사랑을 서로 하는지 알 수가 없고, 울둘목 옆에 있는 진도를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로 교태를 하고, 서로 근정을 하고, 그래야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임금 같고, 중전 같고 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일진대, 세상, 어찌 우리나라에 연애 소설이 많이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역사가, 민주주의적인 전진이, 모두 물거품이 될 공산이 있는 것이다. 하나는 영상 때문이고, 하나는 연애 때문인 것이다. 세상에 학교보다 아름다운 곳이 없다. 히로시마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핵폭탄 하나가 터진다고 하여도, 모든 학교는 살아남을 것이다. 유치원도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의 모든 보이지 않는 감각이, 오직 하나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의 타협으로 이뤄진 과학의, 폭력의, 파괴력의 차원이 침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좋은 학교를 빠져 나오고, 영상만이, 어느 오래된 컴퓨터의 시작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움직이고, 소리나오고, 가을에는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는 멘트가 나오면, 결국은 차원의 높이를 알아보고 죽음과 파괴로 휩쓸어가는 세력들이, 학교 같은 집이 아니라, 집 같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지 않겠는가? 바스라지다는 말도 있고, 외국 말 바쓰라는 말도 있다. 대게는 힘을 겨룰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이차원적 속성에서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받은 것들이 있는지 조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전부, 우리의 것에서부터, 바벨탑, 유출되었다고 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것은 태도와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학교의 영상 아래서, 동서양 모두 바스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음악은 구성인가? 아니면 바쓰인가? 바스라지는 것인가? 학교에 등록금을 내었는데, 구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우리는 다시 화성 갈대밭에서, 한 사람은 무지개 빛 코로나 핼멧을 쓰고, 다른 여자는 라디오를 켜면서, 어디서 전파가 흘러나오는지 애타게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한국 영화가 그렇게 그와 같은 절대의 형상을 그려보려고 했지만, 구십년대 감성이 최고로 접근하였지만, 그때는 티코도 있고, 프라이드도 있어서, 드디어 도시의 남녀 둘이서, 종말론적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비슷하게 맴돌 뿐, 정통한 것은 없었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화 음악들. 코로나.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또한 성공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차를 타고, 제부도로 가고, 대부도로 가고, 했던 것이다. 구성미는 반드시 움직이는 섬처럼, 언제나 우리에게 훌륭한 나이를 묻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스라지고, 반드시 사탄이 되고 만다. 사탄은 반드시 다니는 길로 다닌다. 우리가 많이 자유로운 것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좋은 것이 나타나면, 그들은 금방 자기들의 부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원래는 자연이 사탄이었으나, 우리도 그렇고, 행동역학적으로, 사탄도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학교를 제외한 자연이 사탄인 것이라고, 레이디 멕베쓰도, 멕베쓰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가끔은 자연이 천사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신화와 세계관을 잘 알지 못한다. 그냥 우리는 조용한 아침의 밥 짓는 나라가 세상에서 으뜸이고, 선하고, 그래서 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늘 서울이 사건과 사고, 사화와 당쟁, 고문과 물고문의 고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탄이 얼마나 되기 쉬운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 것이다. 되기 어려운 사탄은 당연히, 큰 사탄이 되는 것이고, 사탄은 그것의 제일의 속성이, 되기 쉽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관동팔경을 가고, 오지로 파견을 나가고, 귀양가고, 하는 것들을 전부, 좋게만 생각하는 이유는, 위리안치, 그렇게 절대의 왕양명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탄의 확신을 잘 알지 못해서인 것이다. 집에서 유튜브를 보는데, 누구는 하루종일 먹방만 보고, 자동차, 여행, 누구는 하루종일 철학이나, 이야기, 영어 공부, 그리고 여행을 보는 것이다. 같은 튜브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말을 잘하는 선생님을,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에 좋아하는 이유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최고의 집중력을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학교 같아서인 것이다. 그것은 평지이나, 우리가 주로 집에서는 쉬고, 연예인 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아무런 사탄과의 싸움이 없어서, 그래서 반면교사처럼, 사탄과 싸우는 액션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표현이 어려운 난 잎과 같이 되었지만, 하나하나 더듬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선생님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선생님이 학교처럼 보일 때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노예처럼 끌려 왔다는 말인가? 책이 싫다지만, 최소한 잡지라도 곱게 보지 않는가? 도리어 전교 등수의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그냥 학원 같겠지만, 그처럼 비탈에 놓인 아이들은, 산양들은, 선생님의 비상한 인생철학을 두고, 침을 질질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꼭 사다함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김부식은 나쁜 새끼였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 어디로 유학을 떠나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유교의 학문을 유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백지에 그렇게 적으면, 어느 선생님이 빵점을 주겠는가? 모든 구성은 바이러스가 된다. 영원은 마치 영상처럼, 다만 생각이 없는 인간의 형상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탄도 영원한 것이다. 영상이 학생들에게 영상 비춰주고, 그들이 사다함 바깥에서 어떻게 변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민주주의적인 액션, 그러니까 실천, 실천문학적 역사, 현상, 경험, 그런 것들을 모두 지내고, 우리가 영상과 우상의 시대로 진입한 다음, 그와 같은 어린아이 같은 영상이 마침내 테두리 바깥에서 어떻게 되는 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영상만이 아니었다면, 겨우 좌상과 우상만 알다가, 영상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식으로, 영상과 좌상만 있었다 하는데, 우상이 친구처럼 있었다고 한다면, 사탄의 계략은 금세 무너지고 만다. 사탄은 인간처럼, 하나를 고집하고, 자랑하다가, 겨우 두 개를 갖는 것으로 전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손처럼, 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는 것이다. 삼손은 손이 세 개가 아닌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탄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삼손형 인간은 어떻게 영상의 바이러스적인 종말을 피할 수 있었는가?
막상 밤낮 울지는 않는다. 형식적으로는 그러하나, 그리고 되돌아 보면, 밤낮 운 것도 같으나, 그렇지 만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영상의 한계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영상의 운명을, 그러니까 영의정의 죽음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영의정은 최고가 아닌가? 그렇다고 평이 그렇게 좋은가? 평론과 댓글의 차이가 무엇인가? 중국이 아파트의 구성적인 측면을 과도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와 같은 이진적인 대응이나 판단은 댓글들에게 익숙한 것이고, 주파수가 꼭 같은 것이다. 그랬더니, 한글 닉네임에서 탈바꿈한, 드디어 영문 닉네임이, 옛날에는 정말 우리나라 댓글에 차고 넘쳤는데, 뒤늦은 일이지만 잘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을 비난하는, 그것이 운명인, 댓글들의 운명은 다시금 중국의 모든 것을 싫어하고. 그래서 잠깐 댓글들을 열어 보다가, 장비처럼 웃고 말았다. 클래식 음악은 바이러스인가? 아닌가? 그것의 음표는, 바이러스가 아닌가? 바이러스인데, 시간적인 순서의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다 보니까, 드디어 구성의 영역으로 나타난 것인가? 그래서 까르보 나라 하는 가곡들을 들으면, 우리는 머리가 커지고, 키가 커지고, 드디어 구성적인 모임의 회원으로 입회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화성에서 저녁까지, 종말론 놀이를 하던 남녀가, 불량청소년들처럼 섹스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가 되지 않고, 그와 같은 자기 저인망의 한계를 먼저 뚫고, 이제는 학교로 향하는 것이다. 영상의 괴물이 아이들을 이미 삼키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바이러스의 밥이 되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탄부터 배우지 않지 않는가? 사탄이 학교 제도를 깨끗이 인정하고, 가끔 부정의 시그널을 보내지만,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는, 먼저의 약한 인간들의 도움이 컸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춘추, 그러니까, 사마천으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나, 우리들의 사기와 같은 인물들만 있었다면, 사탄이 학교를 인정하고, 지금처럼 아름답게 되기까지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이면 백, 바이러스가 되니, 사탄은 학교 총장이나, 학장, 장학사가 되기까지 했을 것이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떨어지는 것이 어찌 없을까? 문학세상...... (0) | 2020.05.24 |
---|---|
직선의 발견 (0) | 2020.05.19 |
허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0) | 2020.04.08 |
생각의 우위 (0) | 2020.03.30 |
정신의 톱니바퀴 (0) | 2020.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