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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정신의 톱니바퀴

by 마음대로다 2020. 3. 12.

정신의 톱니바퀴

 

 

 

 

 

친구가 톱니바퀴이다. 내가 중학교 여름 방학 동안에, 윤동주의 시집을 읽은 것도, 톱니바퀴인 것이다. 우리가 바퀴벌레를 보고 놀라는 것은, 정신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왠지 깡패 같고, 갱스터즈 무비, 그리고 성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나무들과, 하늘, 바람, 별들, 그런 것들이 모두, 누군가의 그림처럼, 아를르의 그림처럼, 톱니들인 것이다. 우리는 성장한다. 비행기도 타고, 그리고 서울 구경도 한다. 어렸을 때, 그렇게 말장난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아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기가 톱니되어 있고, 남들에게 톱니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렸을 때의 친구 관계는, 다만, 톱니의 기계적 관계와 경험의 연속일 수도 있다. 관념은 톱니를 닮았고, 그렇게 말을 잘하고, 붓질을 잘하고, 단위 시간당, 원고지에 말들을 이야기로써 잘 진행시키면, 흐르는 개울물에 종이배를 고이 띄울 줄 알면, 우리는 그만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톱니의 끝에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서울이 즐거웠는가? 토토즐이라는 말도, 그런 말이 있었는데, 알고보면 서울을 뜻하는 것이었다. 롯데월드를 줄여서, 토토즐이라고 했다하면, 사람들은 흘려들을 것이다. 용자도 그렇다. 용인자연농원. 아이들이란 그렇게 황금의 톱니바퀴인 것 같다. 그들이 나가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은, 한국을 떠나, 미얀마까지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용자의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않는 이유는, 애틋한 지리보다도, 학교 교육과 정신 때문인 것이다. 레고의 장치로써, 삼성의 Z플립을 실험했다는 것도 그래서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화성 여행을 어째서 기획하는가? 우리들의 능력이, 당연히 화성이 또한 있기 때문이 아닌가? 다른 행성들은 모두 안착조차 어려운 대지라고 하는데, 화성은 참, 묘한 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맞물리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친구들을 보면, 영화 친구를 말하는지, 혹은 말하지 않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움을 때리고 있지만, 어느 때는 피부가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보통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정신을 많이 집중해야 하는데, 지금은 소재가 소재인 만큼 멈추고 말았다. 그렇다. 화제의 미국 미니시리즈, 브이를 말하는 것이다. 친구가 공부하는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공부를 하고, 친구가 방심한 틈을 타서, 우리는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다. 내가 돈 몇 천 원을 들고, 광주의 톱니바퀴를 지나, 영화를 보았던 것이 내게 진실로 톱니바퀴 같았었는지. 나는 글을 잘 읽을 수 없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깡패처럼 변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방개처럼 멈춰있었다. 소금쟁이처럼 멈춰있었다. 개구리가, 그 옛날의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광주 인근 지역의, 지나서,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습지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리어 자기가 있는 집의 오브제를 사랑하고, 늘 깨끗하게 청소하고, 곧 취직할 것 같은 누나들과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친구가 집이 있으면, 내게도 집이 있었고, 친구가 누나가 있으면, 내게도 누나가 있었다. 크기와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가 도시락을 먹으면, 나도 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도시락을 먹었다. 친구가 무진중학교를 다니면, 나는 동신중학교를 다녔다. 친구가 가족들과 잘 지내면,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이 있었으나, 그와 같은 존재의 틈을 갖고, 무엇이라고, 또한 티에쓰 엘리엇의 감수성의 분열이라고 불러야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친구가 냉장고를 갖고 있으면, 나도 냉장고가 있었다. 거기서 시원한 스테인레스 김치통을 꺼내면, 김치를 접시에 담고, 다시 김치통을 넣으면, 내가 미래에 어떤 인물이 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벤츠가 그렇게 가까웠다. 우리가 벤또라는 말을 오래도록 사용했어도, 우리들은 훌륭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벤츠를 탈 수가 없다. 친구와의 톱니바퀴가 이격 현상이 일어난 것이, 김치의 맛에서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사실 친구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슬펐었다. 그러나 눈물을 삼키고, 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었다. 항상 쭈뼛쭈볏,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보통 우리들이 친구의 집에 가면, 그들이 갖고 있는 톱니들에 놀라는 것이다. 그리고 군대를 가고, 군대는 여자들은 가지 못한다. 군대에서 훈련을 성공리에 마칠 때마다, 무조건 뛰고, 무조건 매복하고, 무조건 걷고, 무조건 자고, 그랬다고는 하나, 꼭 그만큼, 우리는 갤럭시 폴드에서 힌지가 아주 튼튼한 것들이 되었던 것이다. 걷는 중에 지나친 나무들이, 모두가 톱니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을 경과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짬밥을 챙긴 다음에, 나는 헤겔의 법철학과,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었던 것이다. 나의 팔에서, 컴퓨터가 나왔다. 그리고 노트북이 나왔다. 전남대학교 홍도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을 때가 그렇게 좋았다. 이제는 글을 쓰면, 소설을 쓰면, 품이 아주 넓고, 아름다운, 금세, 젊은 나이에 대가가 될 것이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 주공아파트 육백오호인데요, 혹시 자장면 한 그릇 시킬 수가 있나요? . 고맙습니다. 한 그릇 부탁드립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꼭 내 친구 같은 사람이 배달을 온 것이었다. 맛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톱니 같은 것이었다. 그와 같은 모더니즘 드라마로, 얼마나 많은 내용들을 모색했었는지 모른다. 나도 그랬고, 다른 감독들도 그러했다. 그랬을 때, 톱니가 상하는지, 상하지 않는지, 가능은 한데, 내가 자신이 없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노트북에다 무수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잠시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었다. 톱니가 맞물리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은정과 내가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도, 한번 드라마적인, 예를 들면 대장금이나, 대장금, 그런 것들로 가옥이 지어지지를 못한 것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얼굴이 너무 안 예쁜 상태로 만나,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왜 그리 얼굴이 흙빛이었는지 모르겠다. 단 하나의 톱니바퀴가 있었는데,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여자 하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안 예쁜 한은정은, 사람들은 보통 공부를 많이 해서, 업적을 쌓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냐 했다. 자기가 안 예쁜 줄을 알았던, 매우 슬픈 말맞춤이었던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놀라면서,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도 드디어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이 없으면, 작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작품들이, 사람들에게는 작품으로 인지될 수 없다는 것을, 드디어 발견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천지를 갖고, 슬퍼하고, 뒤돌아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인 것인가 놀라게 되는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맞물리지 않으면, 평범한 회사원이나, 직장인, 도시인으로서 사는 것이다. 티비가 조금 나은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다. 그리고 마치 천국의 계단처럼, 전국의 명승지를 찾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나처럼 과도하게 맞물려진 사람들도 있지 않겠는가? 수 많은 책들이 있지만, 별책부록으로 톱니바퀴가 하나씩 있는 책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책의 향기를 맡는 책들도 있는 것이다. 교보문고를 지나는데, 이번에는 아주 좋은 몸매로 변신한 한은정이, 자기는 책이 어딨는지는 아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나다가, 정말 수중에 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성적인 톱니바퀴를 돌려볼까도 생각했었다. 그 말이 그렇게 정수기처럼, 슬플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선물할 때, 책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한 번의 존재를 통과하고 나면, 일본 게임, 철권에서 나무 모양의 캐릭터가 있는데, 그와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다만 봉사라도 되어서, 연기를 함으로써, 연극에서, 그와 같은 문고리라도 잡고 싶은 것이다. 당연히 어렸을 때의 회전율을 따라갈 수가 없다. 의미는, 마치 영어는 한국어였던 듯, 미닝은, 우연히 광주 바깥의 신작로를 지났을 때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시험에서도 떨어지고, 과에서도 벗어나고, 기적처럼 교양과목이 있다 하나, 그런 교양이는, 고영희씨는, 경기도 고양시는, 어째서 인간 인문학 그리고 정신이 교양인가 하는,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외면한 채, 지나치게 되면, 친구는 많을 것 같았으나, 톱니가 있는 친구가,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가 만든 텅빈 도시 풍경처럼, 사람 한 명 없는 공간을 지나게 되는 것이다. 신천지가 이런 바이러스 사태를 예측하지 못하고, 예배 형태를 그렇게 조밀조밀하게 하였는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신천지가 바이러스를 다이아몬드, 잘 알아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죽고, 자기는 살아서, 낫게 되면, 그것이 무슨 형이상학 같은 것이 되는지, 그런 희한한 것을 아는 이가 하늘 아래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일종의 순간 충적률을 갖고, 대응하고, 수사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유기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제 알았다면, 내가 자주 언급하는 사탄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 수많은 바이러스를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의 톱니바퀴 안에서 지식을 증가시키듯이, 그들은 고통과 참담함 속에서, 지능이 전개되고, 입이 열리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남이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 못되는 것이다. 그만큼의 교육은 좋아할 만 하나, 사탄과 일식될 것 같으면, 금세 외면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중학교 때에, 학교에서 돌아와, 냉장고 안에 꿔다놓은 보리차를 시원하게 마시고, 저녁이 다 되도록 티비를 보다가, 미래를 꿈꾸다가, 저녁에 티비 문학관을, 알 수 없는 영롱한 톱니바퀴들로 보았던 때가 얼마나 좋았던가? 그것이 재밌을 때가 있었고, 재미없을 때가 있었다. 지금의 현기 자동차는, 자기 회사에서는 당연히 서로 맞물려 회전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의 티비 광고에서부터, 하늘에서 떨어진 티코나, 앨란트라의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사람은 사소한 소설을 쓸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나의 겨울궁전이라는 소설에서 보면, 그것과의 단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개의 초록물고기는 슬펐으나, 나는 같은 한국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보았다는 것만 빼고, 서로 맞물리지 않고 자꾸 내 갈 길만 가게 되는 것이다.

 

요즘의 한국 사람들이, 티비가, 영화가, 거의 살인의 추억처럼 노력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 그래서 내게는 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자꾸 사탄의 편에 서는 것은, 톱니바퀴의 운동 역학 때문에도 어쩔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톱니바퀴 안에서, 우리는 분명, 존재도 해야 하고, 문화도 일구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니의 술라웨시. 친구와 회전문 집에 가서, 모리꼬네의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과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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