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작가의 우연한 조각
지금 세상은 어째서 더 킹 영원의 군주는 끝났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끝나지 않는가 하는 것으로 고통받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누군가는 뱀이 되고, 누군가는 학자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둘 다 뱀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내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그렇다. 아무런 상처가 없고, 욕심이 없고, 판단이나 기준이 없는 사람이면, 다만 흥미 위주의 에세이로 읽을 것이다. 그러나 기준이 날카로운 사람이면, 상처를 받아서, 그런 인격이 되었는데,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비행을 할 줄 아는 매와 같고, 또한 아무렇게나 뒤를 보면서 피할 줄 아는 토끼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승자독식의 방정식적 피날레를 즐길 수 없는 것이다. 매의 스포츠매n 쉽, 그리고 토끼의 꽃들에게 희망을 하는 메시지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나의 이불과 같이 여기는 사랑에서 벗어날 줄 알거나, 벗어난 사람이라면, 나의 호방함이 마음에 들 것이고, 좋아하는 드라마가 끝나도 더 이상 애통해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거나, 원군이 올 것 같은, 언제 올 것이라는 연락이 끊기는 것에 더 이상 비통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다가, 어쩌면 장기에서의 졸과 같은, 귀엽고 예쁜, 작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그러다가 드디어 그렇게 말장기를 두는 사람의 뇌와 같은, 말을 만나는 기쁨을 우리는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대학이고, 그것은 공단 소녀이며, 그것은 대학원인 것이다. 자기의 비좁은, 바스라지는, 그들만의 리그와 전공 용어에서 벗어나, 드라마가 영국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 같은 공기라는 것은, 뭄바이 대학교와도 같고, 내가 좋아하는 중경대학교와도 같으며, 내가 철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동경대학교와도 같은 것이다. 숨만 쉬었다 하면, 영국 제국주의 때문에 코피가 난다. 잘 모르는 신사 숙녀 신부 수녀들의 복식 때문에서도 피가 난다. 스타벅스. 우리가 리우 카니발에서는 코피가 나지 않으면서, 유독, 그들의 누디티에서는 코피가 나는 것은, 창세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한복이 그것에 걸쳐 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고, 그렇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한복을 입고, 김춘수의 꽃과 같은, 철학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편의성, 에세이 정도라도 한 시간 이상, 내게 아름다운 정가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인가? 나는 내 여자가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그와 같은 시간을, 연체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말이 많았던 것은, 어쩌면 문학 교육이었을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언어이니, 마치 데이트라고 여기듯이, 보고 배우라고. 그리고 내가 가진 말의 연장을, 네가 펼쳐준다면, 나는 위로를 얻고, 사망과 싸워서, 이소룡처럼 오늘도 승리하면서, 내 죽림칠현들에게 보고하고 살 것이라고. 실망은 내 가까운 곳에서부터. 그래서 찾으러 많은 것을 돌아다녔던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매스미디어와 결합이 되었다. 남자들은 수준이 있었다. 항상 어린아이들처럼, 여자들은 육체가 아니면, 연장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여자의 시간이 있고, 남자에게는 남자의 군대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남자들이 말을 못하고, 균형이 없으며, 주제가 산만하고, 무엇보다도 정의롭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은 원인을 분석해보면, 여자의 것들과 그렇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마치 최근, 최근도 아니게 되었지만, 촉산 홍콩 영화에서 잘 표현되었던 것이다. 너무 빨라서, 도무지, 삭삭삭삭, 칠 수도 없을 만큼 움직이는 사탄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공중에 떨어지면서, 영원히 떨어지면서, 말도 되고, 드라마도 되고, 슬로우 비디오가 되고, 옷자락이 되고, 어쩌면 그러는 시간이, 시황제의 마차가 되고, 병마용의 군사들이 되고, 거기서 아이도 낳고, 아이가 학교도 가고, 그러는 시간이 드라마인 것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더 킹 영원의 군주를 보면서, 처음으로 우리가 낙화하는 것을 본 것일 수도 있고, 기가 막힌 용서와 고려의 차원에서는, 사뭇 학교로 떠오르는 것처럼도 보였던 것에는 그와 같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손가락을 보면, 그런 사물이 있고, 만화적인 그림이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세계 문학적인 한글을 쓰면서도, 키보드의 자판을 치면서도, 생각이 아름다운 발에서부터, 해, 그러니까 정신으로, 만주로, 고조선으로 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혹은 유명한 방송인으로서, 학교의 교수와 학생들로서, 거기서 고구려 고분을 발견한다고 해서 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기쁨과, 드라마와, 학교의 공부가 단절되지 않고, 문명이 발달하고, 가까운 주변국과 무엇보다 문화적인, 훌륭한 외교가 있고, 북한과의 통일이 있고, 생각해보니, 배신이 있지 않고, 물리학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온종일 배신하고, 평생을 배신한 사람이, 고구려 고분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모임에 참가해서 얻을 기쁨이 무엇이겠는가? 평생을 놀고 먹던 사람이, 평생을 배를 불려서, 홍수의 기간에 입과 함께 자기를 뛰우겠다 생각한 사람이, 중국에서 대체 무엇을 찾아갈 수 있겠는가? 나라가 크다는 것은, 살인과 공포 밖에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영화가 그것만 하나씩 둘씩 모으고 나면, 지금의 아이들은 그 처음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촌스럽고, 한국 사람들처럼 옷을 입었고, 주고 받는 말들이 한국 사람들처럼 촌스러운 COVID 것이다. 그 맹렬한 물길에서, 어느 누가 손을 뻗고, 어느 누가 그 손길이 가깝다고 잡아서 그들을 구해주겠는가? 그리고 그 옛날의 미국 영화 속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보장을 이제는 누가 해주겠는가? 영화를 찍고자 한다면, 기억력이 있어야 하고, 작품에 대한 무의식적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억력과 그와 같은 무의식적 의지는 같은 것이다. 미국의 코스모 폴리탄들이, 나를 경험하고, 한국 문화를 경험하면서, 뒤늦게 자각하는 것은, 그들의 인격이 도덕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매우 마모되었다는 것이다. 원래도, 영어식 발성이, 공룡의 것을 닮긴 했다. 공룡을 보면서, 그들을 닮기 위해,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노력하여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인들의, 특히 한국인들의 성숙한 영어 발음을 듣다 보면, 자기들이 과도하게 공룡적인 비음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치 맞은 사람처럼, 그러니까 자생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창고 건물 같은 데서, 맞아서 그런 것처럼, 목소리가 기이하고, 이상한 것이다. 생각은 충분히 사회적이고, 너무 많은 거리두기는 없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카나라즈 같은 목소리나, 문장들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서양인들이, 숨은 테오 깨띠드랄로푸스 사람들 같으니까.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파이프 오르간이 발굴되고, 바하가 청빙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예술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비음과 두개골적 공명을 많이 연습할 수 밖에 없었다면서. 아무튼 그와 같은 예술론과 믿음을, 거의 모든 것과, 분야와, 항목과 범주들을, 지금의 한국인들이 척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인들은 시작을 모른다. 언제나 길항관계 속에서, 뒤늦게 한국 편을 들거나, 원채 서양의 나쁜 속성을 좋아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을 원망할 것이 아닌 것은, 인간이란 원래 뭘 고를 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사랑을 뱀이랑이라고 했으니, 뱀이랑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면, 먼저 우리들의 잘잘못을 따져야 순서가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단순치들이 반드시 있어서, 사랑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면서, 일부러 적당한 고통들을 만들어, 사랑을 만들고, 배양시킨다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문과인지, 이과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도 그렇다. 우리들은, 한계는, 그 정도의, 문과인지, 혹은 이과인지 모르는 미학이 전부인 것이다. 거기서 멈추고 만다. 사탄을 격멸하고 싶어도, 마녀 사냥이나, 민족 자결주의 정도로 비화될까 말을 하지 못하겠고, 논리가 먼저 없으며, 또한 사탄의 눈에 나면, 도리어 사는 것이 어려워질까 말을 못하겠는 것이다. 늑대가 나타났다, 그와 같은 것에, 대체 몇 번 정도 후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독일의 쏘세지 부부 이야기도 그렇고, 서양의 이야기는, 임마누엘 칸트, 그렇게 슬픈 사탄의 실험실들 밖에 없다. 우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너무 날캄하게 생겨서, 행여 사탄인가 싶은, 그런 호기심 천국 밖에 고사가 없으나, 서양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늑대가 나타났고, 키우던 늑대가, 사랑으로 가득한 한국 사람들을 먹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이다.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해졌겠지, 거대한 밀실의 문을 여니까, 사람들은 당연한 결과인데도, 설마 인간이 그렇게까지 늑대가 될까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변한 사람이 성선설인지, 아니면 그런 성선설을 믿고 사람들을 실험한 사람들이 성악설인지, 정확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그냥 한국 사람들 같고, 애플, 한국 식당에서 노르웨이산 고등어 요리를 먹는 노르웨이 사람들처럼, 처음 맛을 느끼고, 기뻐하고, 그것의 결과가 이렇게 차이나는 클라스, 그런 것에 슬퍼할 줄 아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 겨우 우리가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서양 사람들은 폐쇄된 집단 무의식에서, 공동체, 벗어날 수 있다는데, 그것이 얼마나 벽을 손으로 긁는 것 같은 고통인 것인가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백 개의 사탄의 얼굴을 한 드라마나 프로그램을 보다가, 아닌 것의 소리만 나와도, 내일이면 늑대로 변할 것 같은 사람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는 졸과 같은 진짜 사람을 좋아하다가, 말과 같은, 대상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킹이라고 하면, 그것이 초왕이던, 한왕이던, 사탄이 아니면 더더욱 킹과 같은 관심이 가는 것이다. 사탄이 아닌데, 킹이라면,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무찌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산불은 그와 같이 어쩔 수 없이 번져가는 것이다. 킹이라는 늑대 양치기 소년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드라마는 나의 해석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를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다.
Eleni Karaindrou의 음악을 들으면, 자신은 사탄에 굴복하였으나, 거대한 지씨크레인 학문적 명제는커녕, 작은 미학적 차이도 사탄의 것이 분명하니까, 나를 보면서 한없이 원망하던 것이, 그와 같은 시간이 느껴진다.....
던킨 도너츠 같은, 그런 한국 드라마가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한다면,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압박 속에서도, 드디어 희망의 싹을 품을 수 있던 사람들은, 그런 특이 케이스 속의 사람들, 사랑하고, 좋아하고, 뛰어다니다가, 차단 당하고, 호흡 곤란을 느끼고, 감각의 사탄에 몇 번 의지하다가, 마침내 사탄의 눈치도 보게 된 삶을 살게 된 사람들, 사탄도 자기요, 그것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며, 아이들을 지키고 있는 것도 자기인 것인데, 드라마가 처음으로 그와 같은 규격으로 들어온 것일 것이다. 무게가 처음으로, 나눠지고, 공중으로 분산되고, 경제적인 도움은 아닐지라도, 마음의 위로는 되었는 것이다......
나의 일본인들이 그렇다. 공부도 못하면서, 시커먼 옷을 좋아하는 것이다. 공부의 묵과 같은, 진행은 못하면서, 잉크, 그와 같은 책들과 출판사들은 많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능해진 것은, 숱한 부도덕한 퀴즈 속에서, 실시간적 투표소에서, 그것들을 많이 외면하고 나오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검은 색은 아닌 것이다. 시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다. 진짜 시가 아니고, 진짜 소설이 아닌 것이다. 드라마도 그렇다. 드라마는, 더 킹처럼, 나머지까지 보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처음의 시도가 소녀처럼 아름답고, 다만 식물의 수맥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것이다.....
도깨비에서 발생했던 마음, 혹은 규격, 적당한 만남, 그래서 좋아하는 연속의, 그런 한국 드라마가 끝이 나면
더 킹, 영원의 군주 같은
갑자기 혈맥이 끊기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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