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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말의 신비함을 따랐던 어린 시절

by 마음대로다 2020. 7. 2.

말의 신비함을 따랐던 어린 시절

 

 

 

 

 

 

 

 

 

 

차의 신비함을 따르는 것이 어른들이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에는, 작은 스쿠터에서부터, 말의 신비함을 따르게 되어 있다. 비행기의 신비함을 따르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어른이다 싶다. 우리는 지나친 어른까지 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나, 말의 신비함을 따르는 그 처음을 잊을 수 있을까 싶다. 무시할 수 있을까 싶다. 누군가 말만 잘해도 좋았고, 신비하다 했고, 거기다 만화까지 곁들여졌다 싶으면 빠져들었다. 우리가 항구, 컨테이너 항구에서 일할 때, 몇 명이나 아는지 싶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말해도 고개를 끄덕이는, 경험론자가 아닌 관념론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경험론자는, 경자만 들어도 싫어하는 편이다. 거기서 일하다 보면, 지씨 크레인 아래에 언더 박스가 있고, 해수 편에는 라씽 박스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콘박스는 배에서 내리는, 콘이 담긴 박스이고, 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박스가 지씨 크레인에 딸려 있는 것이다. 낮에는 버스 같고, 저녁에는 만화방 같다. 그러나 거기를 그렇게 만화방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싶다. 거기에 들어가면, 볼 것이 없다. 그것은 어른의 증거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고, 만화 쪽지들을 말아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최종 최후의 모습인 것이다. 젊어서, 담배를 피우면서, 만화를 볼 때가 그렇게 좋았다. 나는 최종 최후의 만화, 아니 문학가였고, 우리가 문학이 아니면 절벽,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서, 만화가 갈 곳이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일본 사람들이 그래도 가장 코미디를 갖고, 격을 갖추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어떤 비장한, 무사는 동양 삼국 모두에게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문학이 담긴 만화를 나는 꿈 꾸었는지 모른다. 내가 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연에서'라는 단편에서 잠깐 그것의 칼날을 드러내었을 뿐, 그것을 이어갈 수 있는 관념의 시간이 나에게는 부족하였다. 나는 무사였던 것인가? 나는 문학가가 아니었던 것인가? 나는 신학자였던 것일까? 이렇게 저렇게 실수도 하고, 만담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는 신학생은 도무지 아니었던 것일까? 어려서부터, 처음부터, 주변의 잘못을 전혀 생각지 않았던, 나만의 차원을 가졌던 사람이었던 것일까? 담화라는 것은, 담론이라는 것은, 다이얼로그라는 것은, 그렇게 성격이나 능력이 비슷한 사람들이 주고받는 것이 아닌가? 티비에서, 카메라 앞에서, 담론을 나누다가, 사탄의 경사로 흐르는 사람들을 보고, 그 즉시 일어나, 보이는 아무것으로 적을 사살하는, 그런 사람에게 무슨 문학가의 삶이 있겠는가? 우리는 장면 전환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우리가 드라마를 볼 때, 공부의 장면과, 섹스의 장면은 없고, 오직 그렇지 않은 세상만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즉시색은 없는 것이다. 드라마가 그와 같은 영화를 드러낼 만한 재간이 없고,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그마만한 용기와, 존재에의 용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담배를 피우는 어느 산골, 혹은 달동네 만화방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하면, 그들은 반드시 중국 무협지로 갔던 사람들인 것이다. 높은 확률로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한 것인 것이다. 사람들이 무협 영화를 그렇게 눈이 빠지게 보았던 것은, 그만한 집단무의식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냥 하루가 천년 같이, 노벨 문학상 같은 것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영화가, 일본의 자위성을 능가하는 것 같은 것은, 우리들의 잠깐의 착각일 수도 있고, 한국 영화가 숱한 만화방에서, 담배방에서, 나처럼 무협 중국 영화를 보고, 총탄 홍콩 영화를 보고, 자문하고, 돌아보고, 돈이 되는 사람이, 귀신에 홀리 듯이 정말 홍콩 여행을 많이 가서, 그와 같은 경제적 낭비에 대해서, 마침내 관념적인 역전승을 해서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어제 오늘 나는, 우리가 문학이라는 것을 중고등학교 때에 배운 것은, 배웠다기보다는, 시험공부를 한 것이고, 시험에 맞춰진 그런 공부에서 실제로 배운 것은, 출제자의 의도, 그의 사적인 심리학이나, 사회에 진출했을 때, 관제자들의 비위를 어떻게 맞출 것인지 하는 것을 공부한 것 같다고 한, 어떤 멋진 말을 보았다. 그렇다고 보니까, 우리에게 사탄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관념은 육체를 갖고 있고, 관념이 없는 육체 또한 있는 것이다. 그래서 티비는 끊임없이 세상의 육체들 앞에서, 그것이 식스인데, 오직 자기들만이, 사탄들만이 육체의 주인이다 하는 것을 과시하려고 한다. 오늘도 넘어갈 수 있으나, 그냥 몇 명이 그렇지 않다고 항거를 하고, 또한 숱한 파리 같은 댓글들 사이에서, 그런 멋진 말들도 보았으니까, 이런 것을 기념해서, 나는 늘 뭔가를 기념하고, 축하하고,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폴 매카트니, 그런 것 같은 것이다. 그러니 문학은 어디서 배웠던 것일까? 중국 무협 영화에서, 한국문학이 관념적인 숨을 쉬었던 것이다. 우리는 전쟁할 수 없었고, 우리는 우리들의 키에 만족할 수 없었다. 뭔가를 알 것도 같았으나, 그것을 미처 추스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어떤 범주나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우리들의 생명이, 정말 이십 대나 삼십 대에 찬란하고, 나머지는 죽음의 영토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어서, 인연생기하여서, 중국 사람이 되고, 거기서 적을 만나고, 그것은 생명이 사탄이 아니라는 증거,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것이 아니라, 참 적을 만나고, 결투하여, 무의미로써 죽어갔던 것이다. 홍콩 영화가 그것의 무게를 들어 올리려는 것도 같았다. 국문학적 의미에서 홍콩 영화는, 다만 관념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홍콩 영화를 그렇게 노력하여서, 사랑하고, 동시에 극복하려고 했던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고,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지, 스펙터클한, 대상을 크게 해서, 터지고, 사람들이 총에 맞고, 떨어지고, 그런 것들의 세상, 존 로크의 경험론적인 오만함의 대상으로 삼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병에 걸려서, 미국도 죽어가고 있고, 홍콩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국문학이, 작아서, 죽어서, 중국의 무협에만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협이 잠시 펼쳐지는 것 같은 홍콩에도, 홍콩의 현재에도 가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외국의 도시를 좋아하는 것은, 그러나 같은 검은 머리의 국가의 도시를 꿈에 그리는 것은, 티켓을 끊고, 가고 하는 것보다, 이런 내면적인, 국문학, 시험을 보는데, 조금도 문학적이지 못하고, 사회학은 철학의 백설공주 난쟁이들의 세상인, 그런 것이 싫은 것의 내면적인 염증과 같은 현상학일 것이다. 주자가 사소한 적들에게 늘 사상을 당해도, 범인들이 밤낮없이 이상한 가족들과 스승들, 관료들과 언론들, 목중들, 그들에게 휘둘리는 것보다 결코 어렵다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한자를 말하고, 내가 고전을 말하면,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 같고, 중국 무협 영화의 한 없이 순수했던 인간 같은 것이다. 차원이고, 사회적 거리두기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차를 타고 현대를 지나면,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홍콩 같고, 심천 같고, 도쿄 중에 도쿄 같은 것이다. 죽음의 물결 속에서, 바쇼의 하이쿠만 읽어도 눈물이 나올 때가 있다. 사람의 관념은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만 남기고, 모두 사라질 때가 있다. 십자를 쓰기 위해서는, 한자 일도 쓰고, 우리들의 세로획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것은 기억나지 않고, 아홉 구 자, 팔 자, 어려운 사 자, 세상에 그런 것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싶지만, 외국인은 당연히 쓸 줄 모르지 않겠는가? 동양 삼국인들에게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오와 식스 육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만 서로 묻고 답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살인자와 살인미수, 그리고 피살인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종이와 함께, 열 십 자를 쓸 수 있는 붓만 있어도, 우리는 그 시간에 살인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쇼의 하이쿠까지 읽는다면, 얼마나 많이 나아갔는 것인가? 그러나 식스는 권력을 가지고 있고, 단순함을 칭찬하다가, 대게의 무협, 그리고 무술, 무인들의 권력이 그러해서, 누군가 그렇게 단순하게 아름다우면, 금세 그것을 발로 차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현상적인 템포를 읽어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겨우 이와 같은 권력에 질식해서 사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각기동대처럼, 겨우 그와 같은 말을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지금 하고 있으며, 친구가 풍선처럼 사라지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함을 칭찬하는 입장이라는 것은, 대학과, 대졸과, 고졸, 중졸에게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하고, 착하고, 사람들에게 그래서 인기가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의식적으로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자가, 불쌍함인 것이고, 사탄이 좋아하는 인격인 것이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지를 갖고 대구를 택했다가, 그런 것을 우리가 갖고, 지키고, 더러움의 어떤 평균을 지키는 사람들의 도시로, 대구가 그것을 완전히 박멸하고 있다보니까, 어떠한 심리적인 동요도 없이, 오늘 뉴스에 보면, 광주를 그와 같은 생각의 타겟으로 삼는 것이다. 국문학을 좋아했다가, 마음에 칼을 품게 되고, 살인자로 몰리는 사람은 얼마나 슬픈가? 홍콩도 비슷하다. 홍콩 그림자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붉은색일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영원히 사탄의 하층민인 것인가? 비구니는 비구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존만한 비마니, 비수니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여자들이 사탄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젊고 유능한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상한 찌그러진 목소리로, 사탄 사탄이라고 하는 것에는, 좋아함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목과 마음이 짓눌려져 있어서, 뱀장수의 그림자만 보아도, 재밌고, 흥미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탄이 지금 권력을 준다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다. 문명이라는 것은, 그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것은, 태초의 아프리카적인 유혹에만 벗어나도 성공인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그렇지 않으면, 남들도 죽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탄이 범주적으로 다국가인 것 같아도, 다민족, 다인종인 것 같아도, 하나인 것은, 자기들 중심 권력 언저리에서,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말의 만찬을, 부의 관리자로서, 결국은 그렇게 되었는데, 더 이상 좋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사탄도 단순한 것은 싫어하는데,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미국에서조차 애니메이션은 매우 고급스러운 것이다. 적들을 빠뜨려야 하는데, 사탄처럼 생각이 짧고, 사탄처럼 바이러스를 품고 좋아하는 것은, 이제는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멀쩡한 인격의 사람들도, 세상은 어렵고, 다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사탄은,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우리가 카페에서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듯이, 사탄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너무 많이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항상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경찰들도 짧게 조사하고, 그리고 영원히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체 어떤 것이 사탄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사탄의 영화나, 그에 관한 설교를 싫어하는 것은, 결국은 사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말의 신비함을 따랐던 어린 시절......

 

 

 

혼돈이라는 민중은 그래서 아득히 슬픈 것이다......

 

 

혼자 독서할 때

얼마나 깊은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뜻을 알지 못했으나,

지금의 것을

 

 

 

 

 

 

브금. 첫 소절만 들어도 눈물이 폭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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