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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예술이 있는가? 주희가 있는가?

by 마음대로다 2020. 7. 16.

예술이 있는가? 주희가 있는가?

 

 

 

 

 

 

 

 

예술도 예수 동네에서는 별로 권력적이지 않고, 반동적이며, 창조에 힘쓰는 것들이다. 그런데 소년 소녀가, 피라미드의 날카로운 코 앞에 서서, 황순원의 소나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나, 어디로 갈 지를 결정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예술로도 가고, 예수로도 가고, 교육으로도 가고, 철학, 형이상학으로도 가고, 그 모든 것들을 만두소 삼아서, 피를 넓게 만들어서, 한 입에 야무지게 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영어회화 아침반을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저렴한 가격의 아침 만두를, 학원 앞에서 먹기 위해서가 아닌가?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고, 어떤 옛스러운 건물들이 있고. 팥죽이 먹고 싶어지는. 아주 오랫동안, 먹기를 약속하는 것 같은 붉은 기둥들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을 먹고 나서, 우리는 오직 한 길, 한길 로로로, 그 책을 모두 읽고자 하고, 몇 권 읽고, 요한 세바스찬 바하, 한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미래는 그렇게, 동서가 구분되지 않았고, 해가 서쪽으로 져서 그렇지, 잘하면 남산으로 질 수도 있었고, 밤섬에도 질 수 있었고, 김포 어딘가에 질 수도 있었다. 완전히 서쪽으로 진다는 과학적인 주장은, 서쪽이라는 말이, 뜻이, 어떤 것까지를 가리키느냐가 설명되지 않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신기했고, 그와 같은 재미와 심리적인 고통 속에서 살았던 것인지 모른다. 다행히, 직장을 구하면, 끈기와 닌자, 명성황후로 사는 것 같지만, 적어도 학교를 다닐 때만큼은 그렇게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처럼 살았던 것이다. 예술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했고, 예술은 우리를 학과 통합을 하게 했다. 우리는 벌써, 대학도 들어가기 전에 벌써,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 어색한 표현주의나 형용사에 특징을 내비치려고 하고, 과학적, 수학적 연산 능력에 자신을 내비치기도 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에 함정이 있고, 그 모든 부분에 비인간이 숨어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내가 강할 때는, 자기의 냄새가 그렇게 강하고, 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내가 조금씩 사라지게 될 때는, 다만 버티고, 생각 없이 참고, 잘 몰라서, 초심자라서 참는 경우가 있는데, 그와 같은 인내가 조금씩 사라지게 될 때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인간이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다수의 인간이, 철학적 운명 앞에서, 마음껏 피사체가 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티비를 본 달 때, 그것의 의미는 하나가 아니다. 어딘가에서 그런 문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영화 올드보이에서인가.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렇게 체력단련도 잘하고, 그렇게 티비를 사랑한다면, 분명 오대수와 같은 초인이 되는 것이다. 처음은 우리가 인정하고, 린정, 다음까지도 우리가 마지못해서 인정한다고 할 때, 세 번째에서는 우리가 고개를 조금 망설여지게 되는 것이다. 티비는 혜성과 같고, 티비는 지금은 우리 태양계를 벗어난 나사 보이져 호와 같다. 우리에게 많은 사진을 송출하였지만, 그가 티비에 대한 상징인 것이 있어서, 그나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모습도 사각형에다가, 안테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년과 소녀는, 티비를 갖고, 사는 것이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거기서도 티비를 보는 낙오자가 있을 것인데, 모범생의 바하적인 극치에서는, 집에서 잠깐 티비를 보고, 훌쩍이게 되는 것이다.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뇌의 브라운관에 이끼가 낀 것 같고, 거기에 비오는 날 습기가 들어온 것 같고, 옛날 엠티비적인 표현을 써보면, 벌레 같은 것이 그림자처럼 잠깐 비치는 것이다. 소녀가 흰 원피스를 입고, 벌판에서, 샤우팅 창법으로 노래하고.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는, 영화관의 좌석 번호적인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의 모든 학과에 이르러, 꼭 그처럼 정신이 분열되어,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의 임상실험 대상이 된다 해도, 우리가 남친 여친 약속을 해서 영화를 볼 때에는, 적어도 좀비를 보는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문법은, 너무나 훌륭한 학교 정원, 그것의 종말에서조차, 거뜬히 우리를 지키는 산성 같은. 우리의 영혼과 마음, 예술과 정다움을 세이브하는, 구원자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티비가, 우리와의 약속을 깨고, 더 이상 아름답고 힘이 있는 팝송과 한국 가요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학과 통폐합이라고 하는, 교육부 장관의 강력한 리더십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모래성과 같고, 장미의 계절만 같고, 금모래 빛만 같은 것이다. 엄마의 바다만 같고, 누나야 놀자만 같고, 그것은 더 이상 맛있는 찐빵 속에 들어가는 팥소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터 그와 같은 꽉 찬 미디가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다. 약간 미국 풍의 재즈, 그것은 미디를 늘이고, 뒤트는 시간 같은 것을 좋아하니까, 그러다가 댄스, 그것은 미디들을 튀기고, 튀기는 것을 승효상처럼 정당화하니까. 사람들은 자기 안에 거의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가지고 온 모든 것을, 아세라 목상 같은 것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어 있다. 좀더 가거나, 좀 더 찾거나, 좀 더 유행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생각하여, 자기 만의 유행으로 삼거나 하는 것을 일절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신화의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유명한 주제를 샘플링했던 노래가, 그때도 제법 듣기 좋았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시기와 변화를 앞두고 나타난, 부산 태종대 분위기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거기서도 바닥에 물이 있는데, 태종대 앞바다의 표면을, 스치는 것 같은 것이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다른 데서 온 사람인 경우에는, 그 경관이, 한국에 부산밖에 없음을 두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남산을 가다 보면, 옆에 산이 있음을, 산에서 내려오다 보면, 무등산에서도 내려오는 길이 있음을, 대암산에서도 육공 트럭을 타고 내려오다 보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때는 그와 같은 공간이, 그렇게 진주의 촉석루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목포도 그러하나, 좀더 배를 타고 나가야, 이런저런 섬 사이로, 산과 바다의 하모니가 그림처럼 펼쳐질 것이다. 그런데, 부산은, 그 멀리 있는 풍경을 굉장히 앞당겨서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모든 동해안 도시의 특징처럼, 새벽에, 아침에, 날마다 거의 매일 같이, 떠오르는 태양의 붉은 쇼를 감상해야 하는 것이다. 한 달 부산에서 놀 때에, 약간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어느 때는 멋이 있어서 바라보았지만, 어느 때는 아침에 영화를 모두 보고, 다음부터는 진이 다 빠진 채로 지내는 것이 아닌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제를 먼저 알려주고, 다음을 오직 거기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어떤 부잣집 아들을 보는 것 같은, 그것이 내가 된 것 같은,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서해안에서, 해가 저녁에나 겨우 눈 앞에 나타날 때에, 이렇게 예술할까, 저렇게 예술할까 하는데, 부산은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어느 한국 영화의 소녀처럼, 관객들에게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한디 하는 것인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아침마다 붉은 쇼를 보면서 지낼 수 있을까? 적어도 영주나, 대구, 원주나 홍천 같은 데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인간이, 부산이나 포항, 울산이나 경주 같은 데서 살 수 있는 것일까? 대신에 이런 것은 있을 것 같았다. 나나 주자의 글들이,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흙과 같고, 먼지와 같을지라도, 여기서의 흙은 의미가 없거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흙이고, 적어도, 적어도 정토종 할 때의 그 정도의 흙은 의미하는 것이다. 먼지라는 것도, 인연생기, 혹은 연기적인 존재를 뜻하는 말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봄바람에, 거센, 사람들의 옥토에서 먼지가 일면, 그것은 풍년이 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게 최동원 투수가 병으로 먼저 죽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이처럼 도식적인 신화가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선동열이 다만, 무등산 폭격기, 그러니까 광주 사람들이 아침에 공기가 좋으면, 동구나 북구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무등산에서 저녁에 좋은 공기가 내려와서 그렇다고 아는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를 북한산이나, 남산에서 경험한 적이 없다. 서울 사람들은, 북한산이나 남산에서, 그런 것을 느끼겠지만, 경험이나 감각은 상대적인 전쟁 같아서, 섹스, 내가 경험한 북한산은 따로 장 미쉘 자르의 옥시즌을 담아가는 공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에게는 온전히 그 산소가 경험되지 못하는 것이다. 공부를 놓치고 나면, 산소는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일용한 문제를 앞에 두고서는, 산소는 매우 중요한 것인 것이다. 광주가 나중에는 친구가 하나 없는 곳이 되었지만, 적어도 성장기에서는, 수많은 산소 같은 친구들로 가득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심장한 제 사수원지. 그리로 다니는 오솔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산소들이 그렇게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리고 내가 거기서, 그 근처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지내기도 했던 것이다. 너무 멀리 도시가 있지 않았고, 삼십 분 열심히 뛰면 도시가 나타났고, 너무 멀리 시골이 있지 않았다. 또한 한 시간 느릿하게 걸으면, 주위에 이웃이라고는 두 집 정도가 있는 곳이 나타났다. 불필요하게, 도시 사람들의, 도시 아이들의 수다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잡지를 읽고, 만화의 세계에 주화입마가 되었고, 티비를 영화처럼 보았으며, 주말 한낮에는 광주 방송에서 틀어주는 아바 음악을 듣고, 맨날 있는 자연이었지만, 언젠가는 신돌석 장군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를 여겼던 하늘이 있었던 것이다. 금세 어떤 예술가나, 화가, 교수 같은 것으로 바뀌었지만. 사람은 착하고, 훌륭하고, 세상은 힘들고, 때로는 잔인하다. 그와 같은 네 잎 클로버를, 무안 이모집을 가는 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유재하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와 같은 네 잎 클로버 같은 문장 때문이 아닌가? 그것은 음악 같고, 그것은 속삭임 같고, 그것은 진공관 같은 뇌속에서 말한 것인데, 누군가 지진파 측정기 같은 것으로써, 받아 적은 것 같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나의 예술로도 충분했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산에 가서, 경험하고 나니, 아침마다 주희를 알고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무언가 분명 장점이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저녁에 버스를 타고, 부산 시내에서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가, 영도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좋았다. 내가 부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는데, 하늘이 천우신조, 그러니까 새, 도왔는지, 템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겨울에는 바람이 추울 것이다. 그렇다고 부산이 춥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내가 놀러간 때가 또한 겨울이 아니었나 싶다. 영도에서 내리면, 해양대학교 앞, 어느 정류장,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이 바람에 휘날렸었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의 바람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고시원에는 아침밥이 공짜였고, 격납고에는, 딱 한 대 가량의 주차 공간이 건물 내에 있었는데, 차들을 바깥에 주차시키고, 거기는 그냥 창고처럼 쓰고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나의 데이스타를 주차하였었다.

 

 

인간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주자어류는 슬프고, 산소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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