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피곤해도 쓰는 글은

by 마음대로다 2020. 7. 27.

피곤해도 쓰는 글은

 

 

 

 

 

 

 

 

 

 

강력계 경찰들의 피곤과 같을까 싶다. 사랑은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강력계 형사들이 맡게 된다. 그리고 문학은 박력이 있어야 한다. 박력분 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눈이 있다는 것은 밀과 보리가 자라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지만, 발 없는 눈이 있다는 것은 오래된 비밀과 같을 것이다. 비밀이면, 그렇게 연결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비밀이 될 것이고, 오래된 비밀로써 조금 일찍 알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험은 눈이 있어야 하는데, 커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이 있게 되면, 굉장히 피곤해지게 되고, 분명한 문장이나, 확실한 영화나, 뚜렷한 성기들을 찾게 된다. 대게의 사람들은 안타까운 먼저의 무덤에서 산다. 자살도 아니고, 타살도 아니다. 피곤하고, 누워있고,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잠을 많이 자듯이, 아이들은 그러나 밝은 소망을 갖고 뛰어놀기 좋아하나, 보다 젖먹이 아이들을 보면, 누워있고, 마치 평생을 누워있을 것처럼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간은 그리로 돌아가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시험을 못보고, 집에 오는 경우에는, 그날은 친구들과 놀 수 있으나, 가까운 일요일에는, 토요일에서부터 잠을 자서, 월요일 아침까지 잘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 집이 어두워요.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시험지도, 어린아이 때는 존칭을 쓰다가, 대학이나 대학원 시험에서는 반말로 하듯이, 내내 거칠고, 당연하고, 주체사상의 힘이 세다가, 그때 쯤에는, 부드러운 우리네 고유의 대화체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그 사람의, 생명 주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더 시험을 못 보았다는 것을 크게 부각하곤 한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화적이고 액션 영화적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겨우 솟아나온 나무뿌리를 손에 쥐는지 모른다. 이렇게 뚜렷하고 당연한 인간의 모습을 두고, 우리는 영화가 모든 보편타당한 스토리를 이끄는 것처럼,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도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도 그렇다. 그 청년은 실은 결혼을 하였고, 아내가 있었으며, 그렇게 아름다운 멜기새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청년은, 공부할 때, 한 번의 배고픔도 없었고, 오히려 식사를 할 때, 지능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골라 먹고, 피로를 회복하며, 기억력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그런 반찬들을 많이 먹었던 것이다. 제사장까지 외우기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교과서를 제사장까지 모두 외울 정도면, 시험은 따로 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드라마가 자기의 반을 잘라내는 박력을 높이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은 잘난 척하는 경찰은, 새로운 시대에서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잘 뛰놀고 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경찰이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 제하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알 수 없는 시간에도 쫓기는 신세인 것이다. 다만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작가와도 싸워야 하고, 반드시 달과 육펜스, 대학과 사탄까지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살도 타살도 아닌, 깊은 어둠의 자기만의 방에서, 우리는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 것인가? 까쯔오부시가 붙어 있던 즉석 라면 뚜껑을 사진 찍어 놓고, 비닐인 것이냐, 클레임을 걸던 어떤 사람의 글처럼,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방에 들어간 아들을 두고, 한 열 번 정도 노크를 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행동일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은 어두워지고, 어머니는 사물들 사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노크를 했던, 그 소리만 가쯔오부시처럼 붙어있었다고,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아들에게 즉석 우동을 해놨다고, 나와서 먹어라고 했던 것이, 마지막 말일 수 있는 것이다. 추운 것이 아니라, 말 소리의 입김일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다만, 그와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죽음만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과 정보도 또한 우리에게 주어야 하며, 그리고 진실한 말을 우리 모두의 현재에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범인 검거 중에, 여주가, 경기도 여주, 강원도? 팔이 다쳤는데, 경찰서 가기 전에 병원부터 들르라고 했는데, 어째서 하지 않은 것이냐? 남주가 그랬는데, 여주가 필요 없는 말은 하지 마시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주가, 그것이 틀린 말이냐, 그말은 진실이었다 하였다. 그 말이 그렇게 슬펐다. 드라마가 하나의 진실도 없기 때문이다. 열 번의 눈이 떠도, 조금 몸이 무거운 사람이 있으나, 그럼에도 잘 살고, 오후 저녁에는 외눈박이 괴물의 운명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백번 눈이 떠도, 천번 눈이 떠도, 힘을 내고, 다른 사람에게 도리어 힘을 내게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두 세계의 인간이 있는 것처럼, 단 한 번의 눈이 뜬 것에도, 싸우고, 죽기까지 싸우고, 마침내 자기 자신도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눈은 말과 글과 같고, 말과 글이 진실하면,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뜬 눈을 두고도, 논리를 생각하고, 자기 자신도, 그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사람들도 생각할 수 있는 법이다. 제헌절. 칠월 십칠일. 진실은 화를 내는 것에도 있고, 화를 참는 것에도 있고, 진실은 대자대비, 그러니까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사랑과 슬픔을 갖는 것에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눈인 것이다. 그렇게 마을의 젊은 총각의 전과 사실 같은 것을 아는 주부 두 사람의 모습이 재밌고 그랬다. 그 모습은, 북한이나, 북한 체제와 비슷한 일본 사람들 같았다. 미국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미국은 원래 프라이버시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절기에 관해서는, 조금 쩔지 않을 수 없었다. 눈에 사로잡힌 작가의 상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 생각의 운명과도 같은, 대륙과 정보의 한 측면 같은 것인가?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있으면 차를 사면 되지 않는가? 차를 타고 나아가다 보면, 사탄으로 짓눌려 있던 아코디언이, 아닌 부분의 주름으로, 우리를 느닷없이 웃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하는 것처럼, 우리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돈을 노예처럼 받지도 못하고, 일만 했던 것일까? 사막을 걷는 사람처럼. 그러다가 아코디언의 끝에서처럼, 돈이 툭하고 떨어지니, 오토바이도, 저렴한 중고차도 살 수 없었던 것일까? 작가가 미국에 있을 때, 눈에 시달렸고, 사람들이 그것과 노골적으로 결합하여, 자신을 괴롭히던 때가 있어 보인다. 어머니에게는, 공부하고 싶다고 하고, 비싼 차를 구입하는 대신, 다른 공간에 있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차도 구하고, 직장도 구하고, 살았으나, 사탄 눈의 하수인이 되어서,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와 똑같이. 그래서, 그래도 차를 타고, 정신과 의사에게도 찾아갔더니, 전혀 다른 지역의, 그렇기도 어려울 텐데, 동부, 북구, 내륙, 서부 해안, 정신과 의사들 모두가, 킬 힘, 킬 뎀 올, 킬 허, 같은 말을 하는 것에 놀랐던 것 같다.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존 로크의 경험론. 그 중에 한 의사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권했던 것 같고, 그나마 양반처럼 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사탄의 눈은, 수학적인 우연이 아니라, 조직화된, 점조직과도 같은, 현상이었던 것이다. 미국은 당시 한국보다 돈이 많고, 지금도 그렇지만, 전혀 쓸데 없는 것도 많이 살 수 있는 구조였는데,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그렇게 의자나, 책상, 가구들을 직접 만들면서, 총명해지는, 그런 어떤 국책 사업 같은 것에 동조하다 보니까, 그러다가 육절기도 샀던 것처럼 보인다. 사놓고 보니, 이번 드라마처럼,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것을 구입했는지, 말을 맞추지 않으면, 자기가 영 이상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겨우 삼백 달러 밖에 없는 처지에, 어느 미국 중소도시의 외곽, 다 쓰러지는 목조 가옥의 거라지에서, 육절기를 배달하고도, 무슨 용도로 쓰려는지 묻지도 않는 판매회사 직원도 그렇고, 얼마나 슬펐겠는가? 모든 사물은 마땅한 용도가 아니면, 도무지 그것의 고고학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생노병사. 춘하추동.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재미없는 티비의 층이, 그렇게 나이와 지식, 그리고 사탄 앞에서 솔직한 육절기의 모습 같은 것일까......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들 같지 않게, 드라마에 대한, 형사에 대한 자성은 있어 보인다.

 

 

 

성경 말씀처럼, 사람이 하나님에 속하지 않으면, 사탄의 소유인 것이다. 드라마가 다른 드라마를 향해서, 육절기처럼 기능하고,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몰몬 타버나클 합창단의 슬픈 외침처럼, 종말에 이르러, 분명 생경한 현상인 것이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전의 끝은  (0) 2020.09.07
얇은 것과 사탄 돌  (0) 2020.07.30
논리적 중심성  (0) 2020.07.21
예술이 있는가? 주희가 있는가?  (0) 2020.07.16
말의 신비함을 따랐던 어린 시절  (0) 202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