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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논리적 중심성

by 마음대로다 2020. 7. 21.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또한 대학의 유민들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금 도시적 분위기에서는 많이 솔직해서, 공부 중에, 적어도 전공과목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사실은,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화성인, 외계인, 유대인, 인도인, 담당 교수님이나, 적어도 학과 조교들에게는 솔직히 말하는 편이다. 사람에게서는 방구 소리만 나올 뿐 아니라, 아주 논리하게 있어도, 논어, 음악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의자에 앉는 소리, 빈 강의실,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그와 같은 시온성에 다시 가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가방을 열고, 책을 놓는 소리, 음악이라고 하면, 가볍게,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음악을 듣는, 아주 미세한 이어폰에서 세어 나오는 소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 영자 신문사에, 에세이가 당선되었다고 하면, 그것을 불특정 다수는 아니나, 이름은 아는, 같은 스페이스, 같은 타임은 아닐지라도, 가까운, 밀접한, 그러나 공간이라고 하면, 그것은 회피의 수단인데도, 같은 수업을, 같은 교실에서 들었다고 하면, 오히려 국가의 형식도 되는 것이다. 주인과 노예인가? 주노 변증법인 것인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늘 아래서, 같은, 쟤는 나를 모르고, 나는 쟤를 아는 것이, 그렇게 인절미 투쟁, 투정 같은, 느낌은 갖게 하는 것이다. 과 대표라든지, 과 수석이라든지, 외부 장학금을 받는다든지, 그런 모든 한 계단 앞서는, 즐거운 질투의 것이 아니라, 단풍 쏟아지는, 붉은 벽돌 근대식 건물, 강의동, 누군가 견훤으로 벌써, 그의 글이 하늘을 난 것이다. 그것은 여자의 옷과 같고, 무늬와 같고, 패턴, 음향학적으로 보면 영어 같으나, 서로 싸우고, 서로 빨래하는 것 같으면, 한국어 같은, 우리 한국어로는 무늬라고 하는데, 무늬 왕릉, 또다시 이런 일반적인 진술에 앞서, 엔니오의, 엔지오의 음악이 흐르는 것이다. 패턴을 패더라고 받아주고, 우리가 무늬라고 나아가면, 그들은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가 늘 선정적이고, 동시에 맑은 공기로써, 강의실을 들어서면, 사람들의 마음은 정결함으로, 따라서, 양자물리학적으로 다림질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선구자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모든 논리학을 꿰찬 것처럼, 아무런 말들도 받아주고, 아무런 말들도 깨끗게 하며, 아무런 생각들조차 가능성을 염려해주는 것으로써,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부적응한 사람들에게서도 슬픈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조교들에게서 보고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상당히 단조롭다는 것이다. 우리가 티비에서 보는, 그런, 시트콤은, 학생들의 단조로움에 비추어 보면, 어느 깡패 집단 같다는 것이다. 공부자들은, 폭력적인 콰이어트니스를 갖지만, 부적응자들은 매우 밍맹몽한 조용함을 갖는 것이다. 절대적인 논리적 진실성 앞에서, 어느 학생도,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의 부적응성은, 그것의 슬픔은, 히브리서의 전반부에 매우 잘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공부를 잘 하고, 자기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동시에 공부도 잘한다는 것을 잘 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잘 알 뿐, 그 말투는, 내일이면 잘 모를 수 있는 사람이, 자기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양산박을, 우리가 아는 바가 없다. 대게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가 공부자였다는 사실도 영원히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낙엽의 끝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겨우 떨어진 것이나, 붙어 있는 것이나, 잡을 수 있을 뿐, 무한할 때나, 높은 곳에 있을 때나, 떨어져 바람에 휘날릴 때는, 도무지 흉내도 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기와의 지붕 끝으로 다만 그것을 따라갈 뿐인 것이다. 어떤 새의 흉내처럼. 학생들이 조용히 나올 때처럼, 슬픈 음악의 전체가 드러나는 때가 없다. 그들은 채널을 바꾸고, 그들은 마음의 리모컨을 분실하여 다시 찾고, 그들은 자기 가장 좋은 친구들과, 그것은 도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친한 친구들과 미래의 직업과, 결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태백산맥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그와 같은 양대산맥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동해에서 보자면, 미시령이 그렇게 크게 있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인 것이다. 그들은 결혼하여, 논리학을 잃게 된다. 논리학은 신의 끝과 같아서, 손의 끝, 마음의 끝과 같아서, 도리어 공부를 못했다는 사실에서, 자기들이 젊었을 때, 단풍 쏟아지는, 햇빛, 배고픈 오후, 스꼬시, 그렇게 강의동을 향하는 문왕이고, 황태자, 젊은 왕비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역행은, 박물관의 입구와도 같고, 도서관을 차를 타고 지나는, 자탄풍의 풍경과도 같다. 미술관의 입구와도 같고, 단풍 쏟아지는 곳으로 우연히 차를 타고 진입하면 만날 수 있는 것과 같다. 논리학은 시험지와 같아서, 시험을 못 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나, 자기들도 세계 전쟁에 임해서, 무수한 명제들을 써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이나, 우금치, 금성산성에서의 어떤 마음의 전쟁에서. 총탄이 맞고, 틀리고, 하는 그런 문제인 것인가? 잘 모르는 말로써의 상징이나, 현상 같은 것인가? 이렇게 홀로 글을 쓸래도, 이 정도의 휘가 나오는데, 마침 우리 오 씨 성의 극장에서 분위기와 목표가 비슷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중 세계는 요즘 만화방에서 히트를 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비슷한 주제에 열광도 하고, 때로는 실망도 한다. 공부를 잘 했다가, 못했다가 하는 것처럼. 우리가 공부를 잘하기만 해서도 안 되고, 못하기만 해서도 절대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일 것인데, 주제가 생기고, 신약성서의 아이들처럼, 그것을 이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은, 범죄가 아닌 이상, 영웅이라는 뜻 밖에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 다행히, 드라마는 범죄와 연결시켜서, 사람들과 비슷한 입구를 공유하는 것 같다. 우리들의 경복궁에 가서, 근정전에 있다가, 저녁에는 창녕전으로 가면, 그 사람은 두 세계가 있는 것이다. 비유가 마땅치 않으나, 덕수궁에도 가면, 이것은 뭐, 플레닛 트래블링, 어크로스 유니벌스가 되는 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은 사망 권세 앞에서, 집이 작아지고, 하늘이 작아지고, 육체가 쇠잔해지고, 꿈도, 소망도, 기쁨도, 마음도, 기억도, 친구도, 기쁨도, 야함도, 미술관도 점점 작아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소인국에 갔다가, 포부가 그래서, 나중에는 거인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두 세계를 그렇게 절박하게 뛰어다니고, 차원의 입구에서, 존재의 한계를 드러낼 때마다, 주인공과 다른 여자들이, 수학적으로 보면, 도리어 대단한 문학자들인 것이다. 드라마가 원래 필리핀인 것이다. 우리들은, 몸이, 그리고 눈이, 그렇게 필리핀의 주사기처럼 되어 있다. 그것을 쥐고, 보게 되면, 천선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모르고, 드라마의 망에 걸쳐, 주자를 괴롭히게 되면, 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트레인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친구의 죽음은, 아름다운 그림과 같고, 하늘과 같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대지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공부를 못하는 시간을 가로질러, 주제를 이어가는 모습이, 매우 강력했던 것이다. 마음이 너무 슬펐고, 우리의 한국 신학이 겨우 이와 같은 분식집 라면에 담기는가? 너무나도 슬펐었다. 옛날에는 국수, 온면이었겠으나, 천막의 끝에서, 소나기와 함께 온면을 먹는 사람은 얼마나 슬펐겠는가? 비 맞으면서 뭘 먹자니 그런가 보다 하고는,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하지 않았겠는가? 논리학은 상상이고, 논리학은 기억이다. 논리학은 경험이고, 논리학은 씨츄에이션이다. 그래서 티비를 많이 보고, 드라마만 보다 보면, 처음에는 논리학이 강해지나, 나중에는 약해지는 것이, 미국은 이제는 비교 대상도 될 수 없는데, 엔니오의, 엔지오의 슬픈 피리 소리를 더 이상, 자기의 숱한 인과 속에서는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가 소설 속의 만남 장면을, 식당 장면을, 뭘 먹던 것들을 좋아했지 않았는가? 퇴근하면서, 옛날 라면 하나를, 고춧가루가 귀해서, 표지까지도 흰 색 비슷하던 것을 사 와서, 곤로에다 하나 끓여먹다 보면, 티비나, 소설에, 그런 장면만 나와도 자기와 논리학이 비슷해서 좋았던 것이다. 그러니 국문학이 발달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러니, 근근이 목숨만은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학이라고 하는, 가공할 만한 전투기가, 글을 쓰고, 읽는, 한갓된 경험의 표현에, 들어오고, 격납고, 나가는 것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철분이 되고, 자기가 슬픔과 절망에 차갑게 되면,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

 

 

또 주인공은 논리학 책을 구입하지 못했다. 이것도 주제면 주제고, 소재면 소재일 것이다.....

 

 

지금과 같은 바이러스 시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학 교수님이 낯가림이 심해서, 각종 핑계로써, 아이들과 비대면 수업을 하였는데, 시월애의 내용처럼, 쪽지를 강의실 책상 위에 놓으면, 학생들이 그것을 읽고, 함께 토론하고, 그 내용을 적어, 책상 위에 놓는 것이다. 교수님이라도 일단, 몇 명이라도 만나려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잠시 자기들이 조는 순간에 다녀간 것인지, 종이만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벅차다. 그것은 공부 때문이기도 하고, 존재론 때문이기도 하다. 돈이라는 것은 겨우 존재론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되어준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쪽지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얼굴은 대충, 강의동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꼭 수업에 관한 것은, 수업이 사라질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전파가 잘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학생이 쪽지에, 자기는 복학생이고, 집에 돈이 하나도 없고, 책값은 비싸고, 더구나 학기 중에 복학했기 때문에, 책들을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고 썼다. 그리고 자기 형이, 지금은 취직했는데, 방에 있는 책상에서 보니 논리학 비슷한 책이 있는 것 같다고 하고, 그것을 봐도 되겠느냐고 했다.

 

......

 

그러라고 했다. 

 

 

몇 개월 후

 

드라마의 내용처럼, 조금 다른 형식으로,

어느 날 강의동이 통째로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학생과 교수 간에

무슨 내용의 쪽지가 오간 것인지는,

 

그래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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