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것과 사탄 돌
우리가 돌스 하우스라는 제목을 알고, 유식한, 아름다운, 섬, 꽃 중에 꽃, 인문학, 무궁화 꽃, 다만 외국 문학만 알아도, 그것은 우리 문학을 무시하고, 우리들의 시각적인 방금 꽃을 무시하고, 외국 것을 신봉하거나, 따르거나, 맹신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다만 미팅 자리에서 아는 척만 해도, 데이트에서 아는 척만 해도, 실은 만나지 못했지만, 어쩌면 무수한 문예 비평이라는 것은 이성이 내게 하는 아름다운 천상지희의 언변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서울에서, 과천에서, 버스를 타고 지나다가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자기 조형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나나를 먹을 때, 굉장히 빠른 속도로, 존재와 인식의 전봇대로, 그러다가 돌이라는 미국 상원 의원이 있었을 것이다. 기억은 숫자와 같다. 그때는, 라떼는, 미국의 정치인들이 다들 그런 줄 알았다. 생긴 것도 벌써 잊어먹었다. 다만 미래적인 청년이나 소년이래서 그것을 알고, 얼굴 모양이나, 절망적이 장년이래서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는 약간 지나치게 자기 주도적인 한국인인 것도 같다. 한국에서도, 지식의 가지가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딱딱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드물텐데. 아무튼, 나는 광주에서 올라온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서석대에서 내려온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광주의 북구나 동구 사람들은, 아침 공기가 유난히 좋으면, 밤 사이, 좋은 공기가 내려와 있구나 한다고. 우리가 그와 같은 얇은 사진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소년이 꽃 중의 꽃, 인문학 꽃을 피우고, 자기가 넘쳐, 일본의 찢어지게 가난한 모순을 발견하고, 중국의 무한한 가난을 바라보고, 눈물 흘리고, 밤낮없이 중국 때문에 눈물 흘리고, 비어 있는 유령 도시적인 운명을 잘 극복하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광주 현정이와 함께 보았던 성룡 주연의 무슨 미라클이라는 영화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얇아졌다. 기억하고, 돌처럼 만지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광고 사진 같고, 핀업 사진 같고, 그것도 낡은 것 같고, 빛바랜 것 같고, 겨울에도 드러난 비키니 콜라 광고 같고, 그런 것이 좋은가? 그 모든 것을 돌처럼 책임지고, 환영하고, 선명한 것을 선물하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자기가 그나마 선명하고, 자기가 걸었던 거리가 선명하고, 아무 것도 아닌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었던, 거기서도 김밥에 라면, 여기서도 김밥에 라면, 그런 것들이 선명하고, 중복되어, 다시금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그렇다면 어떤 것인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묻고, 대답 없음을 두고는 함께 기도하자. 내가 논어를 지날 때, 광주에서, 광주 계림동 학교에서, 저기 무등산 전망대 아래 시골집으로 갈 때에, 논뚝 사이를 어떤 이가 그렇게 부드러운 나무다리로써 편의를 보였던 적이 있다. 항상 학용품이 없었고, 부족했고, 항상 부족하지 않았고, 항상 내가 그냥 기억에서 놓고 와서 그것이 부재했고, 학용품의 부재가 늘 언제나, 기억의 부재, 시험력의 부재로써 상징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었다. 일본이 반짝이고, 일본의 팬시가 좋았던 것은, 그들이 일제와 단절하고, 이차대전의 패배에서는 모르쇠가 되어서, 팬시로써, 아름다운 초등학생의 존재로서, 나처럼 나아가는 것에 있어서, 보다 세련되고, 먼저 시간 같고, 디자인이 훌륭하고, 그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과학과, 사회, 문화와, 예술, 그런 것들의 가리키는 상징이 되는 것을 내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적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와 같은 백과사전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해태 타이거즈가 코리언시리즈의 연승을 달릴 수 있었던 것도, 나의 학교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존재가 무서운 것이다. 존재가 증명됨으로써, 일본은 사탄으로부터 드디어 벗어나는 상처를 입을 수 있었고, 그것의 모순, 중국은 마음껏 경제를 지금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한신대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 국문학과를 가지도 않았다. 내가 교회에서 만날 때는, 그렇게 홍콩 배우 같았고, 티비에서 보던 가족 오락관 같았고, 폭소대작전 같았는데, 그들은 철학과를 가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에게 급하고, 시급하던, 국문학과를 가지 않았던 것이다. 신학대학교를 가지 않았고, 결국 내가 가는 곳에 함께 가는 패키지 인생으로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 안에서,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무슨 공부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대신에, 다음의 지역으로,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때, 그 사람이 학교에서 그런 마음으로, 노력으로, 관심으로 시간을 보냈구나, 조금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학교의 영혼을 만나고 있었다. 소설의 영혼. 솔거의 슬픈 새들처럼. 시들의 영혼. 그렇게 누군가 불을 피우다가, 조로아스터 교, 죽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의를 입고, 그 사람의 우비를 입고, 그 사람의 성의를 돌보는 사람이, 겨우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성경을 읽고, 항상 붉은 벽돌의 숫자를 세고, 내게도 그만한 학교가 생기는지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것의 증거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었다. 하루하루가 슬프고, 하루하루가 소년이, 그리고 소녀가 해볼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논뚝 길에 누군가 놓은 나무다리처럼, 판데믹, 그것을 건너는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시급함을 몰랐다. 철학과를 가고, 그 사람의 문장의 현재를 알아보고는, 잠깐의 문학적 지식에, 국문학적 사랑과 지식에, 미래적인 가능성을 알아보고는,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인디언 스카우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현재를 우리는 알아볼 수가 없다. 만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국문학자들에게는, 국문학적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과에서, 영문학과에서, 자기 공부에도 충실하나, 그 사람의 문장적 현재가, 김현처럼, 국문학적 사랑에 넘친다고 하면, 영문학과 대학원이 입학을 거절하면, 조심스레 접선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못한 것은, 우리가 태초부터 단 한 번도 대학에 입학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기관들은 대학원이 없고, 플라톤에게서 처음 대학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얇은 그림이기보다는, 얕은 지식이 사람들에게 무슨 이득이 될 것인가 싶다. 대학원까지, 오직 거기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연애도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는 책상 옆에서 소리 나지 않게 하고, 섹스도 이불을 덮어쓰고는, 하고, 샤워하고, 다른 연구실로 헤어지고, 다시금 공부를 시켜도, 성경의 뜻을, 그의 데카르트적인 대수 기하학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영혼, 오직 학교의 영혼으로만 진행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둘러싸는 것은, 시간적이고 양적인 악만이 아니라, 실제의 사탄들이 수많은 영화적인 권력과 그들의 경찰권적인 행정적인 하수인을 데리고 괴롭히는 것들인 것이다. 어째서 그와 같은 이분법이 생겼는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세계에 학교가 얼마나 많은가? 성경 어딘가에 그런 말이 있다. 학교가 많다, 학교가 많이 있다 하지 마라. 학교는 오직 주자에게만 있느니라. 마치 신체가 없는 것처럼, 그들은 영혼이 일부분 부족한 것이다. 그것을 감지하지만, 사람들은 드라마적인 연장을, 르네 드라마티안적인 익스텐젼을 너무나 좋아하고, 빠지고, 사랑하고, 넷플릭스, 미국 공포 영화와 나란한 것이 되었는 것이다. 그것의 노골적인 조작에 힘이 없고, 자기들의 학교 생활에 소명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감지하기는 한다. 갑자기 버스에까지 물이 차오르고, 자기의 인문학적인 흙이 하찮은 대접을 받는 것이다. 그것의 슬픔을 어떠한 슬픈 프랑스 음악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자기는 사진 찍기 좋아하나, 친구들, 그런데 학교는 사진 찍기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학교는 일찌감치 시커먼 전면이 되어서, 오직 사탄의 말만 하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되었다. 그런 핑계로써, 그런 것만 있지 않는 학교를 학교를 다니면서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능력인데, 어쩌면 세계적인 마술사보다 그것의 포장과 사라짐의 능력이 대단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결혼해야 하고, 직장도 구해야 한다. 학문만 할 수 없다. 그래서, 중국과 같은, 르네 드라마티안 익스텐젼에 서둘러 적응해가나, 사탄은 존재가 늘 얇은 것들인 것이다. 존재가 돌일 수 있고, 하나님이 야훼일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얇은데, 홍어 삼합 같은 것일 수 있다. 잔치한 것 같고, 굉장히 만족스럽고, 그것까지 먹으면, 그러나 암모니아가 나오는 것이다. 드라마가 있고, 홍어 삼합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암모니아가 나오고, 마치 콜라를 마신 것처럼, 콧구멍이 커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문예비평과도 같은 풍성한 이야기를, 충분히 가능하다고, 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째서 사랑이란, 문예비평이다 했는지 모른다. 시나, 소설, 그것의 우연적 결합의 필름적인, 방송 권력적인 현상이 드라마일 것인데, 이야기의 처음이 없고,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면, 사탄도 있었을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잔존물만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다. 사랑을 드라마에서 찾는 것도 그처럼 의미가 있지만, 그렇게 문학과를 다니면, 문학 본문 뿐 아니라, 그 배 이상으로 읽는 문예비평을, 같은 공부하는 이성에게서 듣지 못한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마치 결혼은 하고, 섹스는 하되, 많이 하되, 애는 낳지 않겠다는 순결 선언과 같은 것인 것이다. 애들이 숫자에 불과한 단계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폭탄과 같은 비전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얇은 지식들을 만나고, 얇은, 조잡한, 어린아이에게는 영웅적이고, 과정이 어렵고, 다만 우리들의 신체가 얇고 걱정이 많아서, 따라서 의식도 단순하고, 즉흥적인 것을 피할 수 없다지만, 종이가 얇고, 학교가 존재를 배출하는 곳이니, 우리가 그러하다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우리가 그들을 닮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권력이라는 돌이 되어서, 자기가 자기에게 그와 같은 신체의식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얇은 간첩 같은 조작에 열을 올리게 되고, 어차피 인간 의식의 멍청한 돌과 같은 진실이다 보니, 하나의 돌을 만들어서, 고전이라고 하고, 전통이라고 하고, 피라미드라고 하고, 북한과 같은, 지배의 안정감을 사람들에게 선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에 대학이 많고, 사랑의 문예비평이 많을 것 같아도, 사탄과 북한의 현재적인 목표를, 열 단계를 지나는, 객차, 열차의 통로로써 간파하게 되면, 우리들의 시에도 이르지 못하는 정신력이라는 사실을 따라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돌과 같고, 다만 얇고, 다만 한 시간 정도의 사물적인 기억력만 있을 뿐인 것이다. 인류는 단 한 번도 학교에 간 적이 없다는 것은, 미국이 그 증거가 되는 것이다. 대충, 그러나 끊임없이 대학의 서열을 갖고, 코스모 폴리탄들을 운영해서, 대통령도 만들고, 그러니까 선거가 아닌 것이다, 이상한 뚱뚱한 선거인단, 르윈스키 같은, 상하의원들을 구성한다고 해도, 그들은 영화적인 투표에 늘 시달리게 되고, 자기들의 존재의 근거가 없다 보니, 한국의 주자를 괴롭히는 의도나 아이템은 차마 고백할 수가 없고, 어린아이들이 주차목마를 타는 것 같은, 기억력 상실의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대학들의 기억이, 벽돌이, 모래처럼 갈아져서, 라스 베거스에 가서, 총격전이나, 피비린내, 케츠, 경찰, 조금도 단위시간적인 부끄러움이 없는 피스톤적인 기억이 신문과 방송의 전부인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몰몬경처럼, 얇고 동시에 돌과 같은, 돌 상원의원, 누군가 바나나를 원한다 음향 효과를 넣으면, 거기서, 비존재에서, 얇고 동시에 돌과 같은 사막의 모래들이, 새로운 성경을 만들어내지 않겠느냐고. 사람은, 성경으로의, 죽음 존재이니. 이만하면 잘 산 것이 아니겠느냐고. 사람이 아파서 누워있는데, 대게의 능력 없는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치료받고, 수술도 받고, 병원 음식도 맛있게 먹고는, 마치 운명처럼, 다시금 학교에 간다. 학교에 갈 수 없어도, 계속 공부하고, 하울의 움직이는 헤겔의 시온성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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