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우리 음악 드라마에 관한

by 마음대로다 2020. 9. 10.

우리 음악 드라마에 관한

떠블유비씨 챔피언의 의무 방어전

 

 

 

 

 

 

 

 

 

바로 이런 말, 은어가 살아 숨 쉬면서, 삶의 화초장까지 순식간에 오르는 말 같은 것을 우리가, 버리지 않고, 도리어 좋다 여기는 미감은 확실히 최신의 것이고, 죽지 못한 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뜻밖의 결혼이, 피아노가 아닐까 한다. 한국 사람이 한국 땅에서, 지나치게 사물놀이 하지 않고, 적당히 어깨춤을 추고, 그러나 모든 범주에 걸쳐, 믿음과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지지 않고, 말할 수 있기만 한 것인데, 어째서, 피아노까지 선물로 받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피아노는 피아노고, 쇼팽은 쇼팽, 어딘지 모르게, 배고프게, 공기만 많이 먹었다는 라흐마니노프, 드뷔시, 모차르트, 글은 글이고, 키보드는 키보드가 아닌가? 우리는 자유가 없이, 피아노를 치다가, 치다가, 눈물을 흘리고, 그와 같은 둔탁한 자연음이 피아노와 어떠한 차이를 갖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죽을 수도 있고, 아무 말이나,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예언이나 하면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환영을 받는 말을 하면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사망의 권세는 사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통찰에서도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서, 나름대로 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은, 적진의 제일 큰 장수를 부르는 말일 수 있고, 사랑방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는 제일 머슴을 부르는 말일 수 있는 것이다. 통찰이 없는데, 무슨 사탄이 있고, 통찰이 없는데, 무슨 전쟁이 있겠는가? 우리가 육이오가 없고, 일제 강점기가 없다 말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인 것이다. 사람들이 오랜만에 피아노 음악을 김에다 먹으면서 좋아하는 이유는, 드라마가 처음으로, 그것의 기계 장치 때문에 낯설게 하기 되어서일 것이다. 배경 음악으로는 많았고, 비지엠, 그러니까 두부 비지국을 먹다 나오면서, 작은 텃밭에서 뱀이 지나가는 것으로는 많았다. 그것이 아니고는 도무지 정의가 없는데, 그와 같은 제한적이고, 시간적인 한국적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피아노를 말하는 이유는, 피아노는 세상 모든 사탄의 지배와 통치 속에서도, 묘하게, 그 큰 장치와 홀을 가지고서도, 참으로 묘하게, 자유하는 한국 사람 같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연주하면, 일본인의 색감이 들어간다. 사람들이 히샤이시 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무식하게 한국 사람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절차탁마대기만성 하는, 그런 기승전결을 죽음에 이를 때까지 믿는 사람 같기 때문이다. 홀은, 홀로서기. 그 모든 것들이 패배의 시간이나 공식, 남은 시간을 가리키는 데 있어, 분명 누군가는, 서양의 하늘과도 겨루어, 우리들의 형상을, 그것이 여기서 새롭게 사탄의 조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분명 밥 먹고, 싸먹고, 학교 가고, 소풍 가고, 공부하고, 영어 공부하고, 그랬던 시절의 언덕, 그런 때를 우리가 알고 있으니까, 그리로까지 닿아있는 자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어째서 아브라함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삭이 없겠는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구속하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도 있고, 사탄의 조종도 있고, 사탄의 의지도 있는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도 자기이고, 이삭도 자기이면, 그것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시인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 문학이 있고, 천편일률적으로, 결혼하고, 그와 같기만 한 예술이 있다. 내가 사망을 부르고, 사탄을 언급하기만 해도, 피아노는 태초의 불협화음을 과시한다. 순서가 없는 것 같고, 밑장 빼기도 없이, 막무가내로 언급하는 것 같지만, 또한 자세히 보면, 미세한 삼단논법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드라마에서, 계속 음악 드라마가, 브람스도 좋아했다가, 모차르트, 베토벤, 바하, 쇼팽, 그렇게 나왔으면 하겠으나, 사람들이 서양의 연주자나, 그들 서양의 일렉트리시티만 추종을 하니, 그와 같은 권력과 권위 앞에서, 아무런 자유의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사탄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다. 우리가 히샤이시 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인의 아름다운 성적인 자유와 연합하여, 정신까지도 파블로 피카소처럼 리버럴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 때문인 것이다. 그것의 도구적이며, 표면적, 그리고 패턴적인 진행이 내가 보았던 드라마의 세 번째 편에는 잘 표현되었었다. 그의 마지막 포옹의 템포가 좋았던 것이다. 컨테이너 항구에서 일할 때, 사람들의, 캐빈들의 해치커버를 열고 덮는, 열었다가 덮는 템포가 매우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커버의 모습은 모두 다르고, 섬세한 형태도 항상 다르지만, 원리는 같고, 그것이 포옹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홀드라가 불리는, 선박 내부에 콘테이너가 모두 쌓이면, 해치커버를 닫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해치커버 한 번 닫지 않고 사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템포가 나쁘고, 육체가, 사놓고 오래된, 방치되어 있는 대파와 같을 수 있는 것이다. 항구에서 캐빈들은, 금세 닫는다. 그리고 뜻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항상 서양이나 미국 사람들의 캐치 프레이즈가, 우리들이 우리들의 포옹을 하는데도 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갖는 것은 겨우 성적인 해방, 해방 신학 같은 표현뿐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서로 마음으로 사랑하고, 기회를 봤다가, 덮치고, 포옹하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아니스트는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그런 것은 잘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처음 어필하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사탄의 전자기 반응 속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바로 그와 같은 처음 포옹의 장면이, 해치커버를 잘 덮는 시간처럼, 드라마 상에서, 방송국 속에서, 피디와 제작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잘 연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은, 속내를 콘테이너로 다 채우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갑자기 급랭하여 사람들이 놀랄지라도, 해치커버를 닫지 않고, 그런 것도 없이, 그와 같은 상태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일 것이다.

 

그 모습은 비참이며, 우울이다.

 

 

일본인들이 동경을 가리켜, 한국 사람들이 동경이라고, 잘 조율된 피아노 소리의 한 음처럼 발음하는 것을 두고, 얼마나 해치커버가 열렸겠는가? 그것은 두껍고, 어려워서, 크레인이 아니고서는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의 터널에 들어간, 테트라 뭐라는 것처럼, 그것이 장비가 없이도 열리는 순간이 분명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마무라 구다사이.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동경. 동? 경? 혼또까? 혼또데스까? 혼또데쓰. 그렇다는 말인 것이다.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은, 영단어를 못하는 것은, 그것이 자국의 언어와 배치가 되어서,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정적이고, 느끼하며, 사탄적인 것은 기억에서도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긍정적이며, 훌륭하고, 다윗의 시들까지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왔는데, 그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도, 사탄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시내를 자주 가지 못하는 것도, 신학대학교를 자주 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무의식이 그처럼, 거대한 지하저수창고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경험한 적이 없고, 공부를 해서, 자기가 자동차처럼 공부의 도로를, 자기가 공부를 해서 멋진 자동차처럼, 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가 점심을 조금 색다른 것으로 먹는 노력만큼만 관심을 기울이면, 그것이 못내 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했던 시는 무엇이고, 소설, 신학 논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탄에 어프로치된 것인가? 목표와 깃발에 어프로치된다는 것은, 사탄에 어프로치되는 것이니까. 우리는 피아니스트들이 단 한 번도, 그들이 그들의 장기를 살려서, 키보드를 눌러서, 글을 그처럼 멋진 감동으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니스트가 알바트로스요, 현대 제네시스의 아름다운 문장처럼, 홀인원이기 때문이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홀인원들은, 그들만의 리그이고, 홀인원들인 것이다. 국문학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국어학자, 한국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것이다. 그들 중에 저녁에 교회 예배를 다녀오는 사람이 있다면, 기가 막힌 타자가 되는 것이다. 투수의 형식적인 제자요, 친구인. 하나는 홀에 넘치는 인원들이고, 젊은 시절의 에너지를 올인한 것의 결과, 그리고 다윗의 시를 읽고, 그에 관한 말씀을 듣는, 보다 중요한 것 같은 축복, 처음에는 다녀오는 풍경 같았으나, 나중에는 배트처럼 단단해지고, 눈에 뻔한 것이 되며, 한국과 베트남의 사이 같아지는 것이다. 사탄이 눈에 선해지고, 그들이 풍경에 보이지 않게 이중 풍경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사탄에 빠진다. 의식이 돌아와서도,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은 없는 법이다. 사탄은 의식이 돌아와서도, 아들을 죽이려는, 처음에는 아름다운 사물이요, 나중에는 서로 잡아먹는 비쩍 마른 소들인 것이다. 배트가 부러질 수 있다. 프로야구 선수처럼 여러 개가 있다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는 목사들조차 사탄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사람들은 결혼하고, 해치커버가 덮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그것을 보여주고, 성공을 응원하고, 우리들도 그렇다고 믿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적당한 도덕성에 오르고, 사탄의 히키코모리적인 결말에 더 이상 관심이 없고, 일종의 양산박적인 신드롬처럼, 훌륭한 학생들의 문장을, 교수들이 실은 그 정도의 의식 밖에 되지 않아서, 사람들과 힘을 합쳐 무시하다가 보면은, 항상 드라마의 장횡거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의 장횡거라는 것은, 해치커버가 닫히지 않고, 콘테이너끼리 결속하지도 않고, 육지와 바다를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그와 같은 우울과 비참은 정말, 리얼리즘일 수도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을 좋아하지 않는가? 너무 생활적이고, 너무 표면적이며, 너무 기호적인 것을 싫어하지 않는가? 리얼리즘은, 주어진 것과 자기의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투쟁 같은 것일 수 있다. 코스모 폴리탄들은 그 모든 음악들을 모두 알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도리어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속으로 흐물흐물 따라 하다가, 저녁에는 숙제와 논문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스모 폴리탄들도 아니고, 아직 홀인원도 이루지 못한 음악 학생들은 어떻다는 것인가? 그들의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돈은 돈대로, 모두 쓰고, 학자금, 생활비, 악기, 가족과 싸움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싸우고, 그래서 반지의 제왕에서 싸우론, 한 마디도 시를 쓰지 못한다고 하면, 그들이 불고, 그들이 켜고, 순식간에 누르고 했던 음표들이 대체 무엇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인가? 또다시 서양인들의 연주자와 작곡가, 그들의 일렉트리시티인 것인가? 사람들은 막다른 길에 이르러, 그럼에도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것을 연습했던 사람들이 클래식 연주자들일 텐데, 그것이 그래서 그렇게 아이러니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것이다. 그것은 전문 드라마 작가나, 피디, 그런 것들에게 음악 영화를 맡기지 말고,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음악가들이 음악과 내부에 영화 제작 분야를 만들어서, 끊임없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들의 박찬욱 감독을 보라. 처음은 창대했으나, 지금은 테넷, 존네 미미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박찬욱 감독이 그와 같은 드라마 내외적인 변천의 나쁜 길을 스스로 선보인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나와는 다른 말을 하고, 나와는 다른 순발력을 가지며, 그러니까 어떤 생명의 촉진, 그러나 되돌아가는 아이들의 정경, 나와 같은 한국어 공간에서의, 결국에는 그와 같은 분단의 거대한 골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시급한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고백하기라는 것은 좀체 어려운 일인 것이다.

 

 

처음에는 무국어적인 허영으로 출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여든까지 가며, 사람들은 여든까지 살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범주에서도 사탄들을 무찌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와 같은 아라랏산의 아브라함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기를 말할 때마다, 주자는, 어째서 서양은 고등 철학이나 문학, 예술이 가능하고, 사르트르, 우리는 티비나 건강할 뿐, 전혀 왕래가 없고, 범주에서 썩은 내를 풍겨야 진학하며, 강사지도권을 지니는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이 자기를 내비치면 내비칠수록에, 전기는 우리들 내면의 것이 되고, 우리들의 피라미드이며, 우리들의 저녁 그림자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해를 보고자 하였으나, 실은, 해가 지는 저녁 그림자가 높고, 직선이며, 하늘을 향해 반듯하자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것을 속기사의 피아노로 치면, 더욱 그러해서, 마음이 어둠 속에서도 오랠 수 있고, 흰 색을 보관하여, 집중하여 밝히면, 저녁에는 야독 친구를 새로이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늘 긴장하며 확인할 것은, 우리들의 높은 수준이, 사탄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탄에게도 문자가 있기는 있으나, 마치 현상학처럼, 의식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들을 따르고 좋아할 것이라고 믿는, 동상이몽, 그래서 그들의 것은 쐐기처럼 생겼고, 그것으로 항상 피가 나와서, 스스로 시작하여 끝을 맺는, 인디펜던스 데이, 그런 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사탄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들의 단조  (0) 2020.10.03
흥미로운 소설의 세계: 바디소리, 이원규  (0) 2020.09.23
도전의 끝은  (0) 2020.09.07
얇은 것과 사탄 돌  (0) 2020.07.30
피곤해도 쓰는 글은  (0) 2020.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