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은, 헤겔의 대명사, 하나의 독재인가? 연합의 현재 혹은 기억인가? 서울에서......
우리는 꿈에서, 연합군이 독일군을 물리치는 것을 많이 겪었다. 그것은 아무런 양도 없다. 질도 없다.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맹목적인 인종 청소가 아니면, 저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문화적 코드의 우월성, 참 민주주의성 같은 것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발단이 미스테리한 전 세계적인 비극의 염을 추스릴 수가 있는 것이다. 미국은, 그리고 미국 영화는 그와 같은 찬란한 시기를 겪었다. 예술 귀족주의를 대항해서, 아마데우스, 영화를 사랑하는 민중의 저편을, 마치 여행자의 땅콩 버터 샌드위치처럼 담아내고자 했다. 다만 작은 소재를 갖고도 우리는 쉽게 마법에 걸리는데, 그 희고, 환하고, 명랑하며, 저 멀리의 백호주의를 백호의 본토 사람들이 개인화 개별화 논리화 세계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비판할 것 같은 제스쳐는, 사미인곡 중에 사미인곡이며, 속미인곡 중에 속미인곡이었다. 그것의 영향은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고, 객관적인 지표가 증명해야 하는데, 증명되게 되어 있는데,
오 마이 갓. 예술 귀족주의인 것이다......
객관적인 지표를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겠는가? 모든 군복은 아름답다. 어쩔 수 없다. 미군복은, 김미더 초콜릿 하는 것의 행복한 부요이다. 나는 군시절에 한번 다리미를 잡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부요하였다. 직선의 퍼센트는 하늘을 치솟아 있었다. 깨끗하면 충분하였다. 선임이 한번 다려주면 고마웠다. 전투화 끈을 묶으면, 지금 입고 있는 옷처럼, 나는 스트라이프해졌다. 미군복의 약간 느슨한, 충분히 반듯한, 엣썰, 복명복창에다, 원투쓰리포 구보시의 합창 같은 것은 분명 군인의 것이다. 전투기도 최강이고, 그것은 사람의 외화인가 아니면, 문명의 표현인가? 탱크도 가장 크고, 최강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항공모함은 아직도, 한국 문학이 자국에서 출범을 해서, 무슨 안좋은 로비가 들어간 것의 단초가 아니면, 영원히 언급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래서 김진명이네, 하는 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책은, 선명하지 않다. 문장들로 상대성을 만들면, 독자들이 시커멓게 들어가는 것이다. 만화가 대단한 것이, 몇몇 작가에 의해서 표현의 자유적 담력 테스트 플러스 나름 인과가 있는 스토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차갑고, 뭔 말인지 잘 모르는 공안부실, 지하실, 그것의 습기와 남의 나라 자지 같은 모종의 전화 통화만이 대사의 절대치를 확보한다. 우리가 그것의 있다 없다를 단번에 말할 수 없듯이, 전투기가 등장하는 만화를 막을 수도 없고, 특별하게 생각을 보탤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발칸포와 같다. 발칸포. 발칸포. 백번을 되뇌이면, 그것이 한국말인 줄 알 것이다. 서태지가 발해의 꿈을 부르면, 우리에게 발칸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그와 같은 우스움은, 그러나, 우리가, 무지막지한 무기들을 두고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에 원죄와 방정식이 있다. 나는 군대에서 휴가를 나갈 때도 다리미질이 단순하였다. 후임병이 할 때가 되면, 그만큼 내가 선임이 되었다는 것인데, 고맙다고 웃으면서 부탁하였다. 아주 잘 해주었다. 그는 내게 다리미질을 별로 안하십니까? 했고, 나는 마치 모든 문법의 주인공처럼, 이 넘치는 양명학,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했다. 독일군복은 매우 스트라이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게슈타포, 더블 단추의 롱코트와, 트랜치 롱코트를 아직까지 우리는 입고 있다. 복식의 철학으로 자연적으로 넘어와서, 칼라일을 읽기 없기, 우리는 단 한 마디도 꼼짝할 수가 없다. 그만큼 두 국가의, 한 국가는 범죄 국가가 분명한, 그러나 복식 만큼은 구분이 다만 범주적으로나 뚜렷하다. 트랜치 롱코트를 입으면, 우리는 클래식해지는 것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사망 권세 아래서, 무한하게 서글프다. 더구나 오늘 내가 덧붙였지 않은가? 우리는 잠결에도, 연합군이 독일군을 물리치는 꿈을 꾸면서 자랐다고 말이다.
광주에서 이십구번, 이십삼번, 일번 국도를 타고 올라올 때, 그것의 양적인 토대 위에서, 서울에서 몇 개의 장면들을 보았을 때, 나는 매우 강력한 정신현상학을 경험했다. 정신현상학이 하나인 것은, 그 말을 대체, 어째서 헤겔만이 있는가? 그것의 독점성은, 수많은 카메라성과도 비슷하다. 비유로 하자면, 누구도 훔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전의 철학자도, 이후의 철학자도, 조금도 비슷하게 이름 짓지 못했다. 장 이뽈리트가,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인, 그것을 그냥 해석했다고 해서, 정신현상학 해석인가 하는 책을 썼다. 정신투철학. 정신완전학. 일신우일신정신학. 도저히 따라 붙을 수 없다. 그러나, 이름만 그렇게 거창군 하느냐? 안 그렇다. 공교롭게도. 비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현상학이 무한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추월산을 지나는데, 추웠다....... 정읍에서, 딸기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었다.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내가 나의 유능한 오토바이를 타고, 속도가 어정쩡한 트럭을 지나는데, 저 멀리에서 승용차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내가 부적절한 곳에서 추월을 한다고, 손짓으로 욕을 했다. 그것은 정말 프랑스의 사이코 드라마 같았다. 점심 즈음으로 천안을 지났는데, 점심으로 호두과자를 먹기가 그랬다. 그러면 철학적 소설, 혹은 영화의 대사는 그와 같은 다음의 웃음과 대사를 붙이지 않겠는가? 호두과자 한 봉지가 점심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많이 먹으면 되지 않겠느냐? 가게가 가게가 백 개는 있는 것 같았다. 천안에는 호두과자로 이뤄진 하늘이 있는 것 같았다. 웃음은. 경험의 좁은 밀도 안으로 진행하는 씨비육백에프 같은 것. 그래도 천안 끝날 즈음에 햄버거를 먹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나니, 배고픔으로 달리던 것이 차선 변경 되었다. 어느새 유산자 계급이 되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흥분 같은 것이 자제되었다. 이 모든 것이 경험의 실제이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 가수처럼 생긴 미군이 햄버거 심부름을 온 모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비좁게 있었는데, 영어로, 위히어훼어이스투타이트 하려다가, 외국인 공경 사상이 펼쳐졌고, 사람들도 나와 같았다. 햄버거가 나왔고, 포리너를 부르는데, 나도 웃어주었고, 사람들도 깎듯하였다. 다메색 도상의 영원한 바울처럼 시력을 회복한 뒤에,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를 하는데, 드디어 평택이나 오산 등지가 나왔다. 클러치가 잘 안들어갔다. 처음에는 벅벅거렸다. 그러나 그런 일을 자주 당하고 나자, 나는 그런 물자체의 신비를 나의 상식과 의지, 최소한의 이성적 케이블로써 해결하였고, 뒤에 따라붙은 멀쩡한 트럭이 백미러로 보는데, 시동이 꺼지는 사태를 직면하였다.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고, 그 운전자에게 미안하였다. 속도는 신비한 것이다. 그가 멈춰 있는 것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이, 클래식 사진이 찍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기술적인 인격적인 쑥스러움은, 민밋하고 단순한 인간의 대지를 친숙하게 만든다.
나는 서울에 와서, 에프엑스의 일렉트릭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다. 광주에서도 쓸 수 있었는데, 서울 여행의 계획이 들어왔고, 장소 지상주의자인 나로서는 그것은 서울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초에서 친구를 만났고, 너무나 아름다운 숭실대학교 언덕을 지나보았으며, 아름답다는 기준이 새롭게 제시되어야 하겠지만, 올라갈 때, 핼멧 속의 반응이, 오오오....., 내려갈 때 반응도, 오오오오....... 이렇게 말하고보니, 청룡열차보다 재밌게 느껴진다. 여의도 공원에서 쉬었다. 나는 사진찍으면서 울었다. 사진이 안찍혔다. 그리고 천국의 풍경을 지나, 마포대교를 진입하는데, 저녁에 보는 두 건물의 분열이 완전 정신분석학 같았다. 정신현상학을 해보지 못해서, 정신분석학이 따라 붙은 것인가? 관련이 없대도, 그럴 수는 있겠다 할 것이다. 직선의, 군대 시절에 내 안에서 부쩍 경험적으로 그려졌던 직선을 거기서 보았다. 나는 주변을 훈령하였고, 일정한 속도를 바라보았다. 거의 모든 대교에서 승리하고 있었고, 나는 무탈하게 마포에 도착하였다. 나는 거기서, 공부 열심히 하느냐? 하고 있느냐 외쳤다. 에프엑스의 일렉트릭 샥도 재밌었고, 러닝맨에서의 좀비 편도 재밌었다. 송지효의 향수 냄새가 난다는 장면에서는, 그것의 문학적 실재를 두고 공안부실에서 그들을 모두 초빙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의 의지는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우리의 정신의 형식은 세 개를 나열하고, 그 중에 제일은 무엇이다는 문장에 의지할 때가 많다. 나는 좀비 편이 러닝맨의 모든 것 중에 제일이다고 생각한다. 제이티비씨의 해피엔딩도 보았다. 그 단어들의 성층권에서도, 마음이 극단적으로 울적하였다. 그것은 연합의 현재를 저바리는, 아름다운 연합의 기억 같았다. 십수년 전의 내 서울에서의 글쓰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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