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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아부의 왕(2012): 부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일촌광음......

by 마음대로다 2012. 6. 22.

아부의 왕(2012): 부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일촌광음.......

 

 

 

 

 

 

 

 

부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데, 책상이 지저분하고, 과자 조각들이 떨어져 있고, 한 사람은 공부를 적당히 하는데, 늘 노트 정리를 잘하고, 책상은 깨끗하고, 미니어쳐들도 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누가 부자인가? 첫번째의 브레인은 뭔가 막중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 미제 사건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의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늘 의식하고, 인사하고, 마음 속의 창녀와 마음 속의 세리 마음 속의 경찰들의 친구이다. 부자로 산다는 것은 컴퓨터가 아주 깨끗하다는 것이다. 피씨방에 들어갔는데, 에어컨도 안틀어주고, 모니터는 지저분하며, 자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짜증을 부리다가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모니터를 닦고, 마우스도 닦고, 자판도 닦고, 마치 자기에게 다가온 오르골 음악과 한 사물처럼 영화에 집중하는 것이 부자인 것이다. 내 이 말은 그냥 그저 그런 사람들에게는 재밌는 단상이 되겠지만, 인격이 모자란 지식인과 학벌인에게 된통 당한 사람에게는 깊은 두번 상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인의 세계관, 혹은 설교의 문장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만 종교적인 콤플렉스로만 해석해서 그렇다면, 종교인들조차 마음의 피막 안에서 똑같다고 말하면, 조금은 납득하고 수긍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급격하게 더럽다. 그것의 현상은 마치 하나님 같다. 고구려 인근 지역의 민족 이름이 말갈인 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헤겔의 변증법적이고, 개복수술을 한 뒤에 메스를 하나 담그고 꿰맨 것 같은지 모른다. 우리는 금세 파리해지고, 심신이 약해지며, 당연한 말이겠지만 믿음의 건강을 상실하고 만다. 어쩌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그것을 그렇게 두껍게 노래하였는지 모른다.

 

양명학은 부요이다. 누구도, 글쓰기의 메시지를 예쁜 여배우들을 전진시키면서 전하는 사람이 없다. 앞으로 나 말고는 영원히 없을 수 있다. 우리의 지금 시대가, 나의 높은 불국사가 가장 높은 여래장일 수 있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인가? 영화에서처럼,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좋다. 나는 김성령을 사랑한다. 김성령 같은 여자를 진정 사랑한다. 그것의 상실의 시대는, 남의 다리를 내 다리인 것처럼 잃어버린 것 같은 비문법성이다. 헤겔은 말했다. 감동은 이념이, 특수할지라도 구체적인 형상을 입을 때 발생한다고 했다. 다만 김성령이 예쁜 배우 김성령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어필할 수 있다면 무엇때문일까?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 가장 좋고 예뻤다. 그것은 마치 상상 같고, 나래 같다. 상상의 나래. 남자들은 알 수가 없는. 다시 사용하는 단어로서의 피막. 모든 움직임은 부정negativity이다. 이것은 여성적인 센스이며, 헤겔철학의 문장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여자에게 손쉽게 다가오겠는가? 백 번 편지를 쓰고, 백 번 전화하고, 백 번 만남의 약속을 해도, 백범 김구, 불가능할 수 있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다. 남자가 비일반적이고, 예술적인 독고다이일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대게 상실하고, 유리를 획득하며, 꿈 속에서 그렇게 최첨단의 보안 시스템을 하고 있는 곳을 마치 그와 같은 기계 문명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찾아오는 것을 꿈꾼다. 그것의 부요함은 찰라와 같다. 비슷하게 만들면, 이등이나 방문한다. 이 영화가 바로 그러하다. 티비 속의 이등들과는 조금 다르다. 어떻게 보면 대학로 연극이다. 내가 보고 싶었던. 홍대에는 클럽이 있고, 대학로에는 연극이 있는데, 둘다 몸에 좋지만, 최종적인 에이도스는 대학로 연극의 눈내리는 거리에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의 무한한 이등들. 소리를 지르고, 자기가 기계장치의 신인 것처럼 소리를 내질러야만 일등이 되는. 잔잔한 말들로써, 대화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함께 연기 속에서 일등을 획득하고 싶은. 감동은 이념이 구체적인 형상을 만날 때 가능하다는 말은 보다 정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연극배우가, 첨단 시스템의 유리문을 통과해서, 삶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고, 그와 같은 좋은 대본을 만나는 것이며, 대학로 바로 그 장소에서 한국말로 된 셰익스피어에 진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일등성은 분명 홍대 클럽과 유비될 수 있으나, 그것은 에비히카이트, 아주 영원성으로다 불가능한 결합이다. 김성령은 목소리가 또박하고, 걸음걸이는 뚜렷하고, 얼굴은 아름답게 각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한 만남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모든 문학 용어들을 외울 수도 있다. 외우는 순간 만큼, 우리는 보카치오에 가깝게 되고, 셸리에 가깝게 된다. 다만 그것을 읽을 때와는 층이 다르다. 그것의 오래고 정선된 학생의 모습이, 남이 파논 구덩이 속에 들어간 우리나라 사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