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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유식

by 마음대로다 2020. 9. 17.

 

 

 

 

 

신약성서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가?

 

 

 

 

 

 

 

 

 

어쩌면 계획 전쟁이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고쳐먹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서로 싸웠는데, 저녁에는 함께 노래 부르고, 노래방에 가고, 춤추고 노래하고, 장사도 서로 잘했다면, 그 둘이 싸웠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각은, 촉촉한 논리, 실은 논리가 아니라, 그것의 행복한 연속에 의지할 때가 많은데, 그래서 그것을 생각이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싸웠다가, 서로 상처 입고, 그런 상태로 자연스럽게 생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공포 영화, 전쟁 영화, 전쟁 참혹 영화, 전쟁 공포 영화를 보고, 다시금 생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을, 경험을 통해서 잘 알지 않는가? 공포 영화를 보면, 사탄에게서부터인지, 아드레날린의 과다 분비 때문인지, 뇌가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꾸준하게, 고급스럽게 짓눌리다 보면, 정말 내가 죽는 것도 가능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가 선택한 것이면, 조작된 것에서부터, 그래도 내가 선택한 것이면, 얼마든지, 칫솔, 청설모, 칭송될 수 있다. 칭송 교도소. 문제는 지옥처럼, 지옥의 콘베이어 벨트처럼, 과도하게 조작된 것인 때는 안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도하게 딸을 찾다 보면, 너무 과도하게 잃고 찾고 하다 보면, 도리어 딸을 찾지 않게 되는 역효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 부모가 나쁜 것이 아니라, 딸을 찾지 않고, 딸의 비보를 듣고, 주어진 시간은 이십사 시간, 그 후에 딸을 보러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딸을 찾는 것에, 사탄이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지 않다가, 그런 꾸준한 영화들, 그것들이 거대한 웜홀이나, 워홀을 구성하게 되면, 사람들은 힘을 잃고, 자기가 영화를 보는지, 혹은 평론을 읽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마침내 그래서 솔로몬 판사가 없는 나라에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자신의 배가 작두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이와 같은 영화의 막장이. 사람들은 그래도 좋은 돼지우리를 찾게 되지만, 천장이 낮고, 더 이상 기억하는 관념의 층이 따로 없는 사람들은, 마침내 딸을 찾는, 몇 년이 지나, 또다시 무시무시한 미시시피 영화를 찍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섹스가 그와 같은 공장에 있고, 사람들이 촉촉한 행복의 흐름이 늘 운명적으로 비슷하기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그만 딸의 이데아는 미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과도한 압박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분명한 과도한 사탄이었다면, 그러나 동시에 사탄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면, 사탄의 물자체에 과도한 인간의 논리적 접근을 간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라, 과도한 사탄에 대해서는 분명 인간은 어느 정도 저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를 안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를 안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는 무엇인가? 영화는 인도인가? 책을 읽어도 인도인가? 영화 제작자들보다, 말도 못 하고, 따로 사회적 공동체도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들끼리 노조가 있고, 노조에 가입이 되어 있어도, 영화의 발에 인간의 뇌는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모든 말이 거짓말이다. 사탄은 위하는 것이 거의 없고, 회의적인 인간이 그렇다 하더라도, 속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고, 회의적인 인간이 피비린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사탄이 위하는 것은, 인간의 없음 뿐이기 때문에, 노조를 위하고, 사장의 딸을 위하고, 관공서를 위하고, 지방자치를 위하고, 일본을 위하고, 홍콩을 위하고, 우간다를 위하고,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천재적인 현명함의 인간은 사탄의 재정까지도 빼먹을 수 있겠지만, 대게의 평범한 지능의 인간은, 선택의 안 가본 길에서, 둘 모두에게 사탄이 있는 것이니까, 사탄의 발에 뇌가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천사도 위하는 것이 많고, 위하는 것이 원래 천사이긴 천사이긴 하지만, 인간이 지금의 문명만큼 따라오지 못한 상태에서는, 다만 사탄과 아무것도 차이가 없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푸념이 그것이다. 그 비좁은 길을 나왔는데도, 영화는 또 사탄의 지배에 들어가서, 영화가 개인에게 나와서, 개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딸을 찾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사실을 만들어서, 오직 사실을 가지고 영화를 제작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그만한 영화 감상의 쿠폰을 주고, 사람들의 지능을, 만물의 척도를, 두뇌의 주름을 계속해서 다리미질하여서, 밀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저항의 두뇌와 생각을, 고작 몇 디램처럼 한다 해도, 그와 같은 저항과 마찰을 통해서, 내면까지 깨끗한 아우토반, 딸이 실제 고통을 당하니까, 그것의 경제학이나, 관련, 최소공배수, 인원수, 마을 조건, 교육의 정도, 이념의 대결이나, 도덕적 우선순위, 지배의 계층과, 매치, 체면이나 사회적 권위, 그런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최종의 그림자놀이가 사탄의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은, 그와 같은 조작의 사회가, 자기 가족들의 남자들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가 바깥에서 연설할 때에, 먼저 가족에게 시연하지 않는가? 초자연적인 도덕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이 동양을 공격할 때에, 다만 무기를 갖고 하지 않고, 새로운 성경을 그렇게 만들고자 할 때에, 자기들 만만한 가족들에게 시연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절차인 것이다. 얼마나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성경의 말씀은 처음부터, 베드로의 십자가였는지 모른다.

 

 

 

*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노래 한 줄 부를 수 없었다. 주자의 채찍질에서나 일을 하고, 주자 이외의 자발성이 없는 우주는, 그래서 위계가 슬프고, 한없이 살벌하다. 섹스는 그래서 여와의 것처럼, 지옥의 것이기도 하고, 지옥이 아니기도 하고, 지옥이기도 하고, 지옥이 아니기도 하다. 이 말만, 백 번을 써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내게 올 수가 없다. 얼마나 이름이 슬픈가? 백범 김구. 백범 일지.

 

사이렌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남자들이 시체로 흘렀다는 것이, 그래서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의미 없고, 죽음을 호소하는 마지막 스토리라면, 사탄도 통과를 시켜서, 누군가 구약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는, 이제는 전쟁의 방사능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정신이 인간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하나님이었다가, 죽을 때에는, 갑자기 인간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죽음은 구약이 하나님일 때 많은 것 같아도, 결국은 죽음의 숫자가 진실성을, 여자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리어 인간의 작품일 때, 마침내 죽은 사람의 숫자를 뜻하는 쐐기가, 반대 방향의 것이 많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태공조에는 나쁜 것이 아닌 것이, 그것이 적어도 공부는 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이 능력의 말씀이라면, 반드시 공부하여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우리가 존경하는 이유는, 인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거기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고, 약하고, 겁을 많이 먹게 되면, 쉽게 죽게 되어 있다. 그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처럼 거대하고, 사람들도 많고, 무기도 많고, 그래도 죽을 수 있는 인간의 탐욕과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논리가, 문예적인 유식이 바로, 지금 전 세계 영화와 드라마의 출처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바로 그와 같은 때에, 스스로 방사능을 경험한 상태로, 더 이상의 작품이 불가능한 것 같은 때에 나온 것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의 공포 영화를 보다가, 영화의 발에 두뇌가 짓눌린 다음에, 성경을 읽고는 눈물을 흘린다 할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한 분위기적인, 무드 포 러브, 유미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있는데, 그것은 다만 형이상학적 높이이고, 개인의 가능성이지, 결코 사탄의 착한 마음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객관적인 형식과 구조에 들어가서, 항상 주자인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절묘한 행복과 그것의 확대, 그것보다 영원히 끝점만 착한 권력을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사탄의 출제 의도를 파악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들을 보내고, 아브라함, 딸을 보내고, 그러니까 노신의 어느 소설처럼,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 아내가 사라지고, 아내가 자기를 버리고 바람이 나고, 자기는 나중에 원시인의 엘리베이터에서 발견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의 연장이 제법 있을수록에, 우리는 사탄을 모르고, 다만 인간만 보고 아는 것이 되고 만다. 만달라. 아이들의 말장난은 원래,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때리는 수단이지만, 경험한 바로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리나라는 전쟁 이후에, 최첨단 불평등 자본주의 달나라 에스에프 국가로 되기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만들 수 없고, 작곡할 수 없고, 시가 없고, 노래가 없고, 두하이모아, 트윈폴리오, 자세히 보면 모두 다 속이 없는, 따라쟁이, 분명 미국 땅에서는, 그때는 넷플릭스가 없었고, 잔인한 에스에프 영화를 찍어도 사람들이 그것의 세트 느낌 때문에 도리어 재미로만 봐서, 미국 땅에서는 사람들의 두뇌가 분명 까뒤집어졌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집에 겨우 도착하면,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눈물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에게 고대의 영광이 있다고는, 사탄의 유엔 안보리에서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군 주위에서는 사탄, 그러니까 살인 사건과, 추객, 엽객 사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경찰들은 돈과 고등어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믿음은 주자가 가난한 지금도, 그와 같은 초자연적인 생명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사탄의 지금까지의 철학적, 문학적 확보가 그렇게 위대하고, 그레이트 익스펙테이션, 막대하고 그렇다.....

 

사탄이 아닌 문학은, 지금의 나처럼, 사탄을 직접 표기하고, 그것의 속성을 분명하게 나열할 때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글을 쓰기 전에 낭떠러지에 섰을 때, 그것은 다만 애민의 마음이 그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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