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주자의 실험
주자의 속을 우리가 사탄이나, 태공조가 아닌 이상, 사탄의 방안 속사정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다녔던 학교만 보더라도, 그것을 영어로 보더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디라인도, 그 사람이 어떠한 그림을 그릴 지가 예상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다시금 모두 같은 것일 수 있다. 어떠한 색감, 태도, 입장, 어투를 갖게 될 지를 예상할 수 있는데, 또한 한길사 사람 속을 모른다고,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정부주의나, 부지주의, 니힐리즘을 말할 것이 아니라, 최현우의 아름답고 슬픈 세상처럼, 그래도 제한되고 정해지고, 방학을 함께 지낸 남녀학생처럼, 결혼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좋은 사귀는 사람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심한데, 영화가 좋은 게 나왔다면, 가장 먼저 연락을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결혼이 아니면 무엇이 결혼이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따로 대륙붕까지를 육지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싶다. 그러니까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알 수 있다 말하는 것도 좋은 것이고, 알 수 없다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말하는 것도 여간 안 좋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그래도 높이 뜬 공을 야수들이 잘 잡는 것을 보면, 하루하루 멋지게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단 하나의 미적 판단이 있다면, 그것은 예상하는 것이 좋은 시간이고, 그것이 그대로 되는지 행동하면서 보는 것이 보다 좋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내가 계림국민학교를 갔다는 것은, 세상 코스모 폴리탄들에게는, 일종의 비보와도 같았다. 나는 학교가 가난한 내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당연하다 여겼지만, 그리고 다른 학교를 잘 가서 보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들 멋지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의 극치가, 육학년 특활반 활동이었을 것이다. 기미. 기미가 활동을 선택한다면 무슨 반을 택하겠는가? 축구부? 음악부? 독서부? 나는 미술부를 택했다. 우리들은 언제나 꽉차있고, 보다 꽉차 있는 대상으로는 무엇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여럿이서 그것을 뚫고 나가는 것은 선망하나, 혼자서 그것을 상대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철학적이고, 남다르면, 그리고 자기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자부심까지, 스프까지 곁들여 있으면, 맛이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그 자부심을 자기에게 뿌리면 되는 것이다. 육학년 전 반에서 한 명씩 미술부로 자원한 사람들이 한 반에 있었는데, 어느 다른 학년,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두 명씩도 되었는지, 아니면 한 명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 소개도 하기도 했다. 그렇다 보면, 지방색이나, 특수성이나, 변개소집성, 그러니까 감각적인 주변성이 급격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같은 학년에는, 같은 반에는, 반드시 그들의 잘하는 감각으로 친구들을 끌어당기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나쁜 것이 아니고, 그들도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 함수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보편적인 공부자에 가까워진 학생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좋은 이유가 그것인 것이다. 대신에 친구들은 늘 그런 말을 하는 것인 줄 착각을 한다는 것이, 뭔가 인식의 한계이거나 안타까운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계림국민학교를 졸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신중학교를 갔다. 동신중학교는 그렇다면, 어떠한 일본 명문, 그리고 김일성 대학교와 견줄 수 있었던 것인가? 다만, 특별한 교수나, 교주, 어떤 특별한 음악 선생, 매점 누나가 없어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가능하다는 것이 폴리탄들의 주장이다. 전국에도 수많은 중학교가 있고, 햇빛드는 창가, 아름다운 산이 바라다 보이는, 바닷가, 학교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해도, 도시적 종합과, 대상적 경험의 주체가, 상호교호작용을 하는 학교로서의 물목을 따지면, 금세 빠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서울에는 얼마나 고등학교, 대학교, 명문들이 많은가? 중학교를 또한 근사하게, 성적으로는 부족하게, 몸과 마음에서 피를 많이 흘린 채로, 졸업하였다. 사람이 힘들고, 사는 집이 작고, 친구들이 잘 살고, 그렇게 하다 보면, 전 세계적인 뉴요커들처럼, 반드시 같은 마음, 같은 말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금호고등학교를 갔다. 나도 내가 다니는 학교가 진정 광주에서 제일 예쁜 곳인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켜보게 되었었다. 나는 만족하였다. 항상 친구들에게 그것을 묻고, 주변이 아름다운지, 나는 내가 다니는 곳을 자랑하곤 하였다. 아주 넓은 시선으로 보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는 집 예쁜 누나의 별장에 가는 것 같았다. 공부자에게는 대상이 이미 공부에게서 그 마지막 성까지 확인이 되기 때문에, 실제의 친구 누나를 좋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그와 같은 피조물적인 운명을 감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은 나이가 한 이십대 중반, 실질로 가서는 서른이 넘어서야 가능한 여유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글자와 문자, 한자와 영어, 철학적 관심과 그것의 결투가 가장 치열한 것이다. 그렇게 금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많은 세계 아카데미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한신대학교를 갔던 것이다. 세상에 그와 같은 학생이 없는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그와 같은 고민이 담겨져 있었다. 미국의 한 학생이 있었는데, 자기 아들이나 딸이라고 해도 좋다, 낯설게 보면 그렇게 보였는데, 너무나 쉽게 마이너러티 문제에 빠져, 잘 알고 나오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인간적 종합성은, 그가 배우고, 입장을 정리하는 것에 따라서, 예쁜 동물이나, 심지어는 예쁜 초까지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뭘 배우자마자 예쁜 잔디나, 조경 나무, 파크랜드, 초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나라의 당시, 최고가의 영화들은 어떻게 창출된 것일까? 젠더 문제에, 늘 그렇게, 유에스비 젠더를 위로도 꼽고, 바꿔서도 꼽고, 그러다가 결국 책의 표지나, 문자 디자인, 내가 그것들을 좋아한 것은, 그들이 유언으로 남긴 것들의 세상을 좋아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겨우 눈을 들어 그들의 가상 메트로 메갈로 폴리스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너무 많은 존경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일 것이다. 사도 바울이 편지로써 늘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동양의 성현들도 늘 그랬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 따로 내가 뭘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나의 결여의 디스턴스, 혹은 스페이스, 혹은 추상적인 스퀘어가 좋은가? 아니면, 존경하고, 돈을 받고, 그래서 더욱 존경하고, 하는 실질적인 사회적 문자와 기호, 민속 공동체의 사람들이 좋은가? 그러니까 존재의 힘이 있는 것인가? 그때부터 폴리탄들은 내게 파충류의 눈빛을 보이면서, 감찰하기 시작하였었다. 당연히 나는 한신대학교 밖에 갈 곳이 없었다. 이 나라 이 땅에 태어나, 내가 갈 대학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민족 사관학교에 그렇게 가고 싶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쉽게 포기하였고, 그만큼 그것의 그림자는 제법 컸던 것이다. 그리고 상업 미술을 하는 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정형돈이 없어서 그렇지를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내 포토샵에는 그것의 오랜, 타임머신 같은 엣지가 살아있다. 존재의 강렬한 빛은 다만 생각으로 있지 않는 것이다. 생각으로만 있는 것은, 다만 사탄들도 그들을 가리켜 광명의 천사들이라고 좋아하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 말과 글이 매우 직접적이고, 아무런 틈이 없고, 작당이 없고, 주변의 오염이 없고, 마치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 것처럼, 선선하게, 그리고 신선하게 그 가장 좋은 식품을 내놓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철학적 논문보다도, 때로는 존재의 빛이 그것들 모두를 우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철학적 논문은, 다만 서울대학교나 서강대학교, 부산대학교에 있을 것이나, 유학을 가서, 좀더 튀빙겐, 하이델베르크처럼 만들 수 있을 것이나, 존재의 능력이나 빛은, 그것의 비문학적 표현은, 그가 졸업한 학교와 세상의 여자 친구들과 이미 함께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사탄이 있고, 우리에게 범죄가 있다면, 존재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왜 이리 이끌리는지 하는 정도로만 알고, 철학적 논문을 숭상하고, 그것들로부터 몇 명 남기지 않는 다미 선교회의 휴거로써만, 세상을, 사람들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 국가의 사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음식이 기본적으로 맛이 없으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열성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존재의 빛에서 살아갈 수도 있고, 늙어서 희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철학적 논문과 휴거의 열망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도 존재의 연속이 있지만, 스스로 그것을 귀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옷을 태우고, 스스로의 마음을 좋게 하면 세상 더 좋을 수 없는 머니 클립을 태우는 것이다. 왜 돈 쓰다가 죽는 것이 싫은가? 그와 같은 입장이 바뀐 문제를, 우리가 한 번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철학적 논문을 수련해야 하는 것은, 정말이지 존재의 빛이 분명 세상의 전부일 수도 없겠기 때문인 것이다. 존재의 빛은 철학을 좋아한다. 신약성경의 뉘앙스이기도 하다. 알렉산더가 사도 바울을 괴롭힌다 했지, 아볼로나 아리스다고가 괴롭힌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도 사람들에게 도가 전파되도록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이 한국어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기도 오산이다. 한신대학교나, 장안대학교, 그리고 미국 공군기지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철학적 논문이 발달하지 않고, 저들에게만 발달한 것을 보면, 분명 태평양 보다 슬픈 바다가 먼저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 논문의 일본인들을 보자. 그들이 다만 지능이 부족해서, 이과적인 전성기를 한때 경험한 것이 아닌 것이다. 늘 공부하다 보면, 한국 사람들과 비슷한 위화도 회군을 그들의 내면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실질로 보이는 모래가, 아무런 증명이 없는 훌륭한 관념이나, 존재의 나쁜 이끌림보다 나은 것이다. 모래가 건축의 자재로도 될 수 있고, 조경적인 효과만을 줄 수 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다가, 버려지는 것이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일 것이다. 물론, 바로 그러한 이유로써, 거기서부터 아이들이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 아프리카의 말, 그러니까 거대한 유혹의 말이고, 사탄의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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