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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가을의 발견

by 마음대로다 2020. 9. 25.

 

 

 

 

 

 

 

가을의 발견

 

 

 

 

 

 

옛말에 현균씨와는 사귀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의 이름이, 표상이, 암구어가 에이치지웰즈였을 것이다. 어째서 가난하고, 가난한, 나를 사귀지 말라고 했을까? 우리가 전라도 땅에는 가지 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가고, 오고, 휴.게.소. 휴거. 맛있는 것 먹고, 떠들고, 놀고, 자동차에서 자고, 갔다 오면, 요코소, 전라도. 얼마나 좋은가? 홍도. 신안도. 내장산. 진정 좋지 아니한가?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사귀지 말라고 하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 옛말에 보스턴에는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굉장히 좋은 것들도, 우연히 잘 맞는 것이 아니면, 오히려 감상의 주체에게 불쾌감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첼로 음악을 듣고, 서양 사람들은 넓은, 자주, 그것의 표상들을 눈 앞에 두고, 음악가들의 묘소들을 근처에 두고, 그 음악들을, 연주와 진여들을 즐기고, 우리들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처럼, 카세트로, 라디오로, 라디오로 기다렸다가, 그것을 녹음해다가 듣고 그랬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만화를 좋아했던 것은, 그것의 감상적 실제가 그렇게 선명했지만, 우리끼리 좋아했던 것 같은 것이다. 심형래 시리즈가, 우뢰매, 아이들에게는 인기였지만, 우리는 이미 신의 아들이라든지,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 만화는, 우리들의 전진에서 빛을 발휘한다. 그것의 영화화에 있지 않았다. 그 만화는, 마치 그 모든 것의 믿거나말거나처럼,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운동 역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서양에는 훌륭하고 인기 있는 영화가 이미, 헐리웃, 자리잡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실제 프로야구를 상대로, 빛과 그림자의 우편집중국을 만드는, 그와 같은 연결고리, 함성, 그와 같은 가지산 터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영탄. 그것을 빼놓을 수 없다. 구영탄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마포 종점 같은, 모든 버스들의 종점, 그래서 집값이 많이 싸지는 비례의 끝에서, 나무들과, 풀들과, 곧 있으면 시골이 있을 것들과 함께 하였던 것이다. 박은하를 놓고 볼 때, 실제로도 예쁠 것 같은 착각과, 우리들의 예술대학교가 있었던 것이다. 김하늘이 박은하의 이목구비를 많이 닮았지만, 또한 김하늘은 김하늘의 세계가 있고, 박은하는 구영탄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만큼, 그마만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구영탄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현실감이 떨어졌던 것이다. 우리가 다른 만화가들이, 주인공들이, 공중에서 떨어질 때, 지면 근처에서 위로 솟으면,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는, 주인공들의 주장에서 현실감이 떨어지곤 하는데, 고행석의 만화에서는, 수원의 어느 이층집 만화방에서는, 친구들이 가깝고, 못나고, 현정이 같고, 그런데도 소리가 또박또박하고, 귀 기울일 만 하고, 가족 같고, 영원한 친구 같고, 마구만 같고, 그래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처음 교회에서, 그와 같은 고등학생 시절에 읽을 때는, 비슷비슷했었다. 종수라든지, 도균이, 순진이. 찬훈이. 다들 비슷비슷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현실로, 강력한 지하철의 실처럼 나아갔고, 레일, 나는 어쩔 수 없이 작품 속에서, 작품의 익숙한 클리쉐, 얇은 철판으로 만든 새를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어린 마음을 잃거나 잊고, 야긴과 보아스처럼 되는 것은, 드미뜨리, 정치인들의 고르바초프처럼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친구가 반드시 개구리 왕눈이처럼, 아름이처럼,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고행석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현세가 새처럼 나아갈 때, 우리가 거기에 동의하고, 끌려가고, 우리가 서둘러 종잇장을 넘기고, 회색이든, 검은색이든, 그것의 필터 효과이든 간에, 반드시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은, 실은 열정이고 사랑이었을 것이다. 어린아이 때의 영혼이 완전하고, 충분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경험과 경험 속에서, 나이가 유다처럼 점점 많아지는 경우에는, 구영탄이 넓은 마당에서 만나던, 친구들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문학을 공부하고, 철학과 윤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면,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해서, 사탄에 관해 일가견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면, 다만 그 정도의 인식론적 단절을 갖고, 자기 삶을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소설이 그렇게 리얼리즘 같으나, 나중에서는, 소설 속의 대사만으로도 비현실을 직감하는 것은, 낙타가 아닌 자기의 등에, 실크 한 장 없이, 실크로드만 오랫동안 걸었던 이력에서 나오는 판단일 것이다. 콜럼비아 호가 폭발했던 것도, 그것이 에스에프가 아니라, 그들이 꾸준히 만드는 드라마, 대학교 강의, 영화, 그리고 연설, 대통령 연설, 군인, 스텔스, 그런 것들이 실은 에스에프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모든 것들의 관계는, 관계들로 되어 있고, 작은 것이 더욱 작아질수록에, 연결은 실크와 같아지는 것이다. 한국어는 경희대와 같은 이상한 서양식 건물의 파사드, 그런 것을 갖고, 공부하다가, 또한 근처에서 밥을 먹고, 집에 가서는 목소리가 실크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마치 그들의 언어의 뭉퉁한 연결이, 인간의 실질적인 대상과 그 대상의 머리인 것처럼, 최종 결론이 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공포 영화를 보아도, 공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인격 상호간의 긴밀한 예절이나, 어떤 애틋한 제스쳐 같은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셰익스피어나 워즈워드를 좋아하고, 그들이 키이츠나 쉘리를 좋아하는 것에는, 하늘이 정해준, 세계어적인 운명 때문일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 안의 아이가, 성장한 자기처럼 다부지는 것을 원하고, 그처럼 교육하나, 여자들은 어느 정도 아이에게 종복이 되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아이에게도, 아는 것이 힘이다고 가르치나, 여자들은 아이에게 모르는 것이 약이다고, 자기도 잘 모르니까 함께 약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둘의 해법에는 차이가 있고, 어느 해법이 분명 나은 것이 있다. 사랑이란 아이노센시, 그러니까 영원한 아이들의 느낌 같은 것이다. 나와 같은 남자는, 라오우는, 사람들에게 많은 비참을 안겨주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나, 구로자와 아키라를 보면, 그들에게 마땅한 평론가가 없다는 것이 여간 슬픈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 올드보이를 만들지 못했다 말하는 것도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이 사라지고, 어제의 기억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이과를 가는 것이 낫다고, 늘 현장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말한다. 아이들도, 벌써부터 노화가 발생하고, 사탄이 저 멀리에서 부르는 것을 안다. 대학이 공부의 진정한 다음이 아니면, 공부는 마침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옆에서 늘 죽음의 사자가, 서양 영화인들의 표현처럼, 장기를 두고 있다. 기사들도 있지만, 기사들을 가리켜 인터넷 게임하는 사람들끼리 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신기사는 신박, 신박하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죽음이 장난처럼 늘 옆에 있어서, 그렇게 반어법적인 주문을 외웠던 것일 것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다 보면, 반복의 낙엽 속으로 죽으러 들어가는 자기를 위에서 바라볼 수가 있다. 마치 유체이탈처럼. 우리가 기숙사에서 잠을 자다 보면, 땀을 조금 흘리면서,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는데, 누워있는 자신을 몇 명이서는 본다고들 한다. 레토릭이 마감이 되는 순간, 진실이 윌리엄 포크너처럼, 요청되는데, 그의 소설에서처럼, 또한 반어법적으로 표현하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레토릭을 연마할 때부터, 그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 라오우처럼, 적어도 켄시로처럼, 기도하고, 그것의 대화법을 익혔어야 하는데, 누구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기계는 레토릭과 같다. 자동차와 같이,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자동차는 있을 수 있다. 진실이 있다고 해서, 레토릭이 없을 수는 없으나, 지금의 글처럼, 레토릭이 있다고 해서, 나처럼 진실을 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실 안에는, 기쁨도 있고, 매우 변증법적이고 아름다운 성희 같은 것도 넘친다. 우리 마음 안에는 반도체가 있지만, 그것의 크기와, 반응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반도체 강국이 된다는 것은, 그것의 원리를 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스크린의 반응만을 향유하다가, 티비 같은 것에서나, 일반인들이 아닌, 작가들도 그러한데, 작가들도 겨우 극작거릴 때에나, 그와 같은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어째서 이름이 켄시로인지. 주인공이 가장 주인공을 닮았으나, 나는 아름다운 땅 라오스를 닮은 라오우라는 이름이 좋았었다. 그리고 그가 매우 튼튼한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내가 다만 나의 다리로 걷기만 해도, 빈곤의 상징까지는 아니어도, 별로 부유하지 않는 광주의 거리를 걸어도, 사람들은 유리아의 전설 같은 것을 찍었다......

 

 

서울은 다를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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