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과 금각사
우리에게 주차가 편한 차가 있다면, 서둘러 퀴즈를 떠나지 않고, 답사를 떠날 것이다. 그것은 졸업식. 답사. 말하면서, 울고. 웃고 떠들던. 답을 모르고, 그래서 우리가 이세민인지, 이등박문인지, 미시마 유키오인지, 알 수가 없는 시절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국 사람이 이토록 없을까? 박정희. 김대중. 던주환. 다들 문인들이 아니고, 철학자가 아니다. 쇼팽. 헤겔. 알프레드. 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면, 날을 셀 수도 있다. 학교에서 배울수록, 나는 세포의 두려움만을 배웠다. 우리가 눈 앞의 지배, 그리고 눈 앞의 슬픈 사랑의 불시착 여주인공을 보고, 아오자이를 보다가, 우연히 답사라도 떠나면, 금세 엘가의 음악에도 취할 수 있고, 적당한 성공의 한국 사극 영화의 배경 음악에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안에서 보면, 패배이고, 바깥에서 보면, 적어도 황산벌의 계백만큼은 성공이라서 그런 것인가? 그것은 맞는 말이다. 몇 대 맞을래? 선생이 그런 것을 다 묻는다면, 다들 한 대 맞겠다고 했으나, 미학적 형식성으로다가, 다섯 대, 별이 다섯 대? 맞겠다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미학자의 시절을 잊었을 것이다. 선생도 그 깊은 그림자 연극 속에서, 어째서 다섯 대를 때리는지 몰랐을 것이고, 모든 미학적 시간과 정합성에, 항상 얽매이는 국정원 직원들은 거기서도 몇 개월의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유를 모른다라고 최종 결론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로 치지만, 말로도 하고, 컴퓨터가 음성 인식도 하겠지만, 옛날에는 타자기로 드다다닥 철철 철 그렇게 쳤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면, 인간은 거기서 사라져갔다. 인간은, 인격성은, 신학적 철학은, 사람 이름 신대철은, 박철민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기 때문에, 순수형식적이기 때문에 사라지고, 다아이몬드 같은, 초콜렛 아몬드 같은 나 신현균만 남았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내가 타이슨인줄 알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자기 아버지가 김득구였다가, 맨시니에게 슬프게 죽고 나자, 타이슨이 되어서, 자기들을 두들겨 패서, 오래 살아서 살아있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이 죄다, 두려움에 떨었던, 사탄 앞에서나 두렵다가,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떨었던, 떠려니, 그 기억을 잊지 못해서, 나는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에도, 국문학의 등단에도, 신문사와, 문간지에도 거절을 당했던 것일 수 있다. 타이슨의 명경기들을 모아 보면, 내가 아는 것들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냥 아무렇게 모았던 것처럼, 너무 상대 선수들이 안타까워 보인다. 내가 보았을 때도, 타이슨의 경기는, 일방적이었고, 무서웠고, 내가 링에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고, 나의 링을 해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상대 선수들은, 나를 타이슨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교집합에도 능숙했고, 그냥 정수에도 안목이 있었다. 누군가는 당연히 타이슨을 나의 교집합으로 알았지만, 또한 누군가는 정수라고도 알았던 것이다. 타이슨이 매운 짬뽕과 같은, 초콜렛 다이아몬드를 우리에게 선물했다면, 우리는 그것이 국문학의 실종과 같은 안타까움에 그랬을 것이다. 내게 한글이 없고, 내게 비 내린 광주 벌판, 오후의 아름다운 석양이 없었다면, 라디오 방송, 그런 것이 없었다면, 미국의 영화가, 그리고 숨어서 우리를 압도하던 음악이나 영화, 미술이나 문학에 아쉬움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우리가 수원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수원역에서 병점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가끔은 바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우리가 다시마 유키오, 너구리처럼 죽지 않는다 하면, 반드시,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늘 실체가 없고, 뿌리가 없고, 깊은 나무, 한중록이 없고, 유키가제가 없고, 사도세자가 없고, 영조가 없고, 영 조가 없다는 뜻인 표현, 말, 말에 색조가 없고, 화장품이 없고, 아이들이 울고, 그런 것들의 연속, 배출이라는 슬픈 절망, 배출이라는 졸업생들의 연합, 여의도 사람들이 학원 드라마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졸업하면서 밥도 못먹고, 집에까지 가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그 있는 것들을 슬프게 하신 이가 누구시냐, 묻는 것에 답을 하지 못하는 이들인 것이다. 나는 한신대 대학원 그 오래된 건물이 철거가 된 것에, 못지 않은 폭력성을 느꼈다. 사람들은 내가 타이슨이다 하겠으나, 나는 나의 링이 훼손되는 느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니 조금씩 핀트는 어긋나고, 그래서 소승에도 우리는 진실을 발굴할 수 있고, 대승에도 설 수 있는 것이다. 졸업생이, 자기는 대학교 다닐 때 한 번의 학원 드라마나 영화가 없었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보 선언 말고 별로 대학 드라마가 없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논스톱도 없었다 할 것이다. 우리들의 천국을 보고, 대학을 갔더니, 별로 그렇지 않아서 실망이었던 나이지만, 우리들의 천국보다, 책을 읽고, 로봇처럼, 고개를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청강하고, 청사에 남는 드레수애, 사랑하고, 혼자 걷고, 야할 줄 알고, 중국학과 여학생과 자다가, 수업 들으러 갔는데, 정말 코끼리가 머리를 누르는 것처럼, 고개를 좀체 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선생이건, 학생이건, 다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어째서 중국이 있는가? 어째서. 어째서 중국이 있는 것인가? 사람은 가만 있으면, 사람이 아닌 것인가? 어쩌면 내가 그 모든 레이어들 사이에 있는, 빵이라든지, 포토샵에서의, 사람들의 콧구멍에 이와 같은 숨을 집어넣었는지 모른다. 그들 중에는 나처럼,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남은 날이 오십 년 밖이면, 너무 부족하지 않나 싶다. 논스톱을 보고, 학교에 갔더니, 기숙사의 구조도 다르고, 분위기도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는 푸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별로 반짝이는 재미도 없었는데. 그래도 그것이 아쉽고, 기대가 되었던 것이고 했던 모양이다. 차가운. 지금은 없는 반월공단의 사람들처럼, 학교에 가고, 기숙사 침대에 눕고, 스프레더가 컨테이너를 집어올리는 것처럼, 수업을 듣고, 선생님이 랩을 하면, 학생이 따라하면, 그것의 정확성을 컴퓨터로 체크해서, 성적을 매기는. 그래서 내가 갈 곳 없는 불분명한 대학원생처럼 지낼 때, 사람들 사이에 끼어, 답사를 갔던 적이 있었다. 그것에는 재미가 없었다. 아주 나중에, 죽음의 강을 건너,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답사를 하던 것이 재미가 있었다. 드디어 답을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고, 아가야 지방과, 마게도니아를 하고 나자, 우리나라가 그나마 하늘 높이 우뚝 서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휩싸였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에, 죽음만이 있고, 나의 기생충 같은 삶에 생명이 있는지, 내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그런 날선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두 가지였던 것이다. 하나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기억이고, 추억이며, 기추이고, 질문이고, 생활이었던 것이다. 신학이 시녀하는 것 같고, 철학이 시녀하는 것 같고.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시녀를 하겠으면, 주인은 누가 되겠는가 질문하는 것 같았다. 테쓰형. 이것은 너무 거친 인용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았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나를 배반하는 무리이며, 나를 교수직에 앉히지 않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들은 계속되고 있고, 그들은 이유가 있으며, 그들은 일을 만들고, 그들은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고, 그것으로써 광명의 천사처럼 구는 것 같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의심하였다. 기분이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저기 따라오는 달은 아름다우나, 알 수 없는 기체가 하나 높게 보이더니, 그것이 계속 따라오는 것에는 마음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선한 사람이 죽으면, 이야기 바깥에서, 드디어 그들에게도 생각의 틈이 보였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가, 한중록, 혹은 유키오의 슬픈 죽음처럼, 사탄은 영원한 샘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목숨으로써 노력하면, 그나마 지워지는, 감가상각되는 대상적 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은 한중록을 싫어하기도 했다. 여자는 게편이라고, 늘 거기서 맴돌게 되어있는데, 얼마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선명하면, 로봇처럼 그와 같은 판단에까지 전진하였겠는가? 옷을 입을 때, 오승연, 신경쓰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여자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생리혈이 많은데, 시녀가, 철학적 시녀가 자기에게 붉은 치마를 입게 하면, 처음에는 관련을 맺지 않다가, 궁궐 모임에 나아가,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고, 웃고, 떠들고, 한 마디도 이기지를 못하고, 노처녀고, 라오쯔고, 그래서 자기 처소에 돌아와서는, 그 시녀의 목숨을 헤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 사건을 놓고, 왕이 만일 네가, 문장력이 그나마 있는데, 보통의 공주면, 황태자비면, 그냥 내칠 수 있으나, 귀신이 들려, 네가 큰 실수를 하게 한 것 같으니, 그와 같은 만행을 마치 어떤 왕자가 있어서, 그럴 수 있는 것으로 그려 보면, 그것으로써, 자아 비판으로 여겨, 궁에 남길 것이다 한 것이다. 한중록의 글을 놓고, 높은 문건이다 말하기도 어렵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다 내치기도 그런 것이다. 그렇게, 끈끈하고, 글은 원래 끈끈한 것이고, 아름다운 사랑의, 그와 같은 남의 나라 유키오의 머리 같은 것을 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공주가 되면, 대게가 사도 세자의 병에 걸리게 되는데, 스스로 천사가 되지는 못해도, 그것을 아는 학자는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여자들을 건들고, 그것이 그렇게 한 달을 넘게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젊었을 때는 사도 바울의 편에 서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는 아볼로 편에 서고, 게바 편에도 서는 것이다. 그렇게 여자 편에 서다가, 드디어 사도 바울의 편에도 서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여정은 필생의 것과 같고, 너무 멀고, 길고 하는 것이다. 단번에 버릇없는 세 살처럼 상투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상투스. 너무 멀고, 길고, 희생이 크고. 몸에 폭행의 능력은 있으나, 뜻을 돌려 파악할 만한 명철함은 없다 싶으면, 철학적 시녀를 한 명 죽이고, 그렇게 죄를 갚은 기가 막힌 한 사람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나는 두려웠다. 여자가 쓸 수 있는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읽은 것을 암송하여, 사건과 연결시킬 능력은 없어도, 누군가 물으면 답할 수 있는 것이 학자이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이것도 아니었고, 저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말로만 따지면, 학자의 것을 능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의 위엄과 재산, 명목과 처신에 대한 것은, 그녀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던 것들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나와 같은 남자는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나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더 검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유키오의 글을 읽는 것이 편했다. 그에게는 의지가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관료적인 의지나, 생각, 왕과 같은 가치 판단이 없었다. 부분부분 너무나 어리고, 겐지 같고, 모노가타리 같고, 그것이 없었다면, 차라리 유키오 모노가타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입각점들로 풍성하였다. 우리는 보통 아름다움이나, 도덕, 그리고 불분명한 사회 현상을 향해 관심을 갖지만, 유키오는, 그의 금각사와 같은 글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우리를 반성케 하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친구가 그런 친구가 있으면, 배기성이라는 친구처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표현이 부드럽고, 세련되었으며, 문학적 감수성이 너무나 깊었다. 우리 한국문학은 일제 기간동안 갖지 못했던 것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하는 것과, 벽에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하는 것은, 건축의 간이한 단편이긴 하지만, 관심의 입체가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성격을 낳는다.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지만, 성경의 표현대로, 그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낳는가? 우리에게는 우리의 출생이 있고, 유키오에게는 유키오의 출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아름다운 오토바이를 두고, 한국이 그런 것이 없는 것을 세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이다. 세계의 창을 내는, 그런 현궁 같은 기가 막힌 오토바이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혜경궁 홍씨도 남자 같고, 미시마 유키오도 남자 같다. 여자는 원래, 콘테이너에 쌓여지고, 선박에 놓여, 세계를 유람하는 물건과 같다. 가까이 가면 말이 없고, 옮겨지는 손에 수동적이며, 멀리서 보면, 에버그린이나, 에스케이에이치유, 오오씨엘, 그렇게 적혀져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이 있다 말하면, 그런 것 같고, 말이 없다 말하면,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라 하신 것이, 때로는 여자들을 안정시킨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들으신다면, 여자들은 더더욱 사회 안정 자금 같은 기분에 휩싸이지 않겠는가? 혜경궁 홍씨는 모르겠으나,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의 글은 천재적인가? 그러니까 사람을 낳을 수 있는 글인가? 사람들은 내게 물을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사람을 낳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가 죽었을 때, 도리어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것을 보면, 확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그의 아이들을 가졌고, 기능도 하고, 말도 하고, 우리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짚차도 타고, 눈 오는 날 여행도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곰이라면, 끝까지 읽을 것이다. 눈이 어두워지고, 두려움이 치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거기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확률이 높지 않는 것과 같이, 가치관에 심각한 냄새가 발생하면, 지속적인 마찰과 미학적인 부딪힘으로, 처음에는 그것이 좋았으나, 그만 두는 것이다. 야구는 유키오의 공으로도 되어 있으나, 그것을 읽는 배트로도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유키오의 경우처럼, 공을 하나 만들고, 그것을 사랑하다가, 공만 보고 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백구이기 때문에, 사탄이다 아니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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