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적인 상상력
나는 아무런 말이나, 그런 잉크를 은하수에 뿌리기만 해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가 되었다. 아무리 복거일이 싫고, 그의 입장, 주장들의 면면이 싫어도, 우리가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싫어할 수 없듯이, 늘 언제나 우리는 세상 모든 것에, 그리고 우리들 내면의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충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판소리나, 농악, 탈춤을 추다가, 옆에서 북치는 사람이 얼쑤 얼쑤 그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절시고. 저절시고. 그렇게 우리들이 고대 방언들을 찾으러 들어가다가, 문득, 이것은 아닌데 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없다. 얼쑤. 얼쑤. 그것은 팥죽을 좋아하거나, 수제비를 좋아하거나, 깊은 겨울의 동지 팥죽, 동지, 동지, 동지가, 그리고 배고픈 시절, 파를 넣고, 계란을 넣고, 넓게 많이 끌여도, 가족이 늘 더 많던 수제비,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것들로 그치고, 그것이 무엇을 향해 나아갔는지, 유키가제, 모르면 곤란한 것이다. 주체의 감각은, 그것에 대한 회고는, 변이들의 철학 강의보다 힘이 세다. 내가 목사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변이들이지만, 자기 목을 걸고 어느 때는 분명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주자가 악마를 무서워하고, 악마에 조정당하는 것들을 무서워하지만, 때로는 그런 형식적인, 우리 쪽 진영의 목사들도, 한 머리 깎은 스님들도 무서워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고독한 것이지만,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고, 살아가는 것도 고독한 것이다. 주자와 주체는 다르다. 주체는 조금 주책인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 같다. 주자는 색깔이 곱다면서, 모든 터부를 이겨내고, 젊었을 때, 자기 이름을 붉은색으로 썼던 사람에게나 사진 찍힐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를 못하면 힘이 빠진다. 당연히 데릴라가 삼손더러, 공부를 못했다고,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했어야 했다. 그러면 삼손은 힘이 빠졌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머리 자를 때, 머리 자른다고 하니까, 서양 사람들은 번역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메두사인지, 그래서 하나의 머리쯤은 자를 수 있는 것인지 생각했을 것이다. 아주 조계종, 태고종부터 그랬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우연히 기숙사에 같은 방을 쓰다가, 어느 쓸쓸한 가을 날, 누워있는 자기에게 어딜 간다고 보고하면서 나가기를, 자기 머리 자르러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사는 세상은, 슬프고, 주체가 없고, 힘이 많이 빠진 상태로, 어느 기숙사에 살짝 누워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때 드라마가 우리를 부축한다. 일본도, 일본 교토 대학, 동경 대학 기숙사도, 드라마가 아주 유명하다. 그런데, 일본의 장점을 놔두고, 한국 드라마를 선망하는 것에는, 그처럼 머리 깎는 흐름도 있겠지만, 분명 주체의 심각한 반응도 있었던 것일 것이다. 처음에는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스,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를 만드는 흐름도 있었지만, 드디어 응답하라 시리즈가 재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더 나아가, 미스터 션샤인이라고, 매우 이기적인 유전자인 우리들로서는, 잘 접할 수 없는 대상을, 보고, 좋아했다는 것은 사랑의, 좋은, 인위적인 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일본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본 에이브이 배우들의 공도 있는 것처럼, 남자 주인공들의 모습이, 일본인 여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 것이 진실이 아니거나, 많이 틀린 것이 아닌 것이다. 주체는 슬플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주체는 셰익스피어가 꼭 김치 같으나,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고, 삼국사기의 내용은, 우리에게 능력과 용기 있는 학자가 있어서, 해석학적으로 그것에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모든 주체는, 마치 남미의, 그리고 태평양의 오지나, 버려진 섬처럼, 난마돌, 주체의 성질은 비슷하나, 도무지 그들의 말은 한국어가 아닌 것이다. 사탄들이 쓰다 만 돌을 갖고, 마치 예전에 죽은 사탄이 지금도 자기들을 감시하는지 떨리는 마음으로, 지금도 그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우레탄, 정신이 없는 것은, 어째서 중국이 한국을 점령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 한국은 일본을 침략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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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세상과 우주를 향한 원 투 펀치, 그러니까 두 개의 키인 것이다. 일본인들이 세계 제일의 경제력을 갖고,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가질 때, 한국 사람들이 감상이나, 예술을 향한 고독한 삶에 있어서, 지쳐서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드보이를 보면, 그만한 작품이 한국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지 않는가? 우리가 올드보이를 보고, 마치 점령을 위한 공성전으로 상상한다면, 그 무척이나 곤란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드디어 그 불편하고,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그림자가, 무엇의 시계를 가리키는지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나 기생충은, 처음부터, 이름부터, 탈락인 것이다. 사탄이 좋아했다가, 사탄마저 싫어하는. 그렇다면 어째서 태공조의 권력은 내게 영화 만들 권을 선사해주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권력을, 문단을, 교수직을 내놓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한 것이다. 이미 같은 영향을 갖고 있고, 이미 그와 같은 가능성을 내비쳤으며, 체급이나 도덕성, 예술성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여수 어느 농한수산 빌딩의 모습처럼, 복거일에 종속되어 있다. 온통 얼어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섞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등 변신족들이 사탄인지 아닌지 잘 알지 못한다. 사탄들이 좋아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주고, 그들에게 나를 괴롭히는 권리를 주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내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저 사람들은 부지런히 뛰어서, 그렇게 했고, 나는 그냥 일만 다니고, 공부만 하고, 글만 쓰니, 누가 버스 자자, 그렇겠는가? 하지만 사람이고, 한국인이니까,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것이고, 사탄이고, 사탄이 확신하는 것이면, 그들이 부지런히 뛰어다녔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사탄이 아닌 것들도, 나를 보면, 그냥, 무조건 흥분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사탄이 아니면, 적어도 입장을 변경할 용의가 있는 것인가?
사람이 사탄으로 태어나, 적당히 사탄의 짓을 하다가, 적당히 부모의 말을 잘 듣다가, 진학하고, 꾸준히 사탄의 짓을 하다가,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다가, 그러니까 미국 드라마도 봤다가, 한국 드라마도 봤다가, 냉정과 사탄 사이를 오간다면, 완전히 사탄이 아닌 것들은 고민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이비시터가 잘못을 별로 안 하다 보니까,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뉴스들은 사탄의 정리가 완벽하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 아이는 완전한 사탄이 아닌 것들에게 함박 눈물을 안겨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좋아했다가,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좋아했다가, 전도했다가, 사회적 거리두기 했다가, 나의 글을 따라다니면서 천주교인 했다가, 부처했다가, 넷플릭스 했다가, 유튜브 한국 드라마를 세계인들이 좋아했다가, 그 누구도 과감하게 코로나 언급하지 않다가, 그러는 것은 그들 모두 완전한 인간들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가, 드라마 봤다가, 미국 드라마 봤다가, 좀비 연기 했다가, 한국의 치안이 좋다고 했다가, 늘 그렇게 변죽만 울리다가, 얼쑤, 이상한 모든 것의 죽이나 국을, 얼쑤, 국자를 넣고 돌리다가, 계속해서 자기들이 휘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어느 정도는 인간이기 때문인 것이다. 말에 깊이가 없고, 그것에 고민이 없는 것은, 동도서기, 그러니까 과학이 완전하다고 믿는 서양 사람들의 말 못 할 습관 때문인 것이다.
옛날에 중국이 부지런히 한국을 점령하려고 왔었다. 얼마나 자주 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처럼 입장과 태도, 해석이 불분명한 거대 군단은 반드시, 문화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점령을 위해 떠난지, 시안이나, 개봉, 광저우나, 중경, 쑤저우나, 장안, 어디라고 해도 좋다. 유아이피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를 점령하기 위해, 거의 모든 선단을 꾸리고 지금도 영화들을 파견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 과거의 영화인가? 아니면 이상한 좀비 문화와, 식인 문화인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북경을 지날 때, 그때는 수도가 아니었는데, 그들은 북경 원인이 되었고, 한국의 군인들은 겨우 몇 만이라는 말을 서로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기들 군인은? 삼십만, 오십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과장을 흉내 낸다면, 백만이 되는 것이다. 어쩐지 처음부터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느 군인이, 어느 이차돈이, 사람이 아닌, 이차에 걸쳐, 돼지이니까, 자기 머리를 내놓겠는가? 구지가. 그런 노래가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구가. 우가. 우가. 구지가. 그렇다면 사람만 국 끓여 먹지 않으면, 사회적 거리두기만 잘하면, 한국까지 올 수 있었는가? 당태종이 사람 눈이 보이는 국을 보지 않을 수만 있었다면, 한국을 점령할 수 있었던가? 탁자의 다리만 빼놓고, 사람이란 사람은 씨씨티비처럼, 중국 관영, 천 개의 눈을 실제로 가진 괴물처럼, 그중에 몇 개만 볼 수 있겠지만, 다 보고, 먹을 수 있는 사람이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그렇게 중탕하면, 한국을 점령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한국 원정은 그렇게 계획되었는지 모른다.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을 선별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먹은 사람들을 가려내고, 먹기를 좋아하고, 탐하고, 사람 고기가 아니면 안 먹는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안시성에서 모두, 강감찬이 모두, 죽여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위해서, 고대 중국의 한국 원정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누가 중국인이고, 누가 강감찬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의 왜구가 한국을 침략하기 좋아했다는 말도, 기록도, 처음, 그러니까 식인 문화가, 인간 모두에게 있었을 무렵에 한국 사람들이 내세운 명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의 현상이, 매우 불완전하고, 해가 가고, 십 년이 갈수록에, 더더욱 기이해지는 것은, 구조역학상 당연한 것인 것이다. 한국어와 한국사가 대립하는 것이, 그 때문인 것이고, 우리에게 철학이 미진하다 여겨지는 것은, 그런 느낌은, 식인종의 역사는, 그와 같은 공동체의 무의식은, 늘 언제나 생각보다 빠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식인종이 아닌 무리가 있고, 그것이 순수하게, 집단끼리 서로 대결하고, 국가 간에 전쟁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은 다 헛것이라는 것인가?
영화도 그렇다. 서로 자주자주 싸우는데, 맨날, 티비를 틀면, 깡패들이 나오고, 사탄들도 나오는데, 그들은 매우 싸우고, 잘 싸우고, 액션이나, 과장, 사람들이 그런 직책을 좋아하고, 영어를 쓰고, 깡패들은 영어를 배우다가, 자주자주, 맷집이 약한 사람들은 작은 타격에도 쉽게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존나 지리는, 걸레 같은 영어를 익히고, 한국의 영어 공용화에 준비하고, 누군가 밤에 치안이 좋은 이유가, 한국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두기에다 타인에게 말 걸기, 그런 것을 시연하면, 유재석처럼 영어 울렁증에다, 옛날 내용을 쓰면 제작비가 많이 나온다는 말이나, 그런 조영남 같은 말이나 하고,
별로 사람은 먹지 않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라이언, 그러니까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진실 혹은 거짓. 그렇게 외국 사람들이 외국 가발을 쓰고, 잘 모르는 나라의 에피소드를 말했던 것들이, 다 세이빙 더 프라이빝, 천국의 책방 같은,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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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로 뛰쳐나갈 것 같은 난쏘공들을 잡아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중력이 되어서, 사회를 안정화시키고, 사회계약적인 우주를 만들고, 선한 거짓들을 무수한 사회적 현상과 일차적 경험자들에게 진실한 원인으로 만들고,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국의 국사 영화가, 옛날 가난했던 국가주의 시절에나 용인되던, 그런 국사가 너무 많은 강을 건너고 말았다......
하나의 운동이긴 하나, 아무런 선에의 의지나, 선이 잡아줄 인력이 없는, 그렇게 영원한, 발성, 구멍, 사탄들의 휴양지, 일본인들의 비철학적인, 한국 연대의 만만한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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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영국도, 자세히 보면, 약간 기형적인 한국 것들을 매우 상찬하는 경향이 있다. 틈만 나면.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매우 노력하여서. 그것은 선한 의지보다도, 일종의 자연재해처럼, 태풍이 불어, 낙과된 것이 가지에 다시 붙는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의 기형이, 부족이, 대표성이 없는 것에의 습관적인 안주가, 실제로 사람들을 기형으로 만드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드라마 자체보다도, 그와 같은 드라마적 바깥의 시간을 예상하는 것이다.
성숙한 우리에게 정신은, 바른 몸과 마음이겠지만, 그들에게는 항상 실제로 아무런 몸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의 글에 예민한 사건사고들은, 숨은 철학적 무리들은, 처음에는 항상 단순한 형식적 난제로부터 시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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