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관심의 소비

by 마음대로다 2021. 5. 29.

관심의 소비

 

 

 

 

 

 

 

 

하늘 아래 관심의 소비라는 말이 있다. 관심은 소비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이 경상도, 북한의 양강도 어디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하고, 아는 바가 없어서, 그것은 사라지곤 한다. 그렇다면, 철학적으로, 어떤 것이 소비적이지 않은 관심이겠는가? 관심은 여학생. 한 명 두 명 세 명까지는 헤라클레이토스, 혹은 헤라클레스 같은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휴지심을 버리지 않고, 우리들 학창시절로 돌아가, 나는 남녀공학이 아니었지만, 남녀공학인 것으로 세트 분위기를 바꾸어서, 앞에 여학생이 앉아 있는 경우, 그 휴지심으로 보고,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서 얼굴을 확인하는 경우에는, 또한 정지용이 내게 나타나 어떻게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심의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관심의 심장이고, 더 탑 오브더 월드 하는 것처럼, 관심의 관심이다. 그러나 여섯 명, 열 명, 그렇게 다만 휴대폰 번호 입력된 것 모두를 본다고 할 때, 그것은 다만 입력된 것이지, 관심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주자가 되면, 주자가 되면, 그들은 모두 비존재가 되고, 그들은 모두 관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비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주비적 관계, 안소비적 관계, 생산적 관계, 그것들의 대립항이 도리어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실은 소비적 관계가 우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다. 그것은 관심이었다. 우리는 암암리에 영문학과의 전쟁에 있었다. 누군가는 범죄와의 전쟁에 있었다지만, 우리는 그렇게, 성경 해석과의 전쟁, 그리고 매우 막강한 영문학과의 전쟁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겨우 틀을 잡고 있었고, 우리는 겨우 드라마 장난을 칠 수 있었다. 그것을 승리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있겠으나, 그것을 안승리로, 혹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좀더 정확하고, 좀 더 섬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 비평이라는 장르는 없다. 연극이나, 회화, 음악 비평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데이트를 재밌게 하고, 집에 와서, 데이트 비평을 적는 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바람을 쐬고 난 다음에는, 다만 그것이 바람으로 저 멀리, 끝까지 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드라마 비평, 주택 비평, 의상 비평하는 것들은, 최소한의 옷자락을 잡는 행위인 것이다. 오직 문학만이 비평이 있고, 더욱이 훌륭한 문학만이 비평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비평을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문학만이 가격을 형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가격으로, 우리는 휴대폰을 사고, 백화점 물품을 사고, 티비, 냉장고, 그리고 자동차를 사는 것이다. 그것은 국제적 형성이다. 우리들의 인격의 형성은, 그것의 그림자의 반사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훌륭한 인격이, 마땅한 자동차 그림자를 획득했을 때의, 대취타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듯이, 일반인들인 경우에는 그것들이 서로 상보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나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는가? 그러니까 관심의 심장이었는가? 그것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나에게 관심의 소비와 같았다. 나는 가난했고, 그와 같은 데에 소비할 돈이 없었다. 만일 내게 일천 원이 있었다면, 아직도 전체를 다 듣지 못했던, 바하의 또 다른 테이프 앨범을 구입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고등학교 때에, 내게는 과분한 미모의 여학생이 나타나, 국사학과에 지망을 하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했다면, 나는 노력해서, 과는 이미 정해놓고, 보다 알아주는 대학으로 지망하여 합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심은 핵심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국사는, 관심이 없었다. 엄격히 말하면, 내게 이미 국사는 정리되어 있었고, 그와 같은 피라미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영화 멀티플리시티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함수를 통해서, 나는 나의 분신을 국사학과에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세계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선악을 중심으로 한, 고려 청자, 조선 백자의 존재론적 사유가 아니면, 모두가 거짓이었고, 처음에는 다소 기쁨이 있지만, 쾌락이 있지만, 낙원으로부터 도리어 추방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와 같은 바벨탑의 분산과 같은 일이 과연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러니까, 정말 할 말이 따로 없으나, 그렇다는 것이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는데, 시합 초반이 아니고, 한 두 회 정도 남겨져 있고, 그러나 우리 팀이 지고 있는 경우에, 나는 세상 슬픔을 모두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잘 보이지 않는데, 어두워서 더 잘 보이지 않았다. 얼른 타자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도리어 안타를 맞고, 실점 위기까지 있었던 것이다. 우리 팀 타자들은 점수를 낼 기회가 없었다. 마지막 회인데도, 안타를 맞았다 싶으면,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다른 야수들도, 가슴이 먹먹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잘 몰랐을 심리의, 깊은, 한 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국문학과에 가고 싶고, 국사학과에 가고 싶었어도, 사도 바울의 편지가 항상 보통의 숫자를 넘어섰고, 키를 넘어섰고,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음악이 나를 언제나 그대로 있게 했으며, 프리드리히 헤겔의 책이 내게는 소설 같았고, 다소 투정과 트집의 기운이 있는 가운데 비치는 예수님의 말씀 같았던 것이다. 그렇지 못한 내가 있었다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내가 있었다면, 국사학과에 가고, 국문학과에 가고, 사도세자가 되고, 때로는 연산군을 문제적이다면서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차별은 엄격하고, 엄청나고, 신체의 생김새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비극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김윤아 같은 여학생이 나타나, 국문과에 가자 하고, 그랬다면, 바울과 바하와 헤겔은 관심으로 놓고, 국문학과나 국사학과를 전공으로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나무의 껍질처럼, 그것의 역린처럼, 아래로 천천히 흐르는 송진처럼, 그럴 일이 없는 것이다. 나의 눈에는 국사학과와 국문학과는 나의 조국, 나의 나라를 퇴보시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가 도리어 사탄을 찬양하는 수학을 갖고 있듯이, 그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문학이라는 것은, 그 나라를 오히려 퇴보시키는 수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모두 익힌 후에, 모두 잠든 후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

 

 

사탄이 갑자기 나타난 연산군을 행여 자기 나라 수족, 혹은 직계 존속, 배다른 민족, 그렇게 여길 수 있었다는 것이 의아한 것이다. 젊어서 싸가지 없는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은 동서고금소총을 막론하고 늘 있어 왔던 것이지만, 천국과 지옥이 오직 우리에게는 그것의 기미와 가요로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은 것이, 지옥과 사탄의, 그들 존재의 기미를 엿보게끔 하게 하는 것이다. 주자학 다음으로 양명학이 있었는데,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맑고 고요한 정신이 그것의 핵심과 함께 하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맑고 고요한 정신을 보다 강조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음악적 질서 같은 것일 수 있고, 다만 맑고 고요한 것이 아니라, 음악적 진행과 그것의 우리 마음의 결과가, 그리고 언어적 현상이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관심의 소비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어째서 세상에는 천사가 있고, 신학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일까? 어째서 세상에는 사탄이 있고, 그들의 잘난 유식이 있고, 소비적 섹스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에게 과연 후자를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일까?

 

 

민족주의는 늘 사탄의 편에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처음부터 현명하지 않고, 차선적인데다가, 가슴은 따뜻하고, 직접적인 이념은 있으나, 논쟁적이지 않고, 결정적일 때 또한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응급적인 것을 하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적인 것을 하나, 그것의 결과가 늘 국문학적이듯이, 그와 같은 논리로써, 그들이 국문학적인 것을 하고, 마땅한 작가의 논문을 쓴다고 하면, 금방 소비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언어의 분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 문학이나, 애니메이션, 망가, 그리고 여하한 수필들에 감동이나 영향을 받았던 것은, 영화 같은 것에, 그들의 분산이 매우 섬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섬세하지 못한 분산 같은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남진이나 나훈아, 남진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정신현상학적인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영턱스 클럽처럼, 너무 많이 꺾다 보면, 어린아이들도, 자칫하면 영원히 분산될 것 같은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에의 자유는 없으나, 분산에의 자유는 있는 것이다. 일산, 분당, 마산, 그런 것들을 가리켜 우리가 분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연산군은 늘 우리에게 있는 아이들로 분산되고, 사도세자는 안에서 못을 박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안에서 사람이 부르면, 옆에서들, 버선발로 뛰어와, 이 버선 일이고 하는........

 

 

처음에 영국에 한국 사람들이 갔을 때, 일상의 말을 하는 것이 마치 노래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부러 그런 것이다고 생각해서, 수차례 학생들을 불렀는데, 마치 잔잔한 대학로 오페라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그렇게 부드러웠다고 한다. 스포츠를 하면, 목이 쉬고 아무래도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는데, 스포츠를 하면, 그것의 기쁨과 영향에서인지, 라틴어와 영어까지도 닭이 아침에 꼬꼬댁하는 소리를 내나, 한국 사람들은,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그렇게 평생의 백작 같고, 공작 같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자세한 사정도 모르고, 주자학도 하고, 양명학도 하고 했던 것일 수 있다. 신체가 불분명한, 차분한 말씨의 최종 사탄은 있을 수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