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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나의 독일과 아리아 민족

by 마음대로다 2021. 6. 2.

나의 독일과 아리아 민족

 

 

 

 

 

 

 

 

 

 

우리가 하토야마의 독도는 한국 땅 트윗을, 다만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본인들에게 파급되는 정수를 보듯이, 그와 같은 정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수학을 잘하였는가? 나는 미분을 잘하고, 적분을 잘하였는가? 나는 탄젠트, 그런 것을 잘했는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살인자가,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가족들은 살인자와 같다. 아파트의 건강한 입주민과 나이 많은 수위 아저씨는 가족과 같다. 그러나 그들 간에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논리가 너무나 약하기 때문이다. 가족끼리는 수박을 나눠먹는 사이이며, 유난히 같은 종류의 선물을 많이 받는 경우, 가난한 아파트 촌에서는 없는 일이긴 하지만, 조금만 부유해도, 열 개의 선물 중에서 한 개 정도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수위 아저씨에게 전해지는 일이, 옛날에는 간혹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능히 가능한 우리들, 가을의, 명절의 분위기일 것이다. 수학의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가 살인사건을 부단히 상기시키려고 노력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인과의 관계가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은, 그리고 좋은 관계는, 정수와 같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그런 뻔한 가로수, 정원, 아파트, 구해줘 홈즈, 그런 것들 사이에서 죽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신문들을 보면, 그런 것들이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플러스가 되는 경우, 그 사람의 칼럼을 어떻게든 읽으려고 한다. 그와 같은 문명은, 하토야마와 같고, 모든 사람의 독도는, 모든 사람의 일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청수사는 일본의 것이고, 일본의 아톰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에이브이도 그렇다. 일본의 에이브이도, 일본의 에이브이이지, 한국에서 성적으로 넘치는 사람이 일본으로 플로티누스 넘쳐서 이뤄진 가격 형성이 아닌 것이다. 정수는 책과 같고, 정수는 서점과 같고, 정수는 성기와 같고, 정수는 음악과 같다. 지금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미얀마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방정식의 세계인 것이고, 정수 연산의 세계인 것이다. 어째서 서울대 시험은 그렇게 비상한 문제 풀이로, 사탄마저도 혀를 내두르는 것이 있으나, 겨우 정수들을 연결하는 에세이 하나, 지금까지 한 사람도 그 인격이, 하토야마, 탄생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 대부분은, 일본에 가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말할 사람, 신천지 신도나 교회가 아닌가? 김형욱도 그렇다. 갑자기 청와대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사태는 장기화되고 있었고, 아무리 텔레파티, 노력해도, 청와대로 신체 이동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와 같았고, 전화상으로, 전혀 다른 사람끼리도 겨우 연결되는 경우에는, 정말 필요한 몇 가지만, 묻고 답하고 하는 식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학생들, 시민들, 성난 시민들의 시위는 시위였고, 그 시위자의 한 사람이었고, 업무는, 국가적 이런저런 비상사태는 사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형욱이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갑자기 국회의원들의 조인트를 까기 시작하더니, 국회의원들이 그런 것을 너무 싫어해서, 갑자기 김형욱이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한 대로, 갑자기 보지가 가스 터빈 엔진이 되어서, 미국으로 갈 수가 있었고, 회고록을 쓰네마네 하니까, 드디어 청와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이라는 것은, 김대중이나, 김영삼처럼, 회고록도 없던, 그런 허수아비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얀마 사태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갑자기, 태공조에 의해서, 허수아비가 꼽히는 것이고, 그들은 늘 시키는 대로, 탄압하고, 움직이고, 때로는 탄압하고, 때로는 지금 나의 이 글의, 한화 이글스, 혹은 쓰쓰그, 패턴이나 템포처럼, 온갖 기사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서포 김영랑의 시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내용은 없지만, 그래도 나날이 성실한 신문 기사들을 좋아하는가? 묻는다면, 전자에도 영혼이 있지만, 후자에도 나름 도시의 풍경이 있는 것이다. 그런 도시주의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일본 사람들은 도시바라 하기도 했고, 도시안바라고 하기도 했다. 지능과 정수가 거기에서 맴돌고, 돈이 있어서, 좋은 호텔의 로비에서도 뭔가, 일본말로 난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수를 좋아하고, 정수의 미학을 사랑하는 것은, 그러나 그것이 큼직큼직하고, 선명하여서가 아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소수의 측면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크기에서는, 사실 사탄의 입장을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정말 어떤 사람 크기의 눈이 열 개, 손이 다섯 개, 발이 여섯 개인 것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다가, 군경대와 시민들에 의해서 저지가 되고, 살해가 되고, 그것들이 여기저기에서 영화처럼 그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수가 만나는 최고의 풍경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없는 정수의 풍경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남녀의 사랑이고, 예술의 사랑이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선지국 같은 소피의 사랑인 것이다.

 

우리가 일본 프로그램들을 보다보면, 문 손잡이가 선지인줄 알았는데, 구두굽 같은 것이, 한번 입으로 베어 먹어 보니, 초콜렛이더라는, 그런 기상천외하고 재밌는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 나치가 가리켜, 유럽은 아리아 민족이라고 한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우리는 그들 사탄의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면서, 동시에 이런저런 큼직한 선지가 있는 것들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우리 인간은 숱한 대화들 속에서, 싸가지 없는 소녀들의, 처녀 임신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정수와 같으나, 사탄이 여자들을 싸고 돌기 때문에, 반드시 그 처음의 도덕적인 정수는 흐지부지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럽 예술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도식적인, 그냥 하고 싶었던 단어, 그런 것들의 궤도가 좋지만, 우리가 우리들의 영혼과 성실만 잃지 않는다면, 그들끼리의 내용은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를 그렇게 열심히 찍었지만, 화이트, 레드, 블루, 자기들끼리도 재생산이 되지 않고, 그냥 한국 영화가 되는 것이다. 나쁜 피도 그렇다. 레오까락스. 그것들끼리 백혈병에 걸릴 것 같은 부조와, 건축, 뭐가 뭔지 모르는 그림들의 천국들을 오가다가, 정신을 차리다 보면, 금세 한석규의 사진관에서 더위를 달래고 있는, 다림이의 속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 헤겔의 말처럼, 개념끼리 서로 알아서 운동할 수 없는 것일까? 정수의 처음과 같은 성기,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에서는, 그것의 성기, 성스러운 기운이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것처럼, 서울의 종묘, 종로에서의 종묘에서는, 오직 하나의 정수가 그렇게 드러나 있는 것처럼, 이순신 장군상에서는 기가 막히게 그것의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처럼,

 

 

세종대왕은......

 

 

우리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도 없이, 이황이나, 이이, 사임당 신씨를 돈의 그림으로 삼았던 것처럼

 

 

오직 나와 동일시가 되어 있는 이순신 장군상만이, 조용히 단에서 걸어내려와, 건물들과 자동차들, 가로수들, 가로수길, 사람들 사이를 걷는 것이다. 만일 자동차와 생각의 진행이 경쟁을 한다면, 사람들은 생각을 내놓고, 뇌를 점점 내놓고, 경영빌, 영업, 카탈로그, 신차, 외제차, 콜로라도, 점점 내놓고, 주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태극의 모습처럼 하모니가 보기 좋지만, 나중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표현처럼, 우리의 신체가 달라붙게 되고, 음악을 틀어놓고 주행할 때만, 인간 존재의 웨이브적 성격처럼, 넷플릭스 공포 영화를 피해 달아나면서,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면서, 극복하고, 이겨내려고 한다면, 신문지적인 진행도 고급스럽지만, 그것까지도 마침내 나의 글 앞에서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면, 정말이지, 참으로, 디도의 탄식처럼, 이런저런 트롯 프로그램들이 만연했던 것을 노래방 화면 배경으로 삼아, 이와 같은 생각만이 우리의 고통스러운 골치에 진행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내가 글을 하나 쓰면, 그 즉시 수많은 부적절한 연결을 시도한다. 사탄은 늘 새로운 공기, 새로운 피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탄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처음에는, 마치 학교의 풍경처럼, 몇 개의 정수였다. 우리가 백 개의 정수를 갖고 있다면, 천을 넘어가면, 그것은 군부대시절 말고, 별로 여행가 본 적 없는 태백산맥이 되는 것이고, 백 개의 것을 우리가 갖고 있다, 산정한다면, 사탄은 처음 그 몇 개의 정수인 것이다. 소비적인 섹스가 가장 사탄의 정수, 그것의 입문과도 같다. 전쟁은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이자, 처음, 근원인 것일 것이다. 그것과 거의 비교급이 될 정도로, 위력이 산더미 같은 것이, 소비적인 섹스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전쟁과 같다면, 소비적인 섹스는 울릉도와 독도 같은 것이다. 제주도는 그 내면적인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관점에서는, 차마 볼 수가 없는 것인 것이다. 서울은 서재에서 섹스하는 것 같고, 도서관 화장실에서 참지 못하고 섹스하는 것 같은 것이다. 디도의 탄식은 여러 군데에 있고, 그것의 오랜 전통이 있는 수녀원은 눈물겨운 것이다.

 

막상 영주에 가서도, 태양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탄이 정수 모든 것을 가져가는, 극단적인 섬망 상태에 인간은 도달할 수가 있다.

 

충청도 출신 존만한 박헌영이 대구에서, 남로당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여자들을 옷 벗기고 했던 것이 그것의 서양 회화적인 극치가 아닌가 한다.

 

 

그것의 모든 동작들은, 기계와 같고, 아무런 깊이가 없고, 정수의 표시적이고 단순한 메카니즘이기 때문이다.

 

 

*

 

 

히틀러가, 그런 것들을 모두 꿰뚫어 보았던 외계인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의 정수가, 영국의 자부심이나, 아이덴더티가, 터무니없이, 영국인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질 수 있는 사탄의 정수를 보았던 것일 수 있다. 가족들이 처음의 가장 행복한 정수라고 한다면, 가족들끼리 싸우는 것은 일상다방사가 아니겠는가? 누구 하나가 차를 훔치고, 전기를 훔치고, 레볼루셔니스트가 되면, 더더욱 가관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결과가 아니고, 영문학이 처음 상대해야 했던, 진흙적인 태초였던 것이다. 그것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자기의 시간 선물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내가 군대에 갔을 때, 나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하루하루가 눈이 붓고, 얼굴이 붓고, 사람들이 그런 내 사진을 보고는, 원래 그런 얼굴인 줄 알았다고 내게 말하는 것으로써나 살았다. 상병이 되니까, 얼굴이 잘생겨 보인다는 것이었다.

 

퍼셀의 슬픈 노래들을 듣다 보면, 그런 것이 유럽에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인데, 그렇게 독일 나치의 그림과도 어울린다.

 

우리는 분명 먹을 것과 마실 것, 춉스틱스, 트로트 민족이기도 하지만, 판소리, 그러니까 아리아의 민족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무기가 바이러스만큼 많다가, 그리고 정수 몇 개를 갖고 진행하다가, 절정의 사탄의 자리에서 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