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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학생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by 마음대로다 2021. 7. 12.

학생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슈베르트 음악, 세레나데를 듣다 보면, 학생이 거기에 있는 것 같다. 학생은, 자연은, 이영애가 옛날에 자연은, 그것이 아파트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음료수 이름이었는지, 그런 의미와, 어감으로, 학생은. 우리들의 조사가, 금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학생금. 자연금. 우리가 대학을 방문해서 학생회관을 찾는 것도, 가장 저렴한 식당이 거기에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 혹시. 여기 학생회관이 어디에 있나요? 그것을 우리가 서울이나, 워싱턴, 그런 데에서 찾지 않는다. 터미널에서 내려서, 혹은 공항에서 내려서, 안내데스크도 안내를 받아 가서, 혹시 가까운 학생회관이나 학생식당을 묻지 않지 않는가? 우리가 수많은 식당을 가도, 유독 학생식당을 좋아하는 것은, 가난한 학생도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끼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난히 콩나물국이 맛있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김칫국처럼 끓여도,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기호학자, 김치수라는 분이 있었는데, 우리가 읽어야지 읽어야지, 심지어 사놓은 책들이라는 것은, 서울의 미방문 빌딩들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떠들어보고, 런닝맨처럼 뛰어다녀보고, 어떤 짐작이 가는 학생이라는 신분은, 자의식은, 그것의 깊은 증거는, 병점에서 저녁 늦게 버스에서 내려서, 또다시 학교 앞 자취방까지 걸어가는 기나긴, 낭만주의의 길처럼, 낭만적이고, 최백호,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학생으로 신분상승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신대학교는 인서울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분이 정해지면, 사탄이 찾아오고, 자주, 왜냐하면 천사의 현재적인 이름이, 마치 리틀엔젤스 합창단처럼, 학생이기 때문에, 그러다가 마침내 타락천사가 되기도 하지만, 신분이 정해지면, 비교적 죽을 때까지 가기 때문이다. 누구나 학생이면, 우리는 학생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과격한 주장은 비교적 싫은 편이다. 우리가, 할머니가, 길을 가다가, 우리를 불러세울 때, 학생, 그리고 총각 하는데,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학생 하고 부르지 않은가? 그 학생 하는 소리에, 읽지 않는 빌딩 높은 곳에서, 피사체처럼, 사피나처럼, 시험지가 뿌려지지 않으면, 그는 진정한 학생이 아닌 것이다. 누구나 학생이고, 나이가 어리면 학생이며, 심지어는 학교를 다지 않고 있어도, 휴학을 하고, 유학을 준비 중이고, 아파서 쉬고 있어도, 그는 학생인 것이다. 여학생도 학생인 것이다. 학생은, 학생금이라는 말이 이상한 것처럼, 학생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에 다니면 학생인 것인가? 그런 철학적인, 철저한, 철문 같은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이란 말에서, 짓눌린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다. 직장을 구하면, 짓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비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자발적인 세상의 프레스, 그러니까 신문 기사를 신뢰하지 않고, 자발적인 세상의 프레스, 디프레션, 나의 글에서 신뢰를 느끼는 것은, 나의 글을 신뢰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학생이 있는 것일까? 그것의 템포가, 하늘과 같고, 그와 같은 세상은 우주와 같으며, 그와 같은 세상은 철학을 공부하기 이전의 철학적인 삶 같은 것이다. 때로는 성경보다 학교가 더욱 매력적일 때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저해하는 것은, 덜 이해하는 것은, 학교에서의 삶이, 질서가, 성경의 질서보다 나아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서울대는 서울대에 없고, 서울은 서울에 없고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학식을 먹다 보면, 저렴하게 잘먹었다, 돈을 아껴 또한 김치수 그런 기호학적 인문학 책을 하나 구입할 수 있겠거니 한다. 그러나 막상, 막삼, 읽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인 것인가? 얼마나 책을 사놓고만 읽지 못하는가? 뭣하러 성경보다도 못한 신학서적을 사는가? 뭣하러 성경보다 못한 철학서적을 사는가? 뭣하러 성경보다 못한 문학서적을 사는가? 실패의 연속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에는 경험하지 못한다. 아직은 철학적인 잘못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선택의 깊은 자아, 선택의 성리학적 대숲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기미는 엿볼 수 있다. 기미 상궁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이오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의 절대적인 집단의식이나, 통계,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의 장애, 혹은 실패를 하지 않았다는, 같은 조선, 한 민족의 사람이라는, 일 것이라는 소망 때문인 것이다. 얼마나 소망이 극심하면, 우리나라에 소망 교회가 있겠는가? 얼마나 사랑이 극심하면, 사랑의 교회가 있겠는가?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지만, 서울대학교도, 건국대학교도 있는 판에, 서로가 서로를 위하면서 많이들 없다 보면, 그 이전의 미약한 상관의 관계가 도리어 위로와 승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학생이 돈을 가져서, 책을 사지 않는다는 것만큼 비극적인 것이 없다. 책은 원래, 사놓고 읽지 않는 것이다. 빌딩을 하나 구입했다고 해서, 빌딩을 부탁해서 청소하지, 청소하러 다니지 않지 않는가? 인테리어를 설계하고, 직접 시공하지는 않지 않는가? 바라 보고, 지나치고, 서로 인사하고, 햇빛에 노출하고, 일년삼백육십오일을 함께 지내고, 첫눈이 오면, 옛날 가난한, 낮은 천장의, 나무 틀을 가진 반투명 유리창을 열고, 눈이 온다고 소리치면, 구입한 책은, 구입된 책은,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물끄러미 그를 올려보지 않는가? 그런 것인 것이다. 책은 원래, 만물의 척도인 것이다. 책은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그와 같은 빌딩, 도시의 풍경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우리 사는 사회는 비상벨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식당은. 그래서 약간은 중고등학교 분위기가 나는 학생식당에서, 혼자서, 밥을 먹다 보면, 기쁨이 있고, 잔잔한, 슬픔도 있는 것이다. 

 

 

*

 

 

중학교에 진학해서, 처음에는 공부가 더러 되는 것 같더니, 그렇게 수학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곱셈을 몇 번이고 했는지 모른다. 눈도 갑자기 나빠져서, 몸도 아프고, 별로 그런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눈이 많이 빨갛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입장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 안경을 맞췄는데, 내 누나는 멋져보이려고 안경을 맞춘다고,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내게는 한 십 퍼센트는 의미가 있어서, 그래서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아예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나만 안경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들 안경을 맞췄다. 학생이란 신분은, 그렇게 초등학교 육학년에서만, 폭발처럼, 섬광처럼, 번쩍하고, 번개 치는 것처럼 코스모폴리탄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에는 이민자가 있었고, 초등학교 때에는 나윤미, 중학교 때에는 손정애가 있었고, 고등학교 때에는 김현정, 윤소정, 성미향 등이 있었다.

 

대학교 때에는 열 손 가락으로 셀 수가 없었다.

 

항상 지하철 일호선 도서관에서는 책을 읽었다. 사람들과 읽었고, 서서 자기도 했고, 사람들과 음악을 듣고, 군포에서 내리는 사람, 안양에서 내리는 사람, 화서에서 내리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같은 대학을 다니는 여학생들을 무수하게 바라보고, 쳐다보고, 너무 여학생 생각만 하지 않기로 하자고, 얼마나 다짐하였는지 모른다. 수원역은 나를 위해 있었고, 계단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검은 석탄이 건너에 있었는데, 석탄차가 내리기도 하고, 싣기도 했었다.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다. 나는 정복하고, 나는 내용을 알아보지 않으면, 읽지 않았다. 그래서 그 대승적인 기쁨을, 하루라도 빨리, 한시라도 늦추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모른다. 일반학과 학생들은 힘들어했다. 항상 술을 마셨고, 기쁨만을 취하였다. 자부심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의 목소리가, 어디 지하 벙커에서부터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도 들렸겠구나 지금은 생각이 된다. 하지만 하루만 지나면, 그와 같은 안전가옥은 모든 이의 모나드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고, 책이 인간에게 주는 위협을 극복하는, 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승혁적인 관점에서 그랬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아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있는 지식을 좋아하고, 권하는 것 같은 것. 사랑에 지식이 섞이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같은 것.

 

그렇다고 보면, 할머니가 나이 어린 사람들을 가리켜 학생이라고 부르는 신분에서 내가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쓰고자 했고, 군대를 다녀와서, 내가 하고자 하면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눈이 내리고 있으면, 나는 나의 학생 신분이 너무 높아서,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도, 어째서 나를 합격시키지 않는 것인지, 세속 권력적 측면으로 보면, 좀체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구분하지 않고 사랑하는 학생이라는 신분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원래 학생이라는 우물과, 어린 시절에는, 하늘에서 비만 내려도 눈물이 흐르게 되어 있는데, 학생들의 절반을 이과로 가두고, 특성을 강요하다 보니, 그들은 요오드나, 에피소드, 아밀라아제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대 학생이 세상에 가장 자랑스럽고, 자부심이 대단하겠다 싶다. 하지만 학생 운동권 이슈는 있어도, 그런 철학적인, 철문적인 자부심은 당연히 없는 것인 것이다. 누군가 시험을 보는데, 볼 때마다 답안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부심이 없지 않겠는가? 지식은 우리와 거리를 가지고 있다. 만물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른 대학 대학생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학생 둘이 서로 사귀면서, 한 사람이 교수가 되고, 한 사람이 학생이 되어 불륜적인 사랑을 저지르고, 지식으로 약간 정신 나간 것처럼 남자가, 혹은 여자가 연기를 해야, 그제야 자기들이 조금 학생이구나, 높은 지위의 인간이구나, 곧 나이가 들어, 나이 때문에 이 지위가 사라질 것인데, 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지하철 일호선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고, 수많은 왕복 사이에서, 어느 날은 수원역에 오후 즈음 도착할 무렵, 옛날처럼, 사람이 몇 명 없는 사이로, 일반인과 내가, 읽던 책을 가방에 넣으면서 서로 인사를 나눌 수가 있겠는가?

 

다른 대학이고

 

신사고

 

숙녀고

 

 

 

숙녀와는 인사를 나눌 수 없었다.......

 

수원역 앞에 모텔들이 그렇게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용기가 있대도

우리는 서로 침묵해야 했다.......

 

 

 

여대생이 일제 강점기에는 약간의 어감이 있었다는데, 남대생도 보면 초역사적으로다가 그런 것이다.

 

 

 

금방 지워질......

 

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