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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글쓰기는 어째서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by 마음대로다 2021. 7. 2.

글쓰기는 어째서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한글 창제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이뤄지지 않았던 것일까? 한글 창제는, 옛날에 창제라는 이름이 더러 있었는데, 김창제, 박창제, 이창제, 어째서 우리에게 이뤄지고, 중국이나, 절강성, 박강성, 일본에서는, 후쿠오카, 이뤄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한글이 한국인의 피와 같아서 그랬던 것일까? 그러니 세종 대왕은, 어느 날, 의료진과 궁녀들을 불러, 헌혈하면서, 그 피를 잠깐 옮겨 받아, 종이 위에 뿌리고는, 그것이 한글이다 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글이라는 뜨거운 피가 흐른다. 그것은 열사의 땅, 아라비아, 노래처럼, 창세 이래로 숱하게 죽어간 민간 장병을 기리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짐승이 되어서도, 새가 되어서도, 고린도전서의 기록처럼,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을 똑같이, 일차 대전, 이차 대전, 코리안 워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글은 영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는 긴급한 위기 속에 살고 있다. 전쟁의 삼대요소가 무엇인가? 무기. 철. 그리고 스탈린, 유관순, 김일성이 아닌가? 그것들이 모두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자가 짬뽕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지나가는 뱀의 얼굴을 보고, 저것이 사람으로는 누구일지 알아맞힐 수가 있는가? 인터넷에서 보고, 이것은 아무개다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얼굴을 알아맞힌다는 것은, 사실 뱀의 얼굴을, 내게 똑바로 보게 하고, 혓바닥을 낼름낼름거리게 하고, 모국어를 말하게 하고, 몇 시간을 생각한 다음에, 알아맞히는 것과 같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의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옆에 뱀이 있다는, 숲을 보는 안목, 거시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미시적인 것까지, 맞힌다는 것은, 만일 거기서 흥분하고, 전쟁의 삼대 요소를 마저 채우는, 양명학적으로 마저 채우는 짓을, 그런 것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게스홧, 그런 추측은 도리어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흑백 티비로,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다부동 전투가 저기 있고, 그곳이 저기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리고 백마고지. 그것이 우리들 앞 산에 있는 것처럼 상상이 되고, 그려졌었다. 상상인. 그리고 인간은 늘 서로 싸운다고도 생각했었다. 우리의 마음은 따뜻하고, 그렇게 자연처럼, 전쟁도 하나의 정물화처럼, 풍경화처럼, 자탄풍처럼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와 함께 걸으면서, 처음으로 형이상학적 대계를 맛보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를 보고, 비평을 기다리는, 스스로 시도해보는, 절대적인 문예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보니, 처음으로, 그들 양차 대전의 모습이, 기이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단계는 여러 가지이다. 북한에서, 맑스주의 사상이 발간되었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주체사상은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있다면, 당연히 그것은 전쟁의 부속 같은 것이다. 정치인들의 발언이, 전쟁의 부속 같은 것이 있고, 나를 닮고자 하는 것이 있고, 전쟁의 위기와 서스펜스를 어떻게든, 나를 흉내 내어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이 있다. 물론 나를 흉내 내면서, 도리어 전쟁의 위기와, 뇌의 정지상태를 도모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물결, 들숨과 날름 같은 것은, 짐승으로나마 나를 보고자 하고, 마침내 주자의 분명한 생각에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한글이 아니다. 그것의 대본 같은 것은 충분히 한글이다. 네 이년. 진실을 말하지 못하겠느냐? 그것을 대본으로 읽고, 연기를 연습한다고 하면, 그 대본에 쓰여진 글씨는 분명 한글인 것이다. 유. 비치. 걸. 와이 돈츄. 그것은 이미 한글이 아닌 것이다. 한글은 피와 같다고 했다. 그것은 뜨거운 것이라고 했다. 우리 입에 철썩 달라붙은 그 뜨거운 피가, 한글인 것이지, 번역을 하면, 전처리가 되어서, 이미 기성 상품 같고, 국제 상품 같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영화 산업, 드라마 산업, 일본 에이브이 산업이 공동적으로다가, 한글을 갖고 있다면, 그것과 헤어지면서,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본격적인 한글을 구할 수 있겠는가?

 

관우가, 차를 한 잔 남겨 두고, 전쟁에 나갔는데, 돌아와 보니, 찻잔에 먼지만 자욱하긴 하나,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었다. 중국은 크고, 생각보다 인이 없고, 딱딱한 괴석의 정물화 같을 때가 많다.

 

그대로 남겨 두고 다시 한번 참전하나, 이제는 그 찻잔이 아내의 얼굴처럼 그리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화적 기법으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부분 샷으로 이어가면서, 동작들을 통해 누구인지를 추측하게 하면, 그 사람이 다시금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사람들이 여기겠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겠는가?

 

아마도 다른 사람일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면, 내 집 거실에 찻잔이 그대로 있을 것이야. 처음에는, 돌아가, 먼지를 물에 씻고, 다시 차를 끓여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 이 몸이 되니,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대신 돌아가, 그것으로 차를 한 잔 먹게나. 자네 옷에 묻어가서, 혼자 살았지만, 내 그리운 집을 다시 한번 보고 싶네 그려. /그러니 다른 사람인 것이다.....

 

한글은 그러나, 시집 같은 것으로 국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종대왕 자신도, 의료진과 궁녀들을 불러놓고, 한글을 창제하고, 시연하기는 하였으나, 넓은 뜻을 가진 글을 따로 썼던 것처럼, 분명 산문적인 풍요가 있는 것이다. 시를 모두 모아서, 산문처럼 길게 읽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집을 간다고 하지, 시시콜콜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시집살이와 시시콜콜은 차이가 있으나, 오랜만에 찾아가는 산사의 산문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한글은 철학적 산문에서 드러난다. 그럴 것으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왕수인이, 한국의 한글, 조선의 한글을 보고, 그렇게 화답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은 한글을 창제만 했지, 지금까지 그만한 철학적 담론, 혹은 화담, 저술을 편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퇴계와 양명의 대립이 여기서 극명해진다 하겠다. 퇴계는 사탄을 알고 있었다. 사탄이란, 시시콜콜한 생각의, 도덕적 주장의, 탑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이 없고, 선선함이 없으며, 조선의 맑은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을 수도 있고, 저것이 맞을 수도 있는, 그와 같은 스페이스가 없는 것이다. 집에서는 아이들을 잡아먹고, 밖에 나가서는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탄의 정신상태인 것이다. 분열이 되어 있으면, 사탄일 수도 있고, 사탄이 아닐 수도 있다. 퇴계는 조선의 초기에서, 사탄을 알고 있었다. 자기 이름 자체가, 사계, 퇴사, 사탄퇴계, 그런 어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예민했고, 평생을 고민했으며, 그래서 자신은 할 수 없으나, 다른 사람보다는 분명하고, 확고한,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오랜 고전이 어째서, 한자로만 쓰이고, 그것들로 반복되며, 익숙한 고전이나 기억력 테스트하고, 기억할 때마다 뜻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고민은 어째서 일절 없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새로운 사탄의 탑이 될 위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증거가 바로, 훈민정음 이후로, 반포, 반포대교, 아파트, 이렇다 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지부진한 상태로, 사탄의 오명, 누명, 모함의 가능성에 항상 노출된 채로, 갑신정변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 맹자, 노자, 장자를 비롯한 모든 시황제의 고전이 사탄의 것이고, 열자, 한비자, 마침내, 그리고 퐈이널리, 시황제가 사탄의 원흉인 것인가? 조선의 선비가 나이가 들어, 관직에서도 나오고, 그러면 어렸을 때 수두의 자국이 그대로 있고, 검버섯까지 피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하나마나한 말들의 인용으로 반복되고, 장횡하며, 횡거하는 것까지 정확하게 사탄의 속성과 일치하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차라리 일본 열도에 가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그러면 겐지 모노가타리가 기다리고 있고, 파시즘이나, 군국주의, 그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으로 다만 줄을 타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무슨 기사 정신 같은 것을 삼으면, 섬기면, 전쟁의 삼요소가 완벽해지는 것이다. 유관순. 스탈린. 김일성.

일이 차 대전을 보면,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연히 그들의 뇌에서, 뇌가 이탈해서 나오는 것을, 그런 유에프오 현상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전쟁 전에, 다만 군사 퍼레이드 같은 것이면 좋을 수 있다. 성경에서 갑옷을 입자고 했으니, 나도 또한 거절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패션인 것이다.

그리고 인명과천이라는 말처럼, 경복궁 뒷산이 아니라, 과천미술관에서 가까운 앞산, 건넛산을 보다 보면, 너무 징그럽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만 숲으로만 덮여 있으면, 그런 것이 눈에 띠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위산, 악산이라고, 악사, 흰 살과 배가 계속해서 노출되어 있으니, 정리되지 않고,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징그럽게도 보이고, 내가 만일 환난 중에 있었다면, 그것들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처럼도 보였을 것이다. 다미선교회에서 모임을 갖다가, 튀어나와 그것을 보면, 옛날 가난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죽을 듯이 찬송하고, 뭘 먹지도 않고, 뛰쳐나와 그것을 보았다면, 분명 그것이 갈치처럼, 옆으로도 가고, 반대로도 가고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낮과 밤에서처럼, 생체실험이 이뤄지고, 심정적으로는 집단 살인, 추격 살인, 심정적으로는 방화, 강간, 그런 것이 이뤄졌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는, 구스타프 융, 구스타프 융, 노래 가사처럼, 분명 집단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섹스는 사적이고, 자위는 더더욱 혼자서 하는 것이지만, 사회는 자기가 사회적이기 때문에, 늘 그것들의 집단적인 것에, 당근과 채찍, 프리드리히 헤겔의 정신대와, 중국 위완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 갈치는, 목포가 아닌데도, 우리 사는 세상을 매운탕 국가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다면 한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바람을 피운다고 하면, 왕양명처럼, 좋은 음악을 틀고, 여자가 해프닝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시즈닝 뿌리는 것을 좋아하는지, 어쩔 수 없이 여럿이서 관찰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차 대전, 이차 대전 다큐멘터리처럼, 브라질 강가에서, 아나콘다의 공격을 받는 것처럼 기겁하고, 경이로운 일이 되겠는가?

 

다만 주자학과 양명학만 가지고도, 나는 어떠한 글귀도 아는 것이 없고, 심지어는 치양지도, 잘 모르는 것으로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도, 마치 물고기 두 마리처럼, 우리는 배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산문을 멋지게 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나는 주제가 약하다는 것이고, 내용이 산만하다는 것이며, 진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지나치게 생활적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주제가 분명하고, 존재의 언어학적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내용이 똑같이 산만하나, 산문이니까, 그러나 멜로디가 있고, 진행을 예측할 수는 있어도, 사랑이 육체적인 것인지, 아니면 육체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우리말이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까지 좋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뒤늦은 훈민정음의 진짜 반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결국은 한글은 산문이다. 작품이라는 훌륭한 사람을 두고, 주자학적 양명학으로서의 아름다운 비평을 전개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쓰니, 사람들이 비난하였던 것은, 실은 그때까지도 우리들의 훈민정음이 제대로 반포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뒤늦게, 육이오 전쟁 이후로, 비로소, 방송 출판, 대학, 교재, 강사, 그런 것들이 훌륭한 한글의 문화를 영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보면, 서양이 한국 사람들 편을 든 것이, 순전히 사탄이 있다는, 수학적 명징성 때문이었을 것 같은 것이다. 다부동 전투에서, 한국군이 퇴각하려고도 했다는데, 그렇다면, 우리들 군대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인가? 마치 정신병자처럼, 우리가 벌판을 가다 보면, 혼잣말 하는 정신 병자를 한 명씩 만나게 되는데, 상상하고, 상상인, 백선엽 장군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퇴각을 하는 장병들을, 미친 것처럼, 그런 미친 사람처럼 설득하였다고 한다.

 

사탄은 그들의 문화가 매우 강고하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독립적 주체가 많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일이차대전 피의 잔치를 즐겼던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역사를 요약하면, 몇 마디로,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주자를 그렇게 열망했으나, 저녁에는 한글을 한강처럼 쓰고 있는, 서민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그렇게 바랐으나, 다만 여자들만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절이 지나고 있었으나, 세계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만 착하고, 정직하고, 양명학 수준의 단정함만으로도, 그들의 좀비 실험이 너무 강력해서, 그런 세계관의 길고 험난한 지배 아래서, 우리를 사탄이 아닌 최종 존재로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독일 철학자는 몇 명 알고, 그래서 자기들 중 한 명은 철학과에 가는 것이, 아직도 얼마나 선망이요 꿈같은 일이겠는가?

 

비슷한 것이다. 한국의 철학과에는, 양명학 없이도, 이제는 나 때문에, 그럴 듯한 환상을 갖게 되었으나

 

 

독일 사람들이 그들 철학과에 가면,

 

                                                  아직도 아베체대만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