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합종연횡: 어제의 두 敗北을 갖고
일을 하고 너무 피곤해서, 보다 잤는데, 그 때문에 두 패배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숙제가 주어진 것이고, 고등학생이 아닌데, 고등학생 아이템풀이 뒤늦게, 그것도 일요일 오전에 배달된 것일 수 있고, 지금은 못 푸는 것들, 틀이 바뀌어서 잘 모르는 것들, 그것의 풀 같은, 어린이 풀꽃 반지 같은, 아플 때 바르는 약 같은 것들도, 풀들을 가져다가 조심히 짓이기면, 거기서 뭔가 녹색의 것이 나오는데, 그런 아이템풀, 아이템 같은 것, 물약 같은 것, 병약 같은 것, 그러니까 마음껏 전국민적 동일시를 가지다가, 가슴이 아픈 것이고, 삼손의 힘이 빠지는 것 같으며, 모세의 내려진 팔을 뒤늦게 발견한 국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을 모두 통과해서, 그래도 아직도 스포츠를 보는 것이며, 야구는 계속할 수 있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듣고, 누군가의 병영일기는 마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나의 슬픔만 읽어도 슬프고, 나의 앙드레 가뇽 음악만 들어도 슬프고, 나의 글만 읽어도, 반갑고 그렇지만, 슬프고 그런다. 또 누군가 사투리로 그라지에, 그러면, 세계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이다. 미국은 미국이 이겨도 기쁨이 없고, 멕시코는 멕시코가 이겨도 기쁨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표팀이 차라리 인간 같다. 한국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제는 한국에게도 지고, 미국에게도 지는, 그런 절대 다수, 대다수의 유엔 안보리 건빵, 안보리 국가 같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같은, 시루콩나물 학교를 가다가도, 가끔, 그런 학교 안에서도, 비어 있는 공원을 상상하고, 사람 별로 없는 그 공원을 혼자서 돌아다니는 영국 영화를, 엎드려 자다가 꿈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단 하나의 돌을 갖고, 생명 나아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포석하고, 작전하고, 서너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 몹쓸, 일종의 몹씬 같은 돌을 계속 두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에는 신학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신학대학 사람들이 대게 비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국문학과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국문학은, 사람들 먹다 남긴 시래기, 그것을 만들어다가, 겨울날에 잠깐 시래기 된장국을 끓여 먹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철학과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을 두고 누구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사도 없었고, 사탄도 없었다. 신학생이 철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들 그냥 신플라톤주의 같은 이단이라고 여기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사도 바울의 눈꺼풀처럼, 모두 벗겨지고 말았다. 교회에서 기도도 열심히 하고, 사랑의 위선을 제거하기 위해, 철학과 논리학을 연습하고, 멍청한 표현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문학적이며, 문학적 표현이고, 의미의 절대적인 자기 배중률 같은 것을 연습하는 이미 국문학생이 벌써, 있다면 있는 것으로, 없다면 없는 차원에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미대나, 음대를 가는 아이들은, 공부를 할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옛날에도 국문학과를 지망하는 아이들은, 그렇게, 그렇고 그런 표현들을 늘여다가, 자기도 해먹처럼 뛰어들고, 사람들도 끌어주고, 자기가 종이접기를 하다가, 자기가 종이접기, 그렇게, 당하는 것을 꿈꾸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국사학과와 법학과를 지망하는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소머리 국밥 냄새가, 그때부터 났었다. 인간의 지능이 그런 냄새에서도 지속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며, 우리들이 그 거대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군인들처럼 분열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유화 하나를 완성했을 때, 그 어린 학생은,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과 학생은 그것을 인식론적으로 통찰하나, 주체와 대상, 주체와 대상,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같은 말만 할 줄 아는, 자기가 봐도 앵무새 같은 것이다. 문학생들이 얇은 것을 하나 포착하고, 운동선수처럼 나아가나, 운동선수처럼, 지혜자처럼, 기드온의 전사들처럼 나아가나, 이처럼 미국에게도 막히고, 멕시코에게도 막히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사랑하는 책, 한단고기의 동두철액처럼 되지 못하고, 작고 약한 머리이긴 하지만, 좌표상으로 번짐이 없는, 전진 같은 것, 거의가 대게가 되는 것이다. 만일 그 어린 미술인이, 자기의 정물화를 보고 기쁨을 느낀다면, 말로는 백 번도 그릴 수 있는 문학생을 얼마나 좋아하고, 함께 짝하고 싶고, 그 어디든 함께 다니고 싶겠는가? 그것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는 것은 시험 문제로 나오지 않는 협작 안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 하는 사람은 그렇게 신학을 하고 싶고,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한국 축구가 멕시코에게 졌다는 사실은, 내게 어제 너무 피곤해서 보다 잠이 들었던 것처럼, 비밀로 하기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여름에 평상에서 뭘 먹기 좋아하고, 그것을 평생 기억하는 것은, 평상과 평생이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째서 우리나라 안에, 멕시코가 있고, 우리나라 안에 미국이 있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나라 안에 미국이 있다는 소문은 파다했고, 유명했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잉글리쉬를 잘못한다는 말까지도 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든 세계 언어를, 서울에 있는 외국어대학교 학생들처럼 잘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비밀과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안에, 멕시코의 테오티후아칸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멕시코에 테오티후아칸이 있지 않은가? 멕시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대로, 번쩍 하고 날아서, 저녁에 이동하는 것이다. 학생 때에 그와 같은 높이와, 선선함을, 조선함을 느낄 수 있고, 나중에는 그것이 시각적인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옛날을 그리워하고, 책을 그리워하고, 모든 과목에 점수가 나빴어도, 문학 수업 근처에서는 기적처럼 팔십 점을 마크하던 것을, 우리가 우리의 머리에서 꺼내어, 일종의 상소문 휴대폰처럼, 펼쳐볼 수 있는 것처럼. 국문학생들이, 자기들이 우리들의 경찰관과 같은 무궁화라는 것을 모르고, 세계적인 긴장관계 속의, 육본의 투스타, 쓰리스타라는 것을 모르고, 경제학과와 경영학과는 국문학과의 지엽적인 논리를 갖고, 작은 어묵 조각 몇 개가, 매우 큰 양동이 안에서 열 배가 되는 것처럼, 그런 것을 배우는 것인데, 사회학과는 일종의 조작된 사회, 신문방송학과는 도대체 뭘 배우는지 모르는 것 같은, 그런 숱한 유에프오 현상 같은 것이라는 것을, 국문학생들은 도무지, 나타샤 같은 것이나 배우면서, 모르는 것이다. 어째서 그와 같은 현상들이, 개체적으로 반복되고, 집단적으로 또한 반복되는지, 그러니까 축구 선수 한 사람이 분열하면서, 숱한 스포츠 대상들과 씨름하면서, 결국은 지면서, 동두철액이 되지 못하고,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되면서, 그런 시각적인 낙하 현상을 경험하면서, 그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고, 어째서 우리나라에 국문학과가 있고, 멕시코에 테오티후아칸이 있는지 모르는 것인 것이다. 누가 서양의 굵직한 개념들의 피라미드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손에 들면 들 수 있고, 두 사람이 들면 들 수 있는, 그런 동그란 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미국 야구에게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숱한 말을 해도, 숱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도, 번쩍 하고, 축구의 테오티후아칸이 야구 경기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것인 것이다. 국문학도 연습이 있는데, 철학에도 연습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와 같은 구멍에 깊이를 더할수록, 못지않게 연습했던 영어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언어 그 자체에 책임감이 있다면, 미국이 좀 더 낭만적인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쿠폰을, 유엔 보리건빵 이사회에서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미국과도 싸울 수 있는데, 팀을 이루면 반드시 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의 원리를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선배. 졸업하는 거야?”
여자 후배가 갑자기 나타나, 형식적인, 러시아 형식주의적인 문예 사조의 질문을 하면, 그래도 아이보리 색상의 잠바를 입고 있던 선배는 응, 이라는 일본식 햄버거를 그녀에게, 웃음으로 선물해야 했던 것이다. 어디 무슨 회ㅅ.....
그래도 그가 쓰리스타는 되었는데, 교정에는 나뭇잎이 지고, 거기에 멕시코의 흰 눈이 가득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섹스를 하는 이유는, 굉장히 많고, 때로는 이념적이나, 섹스를 하지 않는 이유도, 사실 그것이 그릇된 인과만 같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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