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퓨고어웨이와 오블리비온
우리는 이 퓨마를 입은 적이 없다. 퓨마가 늘 살생유택을 하다가, 한 사람을 사랑해서, 소년이 나이가 차서, 이제는 도시로 돌아가 학업에 힘을 써야 한다니까,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코앞까지 따라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퓨고어웨이는 그런 힘이 있다. 여자들이 레오파드를 입고, 달라붙는 바지를 입기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연결이 연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여자가 농담을 좋아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말 섹스를 할 것 같은 희망도 줘야하지만, 그렇다고 마구마구 섹스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농담은, 창문을 열어놓고, 옛날 홍콩을 질주하던 버스 안에서, 한 사람이 가래가 갑자기 끓어올라, 어느 영화의 장면처럼, 다른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의 샌들 위로 그것을 뱉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자가 그것을 훈계하면서, 그렇게 참을 수 없거든, 창문 밖으로 자기처럼 뱉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다른 여자를 뒤로 태우고 달리던 오토바이 운전자가, 달리는 중에 하품이 나왔는데, 하필 그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처럼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관계라는 것을 상정하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관계라는 것은, 불루라군 같은, 섹스와 같기 때문이다. 자격루도 보면, 그런 것이 엿보인다. 자격루만 보았을 때는 절대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평생을 살고, 젊은 시절을 불쌍히 여기고, 홍콩 코메디 영화도 우리 영화처럼 보고, 그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그랬던 것 같은데, 우리가 자주 보고, 주윤발도, 왕조현도, 우리가 많이 사랑했던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음표를 알 수가 없는, 그것의 리릭을 알 수가 없는, 느무끼뜨빠, 이퓨고어웨이 노래를 듣게 된다면, 자격루의 모습이 달리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구려 벽화에서도 나타난다. 젊은 화랑이 호랑이를, 퓨마를, 잡으려고 한 것인지는 잘 모르는 것인 것이다. 화랑은 국가에도 소속되어 있지만, 화랑이라는 이름처럼, 개별 무사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문자는 깨우친,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바로 그 퓨마가 나타나 그와 함께 싸웠던 것이다. 그것이 남의 나라 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것을 찬양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벽화처럼, 뮤럴, 이퓨고어웨이는 사라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렇게, 한국어처럼 호흡이 짧은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문어체를 버리고, 문어 속에서도, 넉넉한 구어를 쓰기 시작하면, 우리는 지금 나의 글처럼 매우 색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라이크어 홀스. 그것은 말에 재간이 있는, 말이 너무 깊은 사람들이나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민족적이고, 언어적이며, 한국어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범우주적인 퀴즈에 직면해서, 마치 힌트 같은, 기가 막히게, 두껍고, 잘 익은, 큼직한 깍두기가 담겨져 있지만, 설렁탕 집에 있지만, 세계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인 것이다. 다만 깍두기가 맛이 있었는가? 늘 우리는 허름했으나, 항상 배가 고팠고, 돈이 없다 싶으면, 항상 상상으로 그것을 해결하곤 했지만, 안데르센 동화처럼, 정말, 사람이 아름다운 롤스로이스를 탈 때, 그 나라 사람을 부러워하고, 서양 문명과 미국 문명을 함께 부러워했던 것처럼, 감각적 직관처럼, 감깍쩍 직꽌처럼, 우적우적, 사각사각, 먼저 들어간 국밥에 어울려서, 우리는 그렇게 맛있는 국밥을 먹을 때, 우리는 우리들의 미래를 반드시 부러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천재적인 사람들이, 이퓨고어웨이를 들을 때, 그와 같은 신고구려 벽화 안에서, 어떤 한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서양을 모두 아는 것도 아니고, 서양을 모두 돌아다닌 것도 아니지만, 몸이 아파 누워 있는 프랑스 여자 친구가 한 명 있어서, 검은 머리가 아주 멋진 한국 남자가, 며칠 동안을 한국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였다면, 다만 한국 남자의 섹시함 때문에 사랑에 빠지겠는가? 아니면, 음식점이 없는 음식을 이제는 먹을 수 없어서, 오직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사랑에 빠지겠는가? 핏츠제럴드의 문장도, 문장이 짧고 담백한 것이 한국 말을 많이 닮았다. 데이지가 좋아서, 개츠비가 그렇게 젊은 시간을 그녀의 집 근처에서 보냈다는 것이 나오는데, 그것은 개인사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지만, 문화사적이고, 음식문화사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데이지가 아파서, 누군가에게서, 식이요법을 받았는데, 몸이 낫고, 이제는 그 음식 때문에, 몸이 더 아팠다는 것이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남자가 사탄과 싸우는 것처럼, 여자들은 아무래도 대륙과 육체를 담당하는 것이다. 먹을 것을 잘 챙겨 먹는 열정이, 시간이, 자신감과 개성이, 사탄을 물리치는 한 방편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지는 그만, 사랑에 빠져, 사탄에 이를 정도로 정신이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금발의 외국 여자가 한국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려운 경우이지만, 상상이, 외국에서는 그것이 장르를 이룰 정도로 흔한 것인 것이다. 우리가 커피를 좋아하고, 녹차를 사랑하지만, 녹차에 빠진 사람은, 커피와 똑같이 금단 증세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 문학을 좋아하고, 한국 문학은 사랑하는 수준인 것도, 어쩌면 외국 문학을 나의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실감에서일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먹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 치료의 방법이 없는 병은 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뉴욕 사람들이, 뉴저지 사람들이 얼마나.....
이것은 진정 잘 모르는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말 뿐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퓨마의 사랑을, 느무의 사랑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난한 나무 창에 유리가 달리면, 너무나 쉽게 성에가 끼면, 우리는 바닥에 죽은 것처럼 누워 있어야 했는데, 작은 방 안의 상극처럼, 그런 감각의 재미가 있었는데, 우리가 거기에다 하트를 멋있게 그리면, 반드시 우리들의 라디오에서는 퓨마의 사랑이, 느무의 사랑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민족주의적 인간이었어도, 그때는 디제이들은, 사고를 당해 남모르게 몇 번 죽었다 해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방송국에 나아가, 이 놀라운 퓨마의 사랑과 느무의 사랑을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부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것은 그럴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것을 부를 수 있을 단계까지,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고, 자주 들었던 것이다. 외국 사람들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위대한 노래가, 한국 노래가 만들어지고, 관계적인 한국 노래가 만들어지고, 자기들이 아무런 어원도 모른 채, 좋아하고, 눈물 흘리고 했는가고 말이다. 남자들의 노래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서양 문학이 있는지 모른다. 정말 문학을 우리가 시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의 사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라이드 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
그러나, 퓨마의 사랑과, 느무의 사랑이 나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문학과 음악, 주체와 사상, 밤하늘의 별과, 저녁의 가로등 불 빛이 있어야 하는지, 계산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정치인들은 자중하고, 경제인들은 그래도 체면을 구한다. 목사들이 가끔 테두리가 없지만, 우리들에게는 청테이프와 같은 내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군대에서 청테이프를 거의 모든 것에 사용하여서, 총알에 몸이 빵꾸가 나도, 누군가 그렇게 답을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목사들은 일단은 되나, 이단 삼단이 되지 못한 거대한 공백이, 나 하나 청테이프로 겨우 때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홍콩의 호랑이 고약처럼, 일본 한신 타이거즈처럼, 우리는 지금 극단적으로 불가능한 관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영의정이 궁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궁녀는 젊고, 영의정은 아무래도 나이가 있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궁녀는 그리고, 왕의 여자가 아닌가? 시간을 맞춰, 얼굴을 보는 것으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었으면, 성욕은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쌍하고, 짠하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생명 같은 성욕의 참된 불교적 승화가 아닌가 싶다......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일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하니, 얼마나 모순이고, 언어도단이고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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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결혼해 살면서, 평생을 냉장고처럼 지내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충복이 되어서, 여자가 화장만 예쁘게 잘되어도, 그것을 남자도 기뻐해서, 저녁에 이불 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면, 우리가 대학 때에는
대학 때에는
더한 일에도, 가볍게 인사만 하고, 서로 헤어졌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데이트를 하고, 마음이 너무 들었는데, 그래도 다만 미래에 결혼할 것으로 저장만 했지 않은가.........
남녀가 결혼을 했다고, 섹스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평생 교육 같은, 객관적인 대상 같은, 배움의 한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섹스를 또한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렇게, 우리가 학교 교육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정확하게, 완벽하게 성격의 그래프가 일치하는 것 같다......
*
외국말도 그렇다.
그냥.
한국말처럼, 멜로디를 연기하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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