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이란?
최근에 삼국지를 강연한 차이나는 헤라클라스가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은, 나는 죽음에 가까워 왔지만, 맥주와 바나나를 사러 들른 가게에, 조그만 꼬마 여자아이가 먹을 것을 사로 온 것처럼, 시간은 교차하고, 살 사람은 오래 살고, 잘 살고, 때로는 번영하고 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런 노래도 있지 않은가? 일본이 숱한 나라의 일본이 되어서, 속성이 없는, 속이 없는, 그런데 한국 훌륭한 사람을 닮은 것이 비책이고, 엉겁결이고, 내리는 눈이 따뜻한 녹차에 하나 내려 사라지는 것처럼, 운이 좋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일본어도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과정이고, 일본어가 최종이다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호주가 과정이고, 뉴질랜드가 최종이다 말하는 것처럼, 재밌는 비유이고, 신기어린 재치이며, 그것이 하늘에 닿아 있음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 호주는 고래이고, 뉴질랜드는 소래이다 하는 비유도 그렇다. 우리나라가, 결국 뉴질랜드를 닮아, 남북분단을 가져왔다 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정말, 파푸아 뉴우기니, 피지는 일본 땅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중용은. 중용은 이와 같은 화들짝하고, 왁자지껄한 유사 논리의 진행 속에서, 우리 마음의 안식이 되고,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가 되어 준다. 우리가 그와 같은 유학의 시간에, 뭘 맛있게 해 먹으려고 급하게 들어와 뭘 찾는데, 패티가 없는 것이다. 없다는 것은 한국말로 금과 같고, 아무튼 그렇다. 그렇다면, 빵에다가, 어떻게 양배추를 썰어넣어, 커피에다 먹지 않겠는가? 우리의 존재론적 무가 모든 것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중용 또한 모든 것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한정된 그와 같은 장소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맞힐 수가 없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모든 여자 연예인들이 어려운 것들이듯이, 양궁의 활이 그렇게 무겁고, 당기기도 어렵다는 것을, 아이돌 축제에서는 몰랐다가, 이번에 알았지 않은가? 김용옥식의 강의는 환영을 받을 만하고, 우리는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 속의 분위기와 일치하는 것을 잘 놀라지 않는 편인데, 그렇게 사람들의 가난한 정수들을 모아, 하나의 보이지 않는 교회를 만들었으나, 나중에 이런저런 사회적, 혹은 철학적, 유명한 서양 사람들까지 언급한 것을 사람들은 잘 보지 않았지 않은가? 칸트를 붕어빵 할 때부터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김용옥의 동양학 강의는, 우리가 읽지 않는 책을, 우리가 방문하지 않는 우리 친척을 방문하는, 생전약방문의 전형과 이데가 있어서, 우리가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른다. 읽고, 잠시 해석하고, 읽고, 잠시 해석하고 하는 것은, 그래도 누구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질서와 인력 앞에서, 읽고, 해석하고 하는 것은, 처음의 백양사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무등산처럼, 매우 모던하게 살고 싶으나, 백양사의 이상한 봉우리들처럼, 실제로는 이상하게 사는 것이 전부일 수가 있다. 김용옥을 보면, 이의리 같다. 힘을 쓰는 것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하는데, 알아주는 이가 없고, 차원이 다른 사람에게는, 철학은 한 길이고, 매우 협소하여서, 서로에게 짜증이 쉽게 나는데, 이번 어느 성곽 역사 발굴처럼, 결국은 희생양이 되기 쉬운 것이다. 장면 정권도 그렇다. 신익희도 그렇다. 정치는 어느 성곽 역사 발굴처럼, 자기는 최선을 다하지만, 비행기 요도호의 비밀처럼, 사람들 신경에 너무 협소하여서, 넉넉한 대화나, 기다림, 수필적인 편지, 대화 문화가 발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경이 너무 협소하여서, 수필적인 대화가 없는 것이야, 일반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서로 싸우는 자매들을 보라. 남매. 형제들을 보라. 그들은 원래 수필적인 편지, 대화를, 나누기로 약정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도식적인, 혹은 환경적인, 사탄적인 지름길로 가다가 보니, 결국 그것들의 마그네틱에 몸이 달라붙게 되고,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치고 박고 싸우게 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비박이네 친박이네 하는 것도 얼마나 협소한가? 그러다가 차가 나오니, 금세 차박이라고 하지 않은가? 너무 창피하고, 요도호 같고, 오네가이시마쓰, 그래서 차박으로 이슈를, 마음을, 귀를 씻는 것처럼 씻는 것인 것이다. 그것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긴 것이 맞을 것이다.
김용옥이 그들 곁에서, 신과 함께, 중용을 잘 가르치기가 요원하였을 것이다. 중용은 중용을 가르칠 만한, 나무꾼 같은,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이다. 그것의 뜻은, 새로운 피, 젊은 피에게 넘어가고, 나이 든 사람은, 훈장질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가, 일본의 젊은 피에게 침탈을 당하여, 사람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피를 흘렸던 것도, 엄밀히 말하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얼른 지적하기가 어려운, 그런 교육적인 과정이요, 추사 김정희 정권, 박정희 정권의 잘못인 것이다.
한 장면 한 장면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을 돕지 못하고, 다 늙은 여자에게 친박이네 하고, 에이형 텐트를 친다고, 그럴 수 있다고, 비박이네 하였던 것이다.
중용은 얼마든지, 주자는 중으로도 볼 수 있고, 지드레곤, 그러니까 용으로도, 파충류로도 볼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주자의 글을 다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은, 자의식이 깊고, 언제나 사색하며, 생각하고, 여자 친구를 사귀며, 학교 공부에 힘쓰고, 분야에 전문가가 되지만, 늘 그것을 통합하는 자기와, 생활과, 이야기와, 재미나는 세상 같은 글쓰기에 힘쓴다는 것이 바로 그 이름 주자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주희에 이미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주희의 나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째서 김정희는 안 되고, 박정희는 안 되는 것인가? 김정희도 되고, 박정희도 된다. 대신에 김정희가 주자를 모르고, 별로 인용한 것도 없고, 해석의 존재론적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고, 박정희가 자기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을 엄복동에게 넘기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용으로도 볼 수 있다. 말하는 혀가, 맹렬히 타오르는 불과 같고, 눈은 멋지고 근사하게 선글라스도 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는 어려서는 잘 달릴 수 있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기를 쓰고, 정해진 곳이 아니면 똥을 누려고 하지 않으나, 나이가 들면, 오히려 그런 신체적인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남 보지 않는 곳에서 금세 똥을 잘 누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정말이지, 홍콩 장면 정권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인간이 인간을 향해, 그와 같은 블레임, 드레곤이라고 욕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사는 산야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소나무들을 심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성욕을 참으려고 노력하였는가? 그 시간에 한 자라도 배우려고 노력하였는가? 그러나 진액이, 송진이, 결국 땀처럼 흐르고야 말았지 않은가?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행복한 모임에 다녀오고 나면, 마음은 환해지나, 어쩐지 허리 아랫부분이 무거워지고, 그랬던 것이다.
중용을 닮은 소나무는, 동서양 친구의 상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우의 시체와 같다. 전우의 시체를 넘지 않고, 염을 다 한 후에 진격하는 것도 좋은 마음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백 개가 있다면, 백 팔 배를 다 한 후에, 진격하여 승리하는 것도 정말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
백건우는, 김용옥은, 중용을 가르쳤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의 심체를 우리에게 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요절하였는지 모른다.
*
내가 예전에, 주자가 이런 사탄 새끼들, 개 새끼들, 씨발 사탄 새끼들, 겨울날 진도에서 외치면, 그 말이 저 멀리 서양까지 전해져, 왜냐하면 사람들은 공기와 발성에도 권위가 없어서, 그 말을 듣고, 대답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한국어는 오래되었는지 모른다. 아무런 권위가 없는 문자와, 그것들로 이루어진 철학, 사람들이 무슨 세상을 이끌어가겠는가? 우리는 적당한 압력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고, 딱 적당한 발성과 선택적인 흡음 같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탄은 권력의 핵심이요, 할트오브 다크니스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겉모습은 단순하고 속으로는 사탄 같은 이가 나섰을 것이나, 나중에는 말의 권위에 복종해서, 급하게 새까맣게 된 사람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중용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었다.
사탄에게도 사회가 없겠는가?
사탄에게도 사랑이 없고
사각이 없겠는가?
하루에 한 명도 죽이지 않으면, 중국은 그렇게
비약적으로 인구가 폭증하였는데,
어째서 유럽과 아프리카는 인구수가 그저 그런지
알 수가 없다. 항상 알 수가 없다.
사탄을 뱀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하지만 대게의 소크라테스 같은 선생들은, 학생들 앞에서, 교재를 떠나 과장하기 일쑤이다. 아이들은 과장 안에 들어가고, 과장 속에서 똑똑해진다. 나는 그와 같은 서양이 기독교를 갖고 있고, 찬송가를 합창으로 부르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부르고 할 때 그렇게, 멋지고, 귀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불규칙한 형태와 색의 배열이, 그와 같은 음색에까지는 이르기에는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해야 할 것이다. 너에게 나도 보내고, 아담이 눈 뜰 때, 그들도 반드시 그와 같은 근사한 이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정확하면, 그들의 빈틈을 간과하게 된다.
야고보서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
과학적인 비전을 준다.
사람들은 성경이 베드로서로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아서, 천년이 지나, 베드로서를 받고 나서, 얼마나 그들이 환호하였는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그런 박수부대의 집단무의식이 있다. 과거에, 야고보서가 또한 몇 십년을 지내고 나니까, 짧고 어색하였던 것이다. 마음이 강산처럼 변하고, 뭔가 끝내주는 서신이 있을까 사람들은 소망하였다. 점점 바울과 바알의 밀웜 관계가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놈의 볼케이노 같은 히브리서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 담담한 베드로서를 가져왔을 때, 서양의 박수부대 사회는, 떠나는, 마침내 그 쓴 이를 가상으로 내세워도, 자기들이 잘난 척 하면서 죽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뭔가 입에 착 달라붙는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배드는 나쁜, 그리고 베드는 침대, 그런 것이고, 예수님의 수제자가 다름 아닌 베드로가 아닌가 하였다.
그들의 뱀에 대한 열정은,
임금에게만 용포를 입히는 우리들의 습관과 비슷하게
베드로서 재발견과 같은 자연은
정말 영원하고
불쌍한 것만 같다.......
포유류는 사탄의 사회에서는 그나마 젓이라도 먹이지
발전된 파충류는 청상아리 같은 것도
몇 번에 걸쳐 다 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인간이었다고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사탄들은
늘 권력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동물원 같은 권좌에서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쇼머스트고온.......
어째서 인간은 요한계시록에 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그와 같은 도시 건축에 맞춰진 한국어가 아니겠는가?
어쩐지 나는 계시라는, 레블레이션, 말이
늘 이상하다 여겼었다. 아포칼립스 같은 것들도
어딘지 모르게 인기 없는, 홍콩 장면, 액션 스쿨 같았었다.......
중용에서 멈출 수 없는
그런 멋진 중국 학자들이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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