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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우리는 예전에 교회에 오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by 마음대로다 2021. 9. 26.

우리는 예전에 교회에 오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것은 내가 전남대학교를 가지 않는 이유와 같다 하겠다. 전남대학교는 내가 고등학교 때에 너무나 많이 갔었다. 그리고 내 둘째 누나가 옷을 끌고 다니던 곳이었다. 돈을 들여, 시간을 들여, 또 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의 코끼리가 마음에 들고, 그것의 언덕이 마음에 들며, 시위, 그리고 그것의 책들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운 후문. 그것의 플라타너스. 사람은 태어나, 전남대학교 플라타너스와 통신하면서, 하늘 나라로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어째 영화관이 없다 했으나, 나중에는 생겼고, 여기에도, 저기에도, 도리어, 영화관 없었을 때의 영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나의 무의식적 실책을, 실점을 조금 부끄러워했었다. 책방은 쐐기 문자와 같다. 책방이 없을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책방이 없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책방은, 각종 입시 준비, 문제들로, 문제집들로, 느릿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서양의 오래된 성가 합창곡들을 코랄이라고 한다. 원래는 숲이고, 원래는 대지이나, 학교 건물이나, 위치가 바뀌고, 성장의 사탄적 변화의 수가 끼어들게 되면, 금세 산호가 되고, 물고기가 되고 그런다. 내가 만일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의 시간을 살았다면, 한신대에서의 십 년을 코랄로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만일, 지금까지의 철학적 인간에 실패했다면, 서울대가 수족관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나, 사뭇 진지하게, 마지못해 억지로, 성공하게 되었으니, 서울대학교는 다시금 코랄이 되고, 음표가 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고, 편집증이 되고, 공동의 목표가 되고, 공동의 우물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어도, 지금까지 알고는 있었어도, 비씨씨튜드, 정확하게 어떤 한계가 있고, 우리들의 뇌기능과 어떠한 코랄 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너무 과도한 민족적 기능, 운명, 임무 같은 것을 지우지 않으니,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차분하게 되었고, 소박하고, 수박하며, 수더분한, 돈 많은 집의, 앞으로 돈이 많을 집의, 졸업해도 취직은 못할 몇몇이 될 사람들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시위

 

그것을 버리고, 늘 다시 입는다.

 

 

우리가 차를 타고, 그것이 아반떼 엔이 되었든, 캐스퍼가 되었든, 목적과 과정이 아닌, 순전 자기만의 시간으로, 자기만의 질주를 하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무슨 호스텔 같은 것이나, 호캉스, 콘도, 그런 것들이 그렇게, 눈물 나는 학교 건물 같고, 기숙사 같고 그렇기 때문이다. 코랄은 거기서도 흐른다. 우리가 딱딱한, 윤기나는, 기능적으로 아주 훌륭한 차를 타고 질주를 하면, 거북이에게 기생하는 상어들처럼, 코랄이 따라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태어났다가, 학교에서 기억에도 없는 시간에 죽고, 다시금 직장과 가족의 관계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말들이 유난하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모든 작가는 저마다의 특수한 주제들을 갖고 있고, 그것을 평생의 주제로, 내용으로 삼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몇 개의 시기로 나누기도 한다. 나는 그런 것이다 싶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얼마나 천사와 같았는지 아는 이가, 동시에 얼마 없진 않지만, 아주 없진 않을 것이 아닌가? 우리가 미시령을 지나다가, 돌아보면, 미시령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학교에서 그렇게 줄어들어있는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옆에 또한 골프장이 있다. 학교 다닐 때, 우리는 골프를 하루에, 다섯 개도 치고, 여섯 개도 치고 했었다. 지금은, 한번 치고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모른다. 골프공을 한번 칠 때,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시집을 하나 읽을 때, 그것을 잊는 방편으로 그러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어둠은 우리를 보고 웃고, 다시금 사나운 음식이나 영화나 보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와 같은 때에, 코랄은 질서와 같고, 우리나라의 지명과 같으며, 그것을 이정표 삼아 올려볼 때, 매 순간 그런 알 수 없는 합창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천국을 아주 어렸을 때는 그렇게 가고 싶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내가 국가에, 쓸쓸하고 가난한 나라에, 뭐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었다.

 

김밥 천국을, 배고픈 중에, 가난한 중에 먹을 때마다

우리는 차분해졌고, 생각이 차분해졌고, 실질 이성을 훈련하는 것 같았으며,

그러나 동시에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한양대학교에 가서, 강촌으로 오티를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그런 몇몇 안되는 학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김밥 천국을 많이 먹은 다음에는, 다만 한번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한양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이다. 학교 존재의 삼대 요소가 무엇인가? 학교 식당. 학생처장. 그리고 학생들이 아닌가? 한양대학교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영 주유소처럼, 학교 안까지 지하철이 지난다. 어쩌면 지하철이라는 금반지에, 다이아몬드처럼, 건국대학교, 그렇게 있는 것 같은 것이다. 나는 그 계단을 오를 때, 적지 않은 튱격을 받았었다. 제일 웃기고, 짜증이 났던 것이, 서울대학교 정문 역에서, 서울대학교 정문까지 걸어갈 때였다. 수많은 스쿨버스 차량들이 지나면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좋았다. 그런 야트막한 언덕 선 같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암산 선점 같은 곳에서, 사대대 선점 같은 곳에서, 경험하던 것이었다. 일종의 넓은 산길적인 모래톱과 같아서, 회전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부터 끝나는 곳까지, 막혀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개나리만 잔뜩 피어 있어서, 우습기도 했고, 독립 영화를 찍는 것 같기도 했다. 학교 존재의 삼대 요소는, 코랄적인, 지속적인 슬픔처럼, 안정적인, 불안정적인 진행처럼, 늘 우리가 시험의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이것저것에다 학생인 것이다. 처음에는 교수가 교주나 괴수처럼 신기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처럼 교수와 함께 말하고자 하나, 교수들은 막상, 막삼, 실제로는 그런 아카데믹한 콜로키얼리즘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그 모든 운명들을 모두 살아본 것처럼, 한양대학교에서 나와서, 바로 전철을 타고, 영화적인 점프 기법을 이용하면서, 한효주와 함께, 둘만 강촌으로 오티를 가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 명이 더 붙는다고 해도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이라는 것을, 그렇게 연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념이, 결코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우리가 젊어서 교수가 되는 사람들을 천국처럼 만나볼 수 있는데, 그것의 의미는 두 가지가 아니겠는가? 하나는 이념이 현실에 맞는다는 것이고, 수학적 기법, 과학적 사실, 실효적 지배, 물고기 아파트 같은 전경, 다른 하나는 이념이 현실에 맞을 수가 없지만, 사람들이 기가 빠지거나, 실의에 젖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나이가 들어, 육십이 되어도, 그처럼 한양대학교 삼국사기 국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하는 대신, 독일로,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해도, 철학적 신념과, 한국어 발표 논문과, 한신대학교 신학과 대학원 졸업적 사실을, 그들이 가치를 높이 사서, 문학적 음악학과로서의 바하의 코랄 연구, 혹은 코랄 합창단 활동을 하는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간극을, 마치 아름다운, 산란하는 기차의 빛과 그림자들처럼 경험하기 때문이다. 구체성은 끝없이 상실한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과정은, 그와 같은 산길의 모래톱처럼,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사탄이 우리를, 목적을, 발견케 한다.

 

모나드는 창이 없고, 사탄에게도 창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셈소나이트 여행 가방을 보면, 머리 부분이 있고, 아닌 부분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도 이것이 머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학교가 머리이나, 졸업해서 살아가면, 언제든지 학교는 지나온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학교를 머리로 삼는 사람은, 학교 이기주의, 혹은 학생처장의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그와 같은 때가 밀리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울을 살아가는,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국룰이다. 이럴 때 한번 써먹는.......

 

경상도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순간 학교를 입학하며, 졸업하게 된다.

그와 같은 사투리, 히스토리성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닮음과 차이가, 세계 시민들에게도, 많은 것을 선물할 것이다. 하지만 북경어와 광둥어의 차이를 우리가 높이 여기지 않는 것처럼, 광주와 경주의 차이가 갖는 코랄적인 진행을, 빛과 그림자를, 삶과 죽음을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국어와 영국어가 갖는 차이를 우리가 너무나 빨리, 궁금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뉴욕만 뉴욕만, 요크셔테리어처럼 늘게 되어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민족 간의 친목 대사 같은, 제인 오스틴을 말 그대로 죄인처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매우 닮았지만, 둘의 만남을 섹스처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빽빽한 것이다. 영국 문학은 거대하나, 그들에게도 해가지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자칫하면 우리 한화인들에게도 시간이 없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삼국사기로 오리엔테이션을 십년 넘게, 북한의 군역 기간처럼, 훈련을 받고 침투한 외국 간첩들은, 전라도 사람들이 대학에서 경상도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것을 보고, 대장에 있던 똥이 위를 가로질러, 입 밖으로 토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옛날에는 경상도에서는 해태껌은 팔지도 않았었다. 정말 그랬고, 그들 상호 지역에서 다른 사투리를 쓰면 살벌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저녁에 기숙사 방배정을 받고, 셋이서 치맥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교수님이 학생 성적을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유난히, 박정희 정권의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적이 좋으면, 그러니까 발표를 잘하면, 말 그대로 성적을 듬뿍 받는 것이었다. 우리가 원래, 반대적인 속성을, 자기를 만회하기 위해서 더욱 선망하는 기질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전라남도 보성의, 참다운,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간첩은 전라도 편에 있지도 않고, 가난하고, 경상도 편에 있지도 않았다. 전라도가 서울과 광주를 갖고 있다면, 경상도는 대구와 부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두려움과 노예에 절여 있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아주 소금 기운처럼, 처절하게 인지가 되는 것이다. 전라도 사람의 편에 서 있다 싶으면, 기숙사의 삼 학년 남자가, 군 제대를 하고, 데이트를 하러, 가볍게 기숙사 휴게실에 간다 싶으면, 여자가 아주 애교 남발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경상도의 억양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입술을 그렇게 잡고 흔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군 특수부대에 들어가고, 전라도 후임병이 작전 지역에 아직 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경상남도 청도 출신 간부는 자원자 몇 명과 재투입이 되고, 운이 좋지 않아, 탈출 중에 죽게 된다.

 

간첩이 그렇게 우는 것을 보고, 다만 애군심이 너무 깊어서, 그런 것인가 보다 사람들은 여겼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그런 간첩의 도움을 받고 읽게 되면,

 

사뭇 다르게 읽혀진다.

 

*

 

세계 이차대전도, 이차대전이 끝난 뒤에, 문화가 그렇게 우리들의 상처치료처럼 발달하게 된 것도, 삼국사기의 세계 한국인들이 조작해서, 병 주고 약 주고, 한 것으로 만들려는, 그런 작당이 있었던 것도 같다.

 

사람이 늙어서도, 영어가 줄지 않고, 다만 학교의 삼대 요소 중에 하나인 상태에서, 복지와 인정이 차고 넘치는 교수 수준으로다가 그것이 늘게 되면,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앞뒤로 하나 차가 없는 도로를 질주하면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영화가 끝이 나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천국은,

 

자연적인 죽음에는 어둡고, 사탄의 악행에는 눈이 밝은, 그런 사람들의 것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