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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우리는 무엇인가? 불가살......

by 마음대로다 2021. 12. 20.

우리는 무엇인가? 불가살......

 

 

 

 

 

 

 

 

 

 

 

클래식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신문을 읽다가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자기 팀이 이길 때가 아닌가? 자기에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고,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그와 같은 문학적인 문제를 풀어본 적이 없으나, 갑자기 병이 나시고, 병원에 다녀오시고, 그러면 아직 대학 진학 전의 남학생이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둘이 함께, 한화 이글스가 이길 때면,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등단의 소식이, 합격의 소식이, 세상의 모든 복음이, 다음 날 신문에 나오지 않겠는가? 그것을 영화적인 연속으로 보지는 않는다. 아직 그와 같은 연결까지는 우리는 가지 못하며, 가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학문이고, 학과이며, 아카데미이다. 대학에 가지 않았어도, 도리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우리는 대학보다 더욱 큰 달을 보고 사는 것일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모든 것이 연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 성경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 우리의 이념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악에게 대항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그와 같은 계층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니, 연결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문학적인 반성은, 어려운 것이고, 시도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단편적인 지식으로 살고, 단편 소설로 살며, 단편 소설도, 우리들의 단편적인 면을 지적하는 것으로 산다. 가끔, 하늘 높이, 한화 이글스처럼 날면, 우리는 그것이 당분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과 연결되어 산다. 별로 친하지 않는 반 친구들과, 마신 적도 없는 술을, 마시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친구들과, 대학에 가서, 그렇게 술 한 잔 하자고 해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웃고 지낼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의 패턴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친구들에게 제법 문학적이고 차분하다는 평을 듣는 그 학생이 그만, 국문학과에 가고 만 것이다. 우리들은 대학에 가서도, 아직 정리되지 못한 지식들로 산다. 요즘에는 인기 학과 수강 신청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그런 것이 별로 없었다. 다들 인기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다고 하면, 강의실을 큰 것으로 하고, 강의실을 큰 것으로 해도 사람들이 많다고 하면, 강당 같은 크기의 강의실을 내주기도 했었다. 그러니, 신청을 했는데, 수강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가? 애써 수강신청까지 했는데, 가르치는 사람의 도가 자기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면. 어떤 오래된 이의 노래에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면서 들어온다고 했지만, 그것이 도가 아닐지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가르치는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질서가 되고, 양식이 되며, 기억이 되고, 한 학기의 보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인기 과목이고, 수 많은 사람들이, 스테이크 냄새를 풍기면서 자리를 뜨고, 이런 표현들, 왠지 다 할 것 같지만, 하지 못하는 백색의 점들, 혼자 남아서는 형식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슬픔이다. 슬픔이라는 말의 어원은 점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슬이 점인데, 슬픔은 원래 점으로 끝나지 않아서, 픔이라는 조사나 어미 성격의 단어가 붙은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빨리 발음할 수도 있고, 천천히 둘이 다른 것처럼 발음할 수도 있다. 애플을 우리가 발음을 잘 못하는 것은, 외국 사람들이 원래, 한국 사람들처럼 바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피라미드가 그렇게 바르고 아름다운 것은, 무슨무슨 골든 어떤 것을 갖는 것은, 우리들의 발음이, 바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양은 그것이 되지 않는다. 한글을 늦게 창제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한자를 보고, 바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내가 슈퍼맨의 그 가슴에 쓰인 에스가, 슬픔이라고 했던 것처럼, 전무후무하게 해석했던 것처럼, 그것은 별은 그대 가슴에, 그런 노래나 드라마 제목이 있었듯이, 선셋 도로를 지나는 재미 동포 사람들은 누구나 가졌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 코를 가지고, 스테이크 냄새를 풍기면서, 그것을 더욱 진하게 풍기면서 자리를 뜨고 나면, 냄새가 사라지고, 다만 뭘 먹어서, 뭘 해서 고국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보이드니스, 다만 비어 있는 곳의 청량함이, 처량함이, 고국 같아서, 고국에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어린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최종 최후의 것 말고는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슬픔이라는 것. 그것의 지하철적인 연속 같은 것. 국문학은 다른 아이들보다 신학적인 데가 있다. 사회학은 신학적이지 않다. 사회학은 신난 것들을 좋아한다.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 국문학은, 서울대생들도, 입학하면, 영어와 멀어지는 특권이나, 어떤 학생 자율권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일반 학과들은, 서양의 지배나, 영어적인 지배에 늘 굴종해야 한다. 그러나 국문학은, 마치, 하이데거의 철학처럼, 문만 열면 죽음이 넘실거린다. 그것은 과장되고, 시마과장, 마음이 상습적으로 아픈 것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슈퍼맨이 가슴에 슬픔이라고 말하고 쓴 것은, 일반학과 사람들은 사실 캐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저녁 늦게 야구를 하다가, 공을 친구 비싼 글러브로 한번 잡아보고, 국문학생들은 늘 돈이 없고, 돈이 없는 책의 계단을 걷기 때문에, 안 읽는 책을 사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그날 렌트한 것 같은 것으로다가, 공을 잡고, 한번 운동장에 구르고 나면, 나이스 캐치, 그런 소리가 마치 천지창조처럼 들리는 법이다. 문학적으로 중요한데, 상을 주지 않으면, 신상필벌, 존재가 사라지고, 문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는데, 허구한날 자기들끼리 상을 주면, 상의 가치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의 사회학적 용어는 몰라도, 오기는, 어쩌면 남의 것 같은데,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죽고, 문학과를 지망해서, 공부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량진에서 맛있는 것 먹고, 취직을 준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국문학과생들이 많고, 그것이 꼭 인서울 어떤 현대 더 서울 현대마냥, 그런 것이 아니어도 괜찮은 준재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원대학교도 있고, 경북대학교, 전북대학교, 전남대학교, 우석대학교. 우석대학교는 한번 써보고 싶었다. 그렇게 차를 타고 지나면. 아무튼, 우리는 공산당처럼, 동무, 동무는 공부를 그렇게 학과적으로다가 잘하면서, 어찌하여 취직 전쟁에 골몰하는 것이요? 학과가 공부고 투쟁인 것을 모르시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단순한 자아가, 존재가, 통나무가, 인간의 전부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방황의 권리도 있고, 금지된 것을 욕망할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남자이고, 그것이 도시남녀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어서, 처음에 잠깐 사귀고, 계급 때문에 헤어졌던 남녀가, 사회에서 여자가 너무 예뻐져서 모르고 다시 만나, 결혼한다는 미담 사례 같은, 분명 돌아오기도 하는 것인 것이다. 만화책은 국문학 책과 달라서, 순전 괴물들이 나오고, 호야 같은 역경의 배경만 나오고, 뭔가 신천지의 세상을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질이 떨어지는 것이고, 질만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기도 한 것이다. 고려대. 그런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책에서 만났던 나뭇가지들을 만나고, 숲을 만나고, 잎들의 그림들을 만나면, 괴물들은 빠져나가고, 불가살의 화면처럼, 그런 것만 눈에 띄지 않겠는가? 우리가 어렵게, 그 일학년 이학년, 수많은 스테이크 냄새들과 싸우면서, 정원 초과의 강의실에서 만원버스에 올라타듯이 배웠던 것이, 시몬 베드로의 새벽처럼, 떠오를 때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을 때, 학원 강의 시작하기 전에, 계단에서 시간 기다리다가 읽다 보면, 그 햇볕에 자기가 불가살에 인신공양을 하는 부락 사람들에게 붙잡혀, 불길 바로 앞에 던져지기도 하는 것이다. 만화는 사나운 것이고, 만화는 대법원적인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우리들의 그런 대법원적인 느낌이 없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된 것의 경험에서 나온 것일 수 있고, 다만 범주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에 의해 머리가 짓눌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짓눌린 사람들은 그런 호떡같은 사람들을 서로 잘 알아본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와 같은 때에 무관심의 실수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국문학을 버리고, 취직을 하려는 사람들은 불가살을 섬기는 부락 사람들에게 생포되어, 인신공양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대법원적인 것이다. 눈물이 터져 나오고, 기억이 나고, 그래도 선명했던 문예 비평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을 모으면, 좋은 것들만 모으면, 우리나라도 분명 제법 괜찮은 문학과 국가일 것이나, 다만 말하는 사람만 따라가거나, 권력만을 추구한다면, 반드시 불가살에게 인신공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어린 스님들이 진리를 추구한다면서, 두꺼운 바위에 자기 몸을 던져 수련했던 시간을 생각해 본다면, 그보다는 이성적인 논문들의 편린들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그와 같은 원시의 공황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어린 사병들이, 뽀빠이 이상용과 함께, 추운 날에 우정의 무대를 하면서, 어머니가 확실하다고 확신한 것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처럼 타락하고, 비리비리하고, 유약하며, 과거사가 없고, 현대사도 없으며, 학문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역사도 없는 나라요 민족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끝없이 침탈을 당하고, 일제가 아니더라도, 유혹이 한이 없을지라도, 다만 순수 단일학과 국문학생이 공부를 한국에서만 해도, 삼성반도체보다 깊이가 있고, 정확한 무한수의 논문을 써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과도 같은 연결은, 오늘도 한강을 지나는 지하철의 학생들이 가지기 요원하고, 때로는 어리고 단순해 보이겠지만, 그와 같은 이들이 한 세 번의 죽음이 있어,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나면, 나의 말이 칼과도 같을 것이다. 내가 일 년 전에, 영원한 학교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서로의 높낮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목으로, 내용 중에 영원한 초나라라고 한 것이 있다. 나는 쓰면서, 그 예술적인 표현 기법을 하나 낭비하면서, 이것이 과연 레토릭인가 하는, 그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다만 그것만 가지고도, 소설은 마치 살아있는 하늘 같았다. 그것은 학교에 정원이나 조경이 있다는 것인가? 사람들이 밤낮으로 찾아와, 그 사실만을 확인하고 갈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우리 옛날 영화 초우를 연상시켰다. 연상만 시키고, 다른 특별한 내용으로는 그런 것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역세권

 

 

 

서울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죽을 것 같은 경험이다. 그 유능했던 국문학생이 겨우 괴물 만화나 보면서, 불가살에게 인신공양이 되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제는 광양에서 내가 새로 쓴 소설들에게서도, 그것의 해법이나 접점이 없음으로 인해서, 그것의 관심과 의식이 죽을 때까지, 하염없이 눈이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자는 것이 가장 좋다. 젊은 사람들에게서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서는, 스테이크 냄새가 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서는,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서는, 냄새가 많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쁜 여배우가 어린 아들과 함께

우리 옛날 같은 역경들을 모두 이겨내고

 

어딘가에서는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