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이란 무엇인가?
고요의 바다를 중간까지 보다 말았는데, 계속 보다 보면 병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요의 바다병. 그것은 쓸쓸하고, 그것은 백색이며, 그것은 러브 바이러스 같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러브하게 지내다 보면, 러브가 반발심으로, 아랍 사람 발심, 그것이 생기고, 사람이 안 문학하게 지내면, 그것의 반발심으로, 문학이 생긴다고들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그런 믿음이 생겼다. 옛날에는 문학을 잘하려면, 영문학을 하는 것이 좋고, 유학까지 다녀오면 금상첨화요, 금의환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올리버 트위스트가 방영이 되지 않더니, 홈 언론, 하지만 그것도, 조선일보, 중앙일보도 사라지게 되었다. 뭔가 세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아이엠에프. 정말 죽자고 덤빈 것들이 아닌가? 세계의 아이엠에프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어떤 여자 유튜브는 세상에 스피박이 있었다, 그런 이상한 책을 사람들에게, 죽자고 덤비는 것들에게 알려주곤 했는데, 다른 여자 사상가인가? 그것들은 아이엠에프의 나라가 어떻게, 뭐 어떻게 넷플릭스 국경 없는 드라마 의사회의 중심국가, 상임이사회, 그런 것들의 메인 엠씨를 계속 붙잡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문학을 하고자 하면, 국문학도 하고, 영문학도 어깨너머로 공부하고, 그러면 좋을 것 같고, 중문학, 일문학도, 세계 모든 문학을 아끼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이상한 아이엠에프가 끝나고, 이상한 여성 철학자들이 주자의 피를 마시면서, 우후죽순처럼 자랄 것 같더니, 그렇지 못하고, 급한 급경사로 사그라드는 느낌이 있다. 경제와 철학 모두가. 고요의 바다는, 그들이 죽기 전에, 우리에게 전하는 어떤 것들을 우리가, 별로 받고 있지 않다는, 그러한 고요의 바다 같은 느낌을 준다. 매트릭스를 우리에게 준다고 해도, 우리가 별로 받고 있지 않는다는 느낌인 것이다. 꼭 선화공주가 서동왕자에게 그것을 가지고 왔는데, 서동왕자에게, 그런 매트릭스적인 사유가, 내용이 없는, 본보기가 없는 이론과 형식이, 불필요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선화공주가 그것을 왜 가지고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한 값지고, 귀중한, 그런 것들은, 아직도 매트릭스는 재밌고, 눈에 선하고 그렇지 않은가? 한국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 서양 추수 감사절처럼, 그렇게 그들 세계에 추구적이다. 하지만 모든 관심은 이기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했듯이, 그것은 세계 여행을 가는데, 다만 먹기 여행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다짐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재미없는 드라마의 만나와 메추라기 여행을 하면서, 그래도 인기를 끌고, 재미가 있고, 서양과 일본의 삼당 합당 같은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음악들을 하면서, 우리끼리 재밌고, 진실하고, 여배우 이름도 그렇고, 최화정, 예쁜 얼굴의 학생이, 좁은 광주 시내 여기저기서 눈에 띤다 하면, 얼굴은 얼굴로 보고, 최화정의 목소리는 목소리대로 듣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광주는 방림동도 있었다. 주월동도 있었고, 있고, 무진중학교도 있다. 어떻게 그처럼, 모든 잎에, 볏잎에, 이삭에, 이슬들이 가득 매달려 있는지 모른다. 모습은 가난한 지방 중심도시이고, 사람들도, 사치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내 친구가, 집이 별로 부자이지 않은데, 영어 공부도 할 겸, 미국으로, 캐나다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하면, 그것이 부러움의 대상이기보다는, 나는 그런, 아무튼, 그제야, 비로소 티비에서 보이는, 비닐봉지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한다는 것을, 고요의 바다,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데, 신학대학교를 가지 않으면, 그 시간은, 그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다 무엇인지 답해줄 만한 도승지는 우리나라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말을 쓰지 않는 사람이 답해줄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자칫하면, 그 모든 인격이 사라질 것 같은 아이엠에프인 것이다. 아름다운 리처드 클레이더만 무슨 씨아이에이, 앨범을 듣는다, 다들 그렇게 주옥같고, 옥주현 같고 그렇다. 에프비아이보다는 씨아이에이가 옛날보다 약간 더 똑똑해 보였다. 그런 인상은, 막연하고, 어떤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같다. 우리가 아버지, 아버지, 소나무를 붙잡고, 흔들면서 기도했던 것은, 어쩌면, 바로 그것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기독교 권력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고, 믿고, 기도하고, 공부하였다면, 당연히 신학대학에 가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그것은 슬프고, 그것은 매질 같고, 그것은 형식 같고 그렇다. 최형식. 박형식. 김형식. 우리나라 모든 형식들이 모여, 어느 서울 거대한 운동장에 모여, 노홍철이 오엑스 간단한 문제를 내주면, 그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친목을 다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어두워지고, 그러면 먹을 것을 나누고, 먹고, 때로는 진지한 문제도 풀고, 때로는 패자부활전도 하고, 때로는 남녀가 눈을 맞기도 할 것이다. 때리는데, 여자 형식이, 남자 형식의 눈을 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대학원에 간다는 것은, 드디어 국문학의 젖을 뗐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에 간다는 것은, 드디어 국문학의 딱딱한 음식을 먹을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학과 학부만을 다닌다는 것은, 세계 수준의 사탄의 영화들이, 먹잇감들 앞에서, 그 정도의 아포칼립스 나우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형상은 형상대로, 아는 것이 없고, 읽기는 단순한 반복적 학습의 연속으로만 나아간다면, 어느 누가 사지 선다를 하다가, 오지 탐험을 하다가, 에세이가 가능하고, 에세이 속에서 육성이 가능하며, 시험을 풀다가 도리어 유희열이 가능하다고 하겠는가? 사지 선다만을 초조함 속에, 일제의 침략과 학대 속에, 연습한 사람은, 그것의 습관을 고치는 데만, 대학 사 년이 필요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요의 바다의 발해 기지와 같은 집에 도착해서,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편모 편부가 있다는 것도 아니며, 귀여운 여동생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자주 찾아오는 친척들이 없다는 것도 아닌데, 사탄이 오호담당제처럼 그렇게 분포가 되어 있다는 베드 뉴스를 접한 다음에는, 그것의 영향으로도 충분히 우리들의 사적인 집은 고요의 바다 발해 기지와 같아지는 것이다. 사탄의 걱정이 심해지면, 도리어 사탄의 영화로 그것들을 해결하는 해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보면, 영원한 사탄의 바다에 빠지는 것이다.
고요의 바다는 비평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나마 굿뉴스이다. 누군가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좋은 짓을 하면, 그것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 아닌지, 그것을 막는 차원에서도 굿을 해야 하는 것인가 묻기도 하였는데, 좋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정말 굿한 것이다. 고요의 바다는, 그것을 다만 소년이 라디오 방송으로 듣기만 하여도,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소년이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세상은, 그런 고요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생기고, 알고, 책임질만한 지식이 생길 때만이, 무말랭이 같은, 허무, 만화영화가 물리쳐지고, 다소 시끄럽다는 인지의 이항적인 센스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시끄럽고, 뜻을 모르는, 그런 깊은 클래식 음악들은, 수용자 비평의 차원에서도, 고요의 바다인 셈이다. 그리고 반드시 고요의 바다가 된다. 지금의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모두가, 학부 수준의 사탄의 지배에 있는 것인지, 아이엠에프 이후로 계속되고 있는 얼토당토 않는 참견들의 연속인지, 아니면 독립적인 국문학 세력의 준동인지, 야합의 제스처인지, 세계 고통의 주자와의 눈물겨운 연결인지, 아니면 주자를 어느 때는 능가하는, 주자의 친구와 같은, 그늘과 높이, 그런 진정 반가움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그런 존재자들인지, 하는 것의 평가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고요의 바다는, 그 모든 아이엠에프, 그런 존나 물 같은 참견들의 연속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삼당 야합과 같은 전통도 갖고 있다. 그런데, 처음의 몇 시간은, 정말, 왕조현의 영어 이름이 조이 왕인데, 그런 이조 시대의 지능적 한계를 돌파하는 매력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다. 중국이 만들면, 늘 아이엠에프에게 깨지는데, 나의 소설을 앞세워서, 나도 모르게 그들 경기장에 침투한 다음에는, 가드를 올리고, 링을 넓게 돌면서, 새로운 이물질을 만드는 데까지 성공하는 것이었다. 물에 대한 전통도, 기본도, 고고미술학적인 생각도 없는, 단순한 삼당 합당 수준이 것이었지만, 그런 것은 미국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동차 유튜브를 보면서, 신차가 나올 때마다 얼마나 환호하였는가? 그 처음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새로운 장르의 영화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얼굴을 닮은, 공현주를 닮은, 유튜버의 속초 여행을 마지막으로, 그 모든 영화 시대가 사라지고 말았다. 재산을 가지면, 그렇게 사물 분리적인 지능과 지식과, 생명 존중의 시대를 살게 되는 것이다. 얄짤이 없고, 그 거대한, 사소한 캐즘 사이로, 무수한 인간 존중의 드라마들이 끼어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상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과, 우리의 고요의 바다에서 만나는 실체는, 그렇게 차이가 심각한 것이다. 영화가 비평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꼭 나의 것이 아니더라도, 한국어적인 품과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었다. 나는 병에 걸릴 것 같았고, 나는, 그 고요의 바다와 같은 서울, 어느 혼자 잘 사는 오피스텔에 들어가서,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신체이탈자, 유체, 영화를 보았는데
많은 위로가 되었다.....
해병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영화의 몇몇 장면이, 어떤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물고기에게는 없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너무 세계를 아이엠에프로만 몰아가지 않기로 하자.
지능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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