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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진학의 어려움

by 마음대로다 2022. 1. 31.

진학의 어려움

 

 

 

 

 

 

 

 

 

나는 진학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평생, 좀비, 그런 어떤 상처가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나의 글을 읽는 사람들도, 읽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진학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학문의 진정한, 참다운 목적이 아닐까 한다. 학문의 목적은, 출가하는 것이고, 배출되는 것이며, 넘쳐흐르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아주 환상적인 현상이다. 현상이 정신이 아니고, 현상이 본질이 아니지만, 현상이 어려움을 갖고 있으니, 본질도 같고, 정신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사람을 어떻게 여기는가? 다만 여행을 다녀왔다고 여기는가? 아니면 좀비처럼 여기는가? 좀비처럼 여기지 않는가? 옛날 집에, 오디오 시스템이 있고, 함안은 사면이 육지로 되어 있어서, 유명한 곳도 없고, 폐쇄공포증에 걸릴 만 한데, 그래서 유명한 오디오 회사가 외국에서 태어날 만 한데, 아무튼 집에 음반들만 많았어도, 집구석 어딘가에서, 그것을 손에 들고, 사람들은 일종의 각기춤을 추고, 이상한 입으로 뼛소리를 내면서 좋아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랑비 같은, 전경의, 풍경의, 절대적인 시골의 아스라함이 있었는데, 지금의 좀비는, 아이들에게는 정말 좀비, 과학 좀비, 넷플릭스 좀비 그대로이기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다. 우리가 좀비를 보면서, 특히 한국화된 좀비 영화를 보면서, 그것은 정서화되고, 인물화되고, 슬픔이 스포이드로 그들 어깨 어딘가에 떨어뜨려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안 봐도 혼다 브이티알인 것인데, 안타까운 것은, 과도한 피와, 얼굴의 상처와, 죽기 직전의 고통만 아니면, 화를 내고, 사람들을 싫어하고, 공격인지 사랑인지 모르는 대상 관계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사색에 빠진 좀비, 음악을 듣는 좀비, 자기 행동에 회의를 갖는 좀비, 봄비는 없으니까, 그렇게 정열적인 이들을 보면, 정말 청소년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청소년 같은 것이다. 청소하고, 좋아하고, 새옷 입고 좋아하고, 에프디엑스, 피디엠, 개솔, 영자영, 스타렉스, 그렇게 이름을 지으면, 영어를 못하고, 그러니까 좋아하고, 영락 없이 그런 청소년 같은 것이다. 청소년 콘서트를 봐도 그렇다. 정확히 어떤 메시지를, 중간에 교회 젊은 목사가 나와서, 가벼운 문화 설교를 한다면 모를까, 그것을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제는, 서연의 퍼스트 마이너처럼, 그것의 가사처럼, 제이티비씨, 차이나는 클래스에서, 경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정리라는 것을 보았는데, 그래도 남자들 사이에서 예쁜 패널들이 아니라, 그냥 이제는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둔 것 같은, 아무튼 그런 사적인 불만을 제하더라도, 맹자의 문장을 선생이 한 번 강독하고, 어떤 이상한 좀비 가수가 랩을 하고 했었는데,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는, 눈물의 하쿠슈(박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어디에서,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깨달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마음이 고우면,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다. 우리가 마음이 고우면, 넷플릭스를 볼 겨를도 없고, 가디언지도 볼 아무런 이유를 가질 수 없다. 우리도 현균씨처럼, 그 모든 에피소드들을 보아서, 아침에 좀비가 하늘에 가득 떠 있는 것을, 그런 고통스러운 이중섭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작은 좀, 짧은 아픈 비, 작은 아픔들의 상징들을, 정말 짧게 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하고,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구출되고,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좀비 영화를 보면, 반드시 쏘세지 피막을 얻게 되고, 가끔은 커피를 진하게 마심으로써, 어떤 학문적인 논문을 읽은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가수 보아, 안 보아야 하는가? 국가 안보 장관 회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안보 회관 같은, 그 유명한 국제 안보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정, 정말, 좀비 영화를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비평이 없는 쏘세지 피막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노련해지고, 그런 도덕경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가도 비상도, 혹은 반야바라밀다시하면서, 짧게 보고, 쨉을 날리고, 거리를 유지하다가, 푸트 워크, 그 옛날 권투 선수처럼, 카운터 블로우를 날려서, 적을 꼬꾸라지게 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이라는 것은 또한 어떠한가? 엄밀한 학으로서의 현상학이라고, 비평을 어떻게 비문의 탁본을 뜨는 것처럼 추구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또한, 현균씨의 글을 워낙에 많이 읽어와서, 눈이 높아져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나의 글을 읽은 것 뿐인데, 전혀 다른 국가, 전혀 다른 도시의 어떤 여자가 겉으로는 자켓을 입었지만, 속으로는 브라만 한 것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도시의 풍경이고, 싱크로니시티 같은 것이다. 좀비는 그런 생각의 진행 같은 것이다. 책을 읽어도 이제는 진행하는 것이 없다. 최진행. 음악을 들어도, 쏘세지 피막이라는 원죄는 지워지지 않는다. 오직 로고스만이, 그와 같은 말씀만이, 그 모든 것들을 살리고, 진행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소설도 열심히 잘 쓰고 있는 중에,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면, 그 원년에 어떠했겠는가? 우리는 남의 일이지만, 이제는 남의 일 같지 않게, 그와 같은 아름다운 서울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한신대는 그래도 살아남았을 것이고, 나는 그와 같은 대립 속에서, 멋진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여의도에 살았을 것이고, 아나운서들과 친했을 것이다. 여배우들은 만나주고, 가수들은 패키지처럼, 우리가 그와 같은 묶음과 시간 없이 진행할 수는 없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 염문이 서울 전역에 퍼져, 사람들이 싫어한다 싶으면, 북경이나, 동경이나, 홍콩 아니면 싱가폴에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지혜자는,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도리어 전화위복의 에너지로 삼는 법이니까 말이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소설을 만난 적도 없고, 전무후무한 현상을 경험한 적도 없다. 종교는 종교고, 대학교는 대학교고, 자기 대학 학부 출신을 입학시키는 대학원은 대학원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지당한 좀비들이 있는 법것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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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렵지만, 주제는 단출한 것 같다. 그것은 진학의 어려움인 것이다. 진학의 진 자는 한자로, 진짜의 진 자는 아니다. 그리고 커피를 진하게 마시는 것도, 진학의 어려움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커피를 진하게 마신다고 해서, 사약처럼 마신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어서, 깨어나 나와 함께 어느 동남아의 아름다운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좀비 같은 상상들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렇지만 현실이 아닌.......

 

 

어째서 진학이 그렇게 어려운가? 지진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지식의 현상학에서, 지표면에서, 지각을 뚫고 들어가, 깨달은 자들의 어떤 선생 같은 이들인가? 처음에는, 내가 여자도 없고, 진학도 하지 못하고, 글을 짧게, 좀비처럼 쓰는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비평의 영화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영화는 굉장히 빨리 그로부터 빠져나왔고, 그것은 어쩌면 한국어의 지배가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되어서 그럴 것이다. 일본이나, 서양 영화, 중국 영화는 그렇지 못해서, 미국 영화는 항상 존재와 좀비의 대결 관계로,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있었고, 진행하였었다. 그것들을 모아, 따로 정리할 수가 없을 정도로......

 

 

*

 

하루키의 어떤 소설에, 눈이 가득 내리는 곳에서, 어떤 산양들이 푹푹 쓰러지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러는 것처럼 국가가, 세계 국가들이, 그 몇 겹 안되는 쏘세지 피막이, 내용이 없고, 설명이 없으며, 훌륭한 비평이 없는 영화들의 경험 속에서, 도리어 두껍게 되어서, 푹푹 쓰러지는 것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었다. 주자가 나타나기만 해도, 공산주의는 사라지게 되어 있으나, 서양 문명이 사라지게 되기까지는, 그들이 예술력이 너무 강력해서, 시간이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까지 사라질 줄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지, 아니면 나의 평론을 읽는지, 사람들은 방송국을 보는지, 신문을 읽는지, 대통령 선거를 하는지, 아니면 나의 시를 읽는지, 산문을 읽는지, 한국어의 가공할 만한 형이상학을 읽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렇게 북한으로 갈 것인지, 거제도 수용소에 모인 사람들처럼, 아니면 전향할 것인지를 묻는데, 이제 만나러 가는 이만갑을 보고, 그들의 나를 향한 잦은 공격들을 보고, 도리어 북한으로 돌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스로 좀비되는 이도 없고, 스스로 좀비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 이도 없다. 좀비는 그와 같은 전향과, 알 수 없는 명령과, 과학과, 방송사, 넷플릭스, 그것들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시냅스,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좀비인 것이다.

 

주저하고, 망설이는데,

 

이미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진학은 그처럼 자기 몸을 남의 몸처럼, 불교적으로 여겨서, 함부로 했던 사람들의 짧은 좀비와 같다.....

 

그러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