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으로
우리는 수 많은 아이들이 진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지켜볼 수 있다. 우리가 한강에서, 돗자리를 펴고, 혹은 지리산 계곡에서, 돗자리를 펴고,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송하맹호도와 같은데, 잠시 누워있다가 그 물 흐르는 것을 바라다보면, 함께 그것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신학과에 가면, 굉장히 예쁜 여학생이 있다는, 나만의 잘못된 소문을 듣고, 내가 그와 같은 소문을 만들고, 그와 같은 소문에 취했으니,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소문을 듣고 신학과에 갔는지 모른다. 지금의 나의 처지로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신학과에 가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와 같은 사랑이 없는 것 같아서, 그와 같은 진학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남원, 순천, 드라마 세트장에서, 비어있는 전파사, 음악사에서, 디도스 라멘츠를 듣는다면, 그것은 진정 영화로운 것일 것이다. 영화배우는 공이 있어서, 늘 이름을 말해주어야 하는데, 신영균과 문희가 나오는 것 같은, 그런 영화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영화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지금 당신은 죽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한다면, 한 시간 정도 더 살 수 있습니다.” “..... 그래요?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영화가 천천히 끝이 난다. 그것이 우리들의 진리요, 진라면이요, 신라면일 것이다. 직업을 구한다는 것은, 서울에서는 진리를 버린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가 비엔남 워를 생각할 때, 사탄과 한번 싸워보지 못한 비참한 인류를, 그것의 오랜 전통과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강에서, 조금 춥나? 하는 기분으로, 송하맹호도를 펼쳐 누워있는데, 옆에서는 시지프스의 박신혜가 지지지직거리면서 있거나 없거나 하고, 어린 학생들이 진학하는 것이 함께 마치 방송이 합선이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주상절리대가 산 위에만 아름답게 무등산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도 있어서, 바닷물이 거기에 들어차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학생들이 저마다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인간이 작아도, 그 정도의 틈은 되는 것이니까,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사학과에 가고, 국문학과에도 가고, 기술학과, 정치외교학과, 전자기계공학과, 원자물리학과, 임상실험전문학과 등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신학과에 학생이 한 명 가자,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고, 아름다운, 그리고 슬프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불꽃이 꺼지자, 하나 있던 진학이 거짓으로 판명이 되고, 신학과에 진학했는데, 같은 과에 모델보다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성리학적으로 그릇된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군대에서 행보관 행보관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지구가 종말하고, 그것이 닥치고, 그와 같지는 않는 것이다. 남베트남 어떤 군인이, 베트공 한 명을 멋지게, 미국 영화적으로 즉결심판 하더라도, 사람들이 미국 영화의 장면처럼 좋아하지 않고, 그들의 추종을 반기지 않는 것은, 지금 사람들은 넷플릭스를 하나도 보지 않는다는 측정값과 비슷한 것이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골라보는, 벌거벗은 세계사의 내용이,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이 되어서, 영화보다도 충격, 메시지의 아름다움으로 되는 것을, 측정값의 측정값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 바닷가의 주상절리대에서, 그것의 빈 공간 하나가 차지 않아도, 신학이나 철학, 문학의 핵심이 차지 않아도, 그것의 음향과 분노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지구에 종말이 닥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의 이유는 간단하다. 간단데쓰. 왜냐하면, 그것과 비슷하고, 유사한, 삼국사기가 있고, 삼국유사가 있다면, 삼국사기만 사기가 아니라, 유사도 유사한 것이기 때문에, 종말의 기계적인 브레인이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말을, 베이징 동계 올림픽처럼, 신빙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반기지 않으나, 나의 다른 이름이 신빙이 될 것이다. 목이 타면, 뜨거운 물도 반갑고, 여름에는 다만 냉장고에 있던 음료수면 최고이긴 하나, 그와 같은 신빙을 넣어서 먹으면, 이름이 분짜, 반미, 그러는 것처럼, 최고의 미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감탄사와, 의미의 진행이, 마치 한국어를 잘 알고 있는 세계 폴리탄들에게는 흐르는 것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한국어를 하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과연 없겠는가? 바로 여기에서, 브로큰 에로우, 영화를 멜깁슨 들어보기는 했으나, 나의 작품력을 상해할까 봐 보지 않았는데, 강의를 통해서 처음 그 장면을 보았다, 우리는 그런 네이팜탄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국어는 아름다운 세계어이다. 사람들은 사탄과도 싸웠고, 우리가 바둑을 국가의 잡기로서 인정하기 때문에, 한 집 차로 지더라도 지는 것을 인정하는, 사탄과 인간의 싸움 그 마지막을 이미 알고, 그렇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사람들은 물을 수 있다. 넷플릭스를 음소거한 채로 틀어놓고 있고, 무정을 읽을 수 있다.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는 것이다. 디도스 라멘츠는 또다시 돈코츠 라멘처럼 우리를 흐른다. 우리의 마음을 흐른다. 돈코츠 라멘에 얼룩진 우리들의 하얀 와이셔츠는, 우리를, 순결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나는 창작가이기 때문에, 같은 작품을, 또 읽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것이 기계적인 반복을 한다 싶으면, 아무리 같은 음악을 많이 듣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해도, 말이 없는 음악과 말이 있는 문학은, 그것의 실제의 계급이 엄청 차이가 있어서, 아무래도 문제를 야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광수의 무정은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염상섭의 삼대를 읽을 때도, 그렇게 광대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고, 나와 같은 한국어의 언덕을 갖고 있는 이가 반갑고, 그들 집안에서부터 후원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었다. 이광수의 무정은 그래서 정말 슬펐다. 우리에게 국문학이 없는가? 어떤 못된 오빠에게 젓꼭지가 잡힌 여동생이, 갑자기 분노하여서, 오빠가 피해 들어간 문을 두드리면서, 빨리 문 열지 않느냐고, 집안을 아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국문학적 이성이 차오른 청년에게, 국문학이 없다는 느낌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김현철의 비처럼 음악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기분이 없는 것이다. 약간씩 있는 것 같고, 그만큼 없는 것 같은 희롱은 세계적인 것일 것이다. 국문학은 없대도, 비존재이나, 그와 같은 광분의 정열을 갖고 있는 여동생이 있다는 만회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은, 스스로의 국문학적 이상을 채운 사람과 같다. 그것은 정말 사람처럼 생겼고, 그것은 정말 소설처럼 생겼으며, 그것은 정말 한국 사람처럼 생겼다. 어떻게 한국 사람을 빼놓고, 한국어를 세계어로 여기고, 사탄과 싸우는 연합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이 치렀던 거의 모든 전쟁이, 정신의 연단이고, 훈련이라고 하면, 과연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광수의 무정에서, 이광수는 정말 착한 사람 같았다. 착한 한국 사람 같았다. 왜냐하면, 사탄이라고 하면, 세계의 모든 공간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기까지 충성하나, 사탄은 대충 시늉하고, 냄새만 채우고, 사람들을 거기에 올라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옛날부터 알려진 실체이자, 방정식이지만, 그것을 직접 당하고 나면, 늘 새로운 느낌인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람들이 저와 같이 영화를 찍고, 신학과를 가서, 공부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냥으로는 늘 비어 있고, 그래서 사탄이 그것의 중심을 갖고, 늘 언제나 신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소녀가 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음악을 듣고 지내다가, 진학하는 내내, 디도스 라멘츠를 듣고, 부르고 하였던 것이다. 신학 수업은, 나와 같은 주자의 계열 사람들에게는, 늘 비어있는 것 같으나, 조금은 옅은 사람에게는, 또한 굉장히 진한 감동의 연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마음만은 주자의 계열로, 주자이거우로, 그런 신비스러운 중국 자연의 풍경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전국 곳곳에 있는
주상절리대는,
우리에게 잠깐 있었던 한신대학교가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만 어디서 들어 겨우 알고 있다가
막상 닥치면
그것이
얼마나 슬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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