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생
우리는 비교를 통해 살아간다. 물리학에는 그런 비교확정성의 원리라는 것이 없다. 우리가 서울에서, 그렇게 버스에 타거나, 지하철을 탈 때, 우리가 영화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이미 비교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같은 물리학적인 세계이지만, 왠지 모르게 배가 고픈 것 같고, 왠지 모르게 본죽 먹은 것 같은. 홀썸볼 먹은 것 같은. 하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물리학적 만행을 측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못하고, 다만 자리가 있으면 좋아하고, 누군가 밥 사주면 좋아하고, 그러는 것이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우리가 서울에서 음악을 들을 때, 누군가 서울에서 음악을 혼자 들을 때, 우리는 그와 같은 이층적인 항목이 너무 막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서둘러 비교확정이 되기 전에, 우리가 자유하는 존재로서, 우주에 우뚝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를 의심하고, 하나라도 더 생각하고, 하나라도 더 대화하고, 하나라도 더 둘이 서로 좋아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어용문학을 말할 때, 혹은 그런 교수와, 그런 학교 권력을 말할 때, 우리는 섬찟했던 적이 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살고, 나름 걱정하고, 나름 바쁘고, 그런 등속운동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섬찟 놀랐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동요를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용이고, 어머니 같고, 우리가 젊은이들의 테크노 음악을, 댄스를, 어떤 댄스를, 그런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어용이고, 어용문학 같고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악을 듣고, 이름을 나처럼 잘 모르고, 스튜트가르트 부가레스트 필하모닉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항상 짜증내고,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어용인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젊은 시절을 지내고, 젊은 시절을 지낸 다음에 바로 어용문학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어용인 것이다. 우리가 어째서, 이어령을 잠깐 생각하고, 다만 성실한 사람이지, 어용인가 생각했던 단계에서부터, 어째서 어용문학을 우리가 싫어하고, 어째서 그들의 가리키는 대상을 우리가 향유하고, 동해로 고래 사냥을 떠나자고, 그렇게 결의를 다지고,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었더니, 예수님 얼굴처럼 나와서, 우리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하는, 그런 적당주의 유튜브, 친구들 간의 영원한 지적인 어용들을 본다고 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어용인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누군가 함께 걷다가, 맞은 편 작가에게, 자네는 조금 어용인 것 같다고 하면, 갑자기 싸우고, 서로 터지고, 넘어지고, 정말 죽을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이 들어도, 한 대 더 때리는 사태가, 그런 지고이네르바이젠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용이 아니면 먹고살기 힘들고, 서둘러 먹고 살기 힘들고, 어용이 아니면 등속운동으로 계속해서 먹고살기 힘들고, 그런 도시의 우주를 질주한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용도 문학이고, 문학이 그렇다면 괜찮은 것이 있고, 우리가 문학을 사랑하는 것은, 그런 어용의 바다에서, 괜찮은 것들이 항상 나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용문학은 관계의 문학이고, 다만 뒤쳐진 것이지, 문학의 아프리오리로서의 물리학인 것이지, 무슨 가치 판단이 깊숙이 개입된, 때로는 혁명군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어용문학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포켓볼이 사라지고 싶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가 여자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홀썸볼,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할 때는, 그것이 등속 운동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토스트 기에 들어가고 나자, 다른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등속운동을 서로 약속한 것에서 많이 어긋나는 것이고, 우리가 너무 빨리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쓰리쿠션 밖에 하지 않는다. 사구는 더더욱, 주제 사마라구, 하지 않는다. 그런 어용문학적 운명을 사람들은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토스트 기에서 예수님 얼굴이 나올 수 있다면, 토스트 기에서 또한 무엇이 나올 수 있겠는가? 어떤 성스러운 것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어용문학이 따로 뚜렷한 사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스라치게, 시라소니 놀라는 것은, 어쩌면 공포 영화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때로는 어용문학이 이어령이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순수문학적인 어떤 요소, 그런 것을 더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어떤 등속운동의 존재들은, 항상 사람들을 가두고, 가두리 양식장으로 유지하면서, 적당히 그리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문학이 문학이면, 어용문학적인 형상은 아무래도 영화가 될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열심히 보고, 티비를 열심히 보고, 때로는 벌거벗고, 강의 같은 것도 열심히 보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카바티나 저 먼 대양의 날치가 되어 있고, 날았다가 가라앉으니 상어가 먹고, 다시금 뛰어오르니, 갈매기가 먹는 것이다.
이문열도 어용 같고, 이름이 지금 보니 너무 사치스럽고, 하는 말들도, 늘 그렇게 어용 같고, 유재석을 좋아했던 이외수는 그런 어용의 바다 위에서 쓸쓸하게 죽고 말았다.
서울은
그리고 영화에서 누군가에게 기가막히게 묘사된 날치 떼
자연은
내가 이어령을 좋아했던 것은
자기가 어용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았고
국가 공무원처럼 일하는 것이 좋았으며
어용문학이 아닌 것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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