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사탄
사도 바울은 그레데인은 배만 위하고,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우리 어렸을 때는, 그런 그레데인 친구들을 둘 수 있었다. 그들은 냄새가 나지 않고, 착하고, 집이 좋고, 친구의 집에 가면, 이런저런 피규어, 재규어들이 많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랬을 때, 그런 그레데인들이 살아있을 때, 사도 바울의 글을 읽었다면 얼마나 반감이 심했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사도 바울의 글을, 그리고 그를, 우리가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산다. 그래서 그레데인들은 거짓말쟁이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의 선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감각을 우리에게 선사하는데, 그것은 티비엔, 그러니까 티비엠 때문이다. 우리는 티비엠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우리는 티비엠을 좋아하고, 우리는 그런 안전 교육을 좋아한다.
다른 글 쓰는 것들도 있어서, 그렇게 신경이 가 있는데, 또 우영우가 잃어버린 엄마를 찾았다고 하니, 그와 같은 우영우의 운명을 두고, 지구는 둥그니까, 사도 바울이나 그레데인처럼, 한 말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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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울대를 싫어해야 한다. 그래야 서울대에게 좋다. 사도 바울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한신대도 싫어해야 한다. 내 여자친구와 나는 부천에서 헤어졌는데, 나는 키 작은 문학적 관심에서, 운명적으로 벗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서울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서울대 수많은 자살자들이나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대의 끝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 철학이 무엇인가? 인명최재천이? 아니면 이런저런 철학과 교수? 소광희? 사람은 없음을 견디지 못하고, 주자가 일하는 곳으로 기어코 내려와 괴롭히는 것으로, 겨울철 패딩, 페이드 아웃이 되는 것이다. 없음이 엑스레이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레데터 투에서처럼, 머리뼈가 척추와 함께 몸통에서 빠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공부했던, 평범한, 소박한 소년, 학생, 혹은 대학원생이, 갑자기, 사탄의 제국, 그런 것들의 보이지 않는 체계를 만날 때 겪는 것으로서, 일종의 동일시 효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소나무 숲에 가서, 우리가 산소가 풍부하고, 곡절이 있으나, 우여, 대단히 아름답게, 하늘을 향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듯이, 사탄의 체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 잘난 서울대에서, 서울대를 대표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이처 신 같은, 그런 장엄한, 혹은 버스 안에서, 자자의, 그런 것 같은 철학자가 나왔다 한다면 얼마나 기뻤겠는가? 김동길. 그리고 이름을 잘 모르겠는 노교수들. 소광희. 그들은 소나무 숲의 동일시를 주지 못하고, 왜냐하면, 서양이 사람들에게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의 현주소를 드러내지 않고, 고백하지 않고, 이미 자각하지 못하고, 기어코, 씨받이를 불러다가, 자기들의 이상한 매질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운명의 선택 순간에, 우리는 매우 시스템이 가까운 것들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생각이 있건 없건, 우리가 성경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들도 그들의 원래의 방향으로 성경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동일시의 메타피직스를 주지 못하고, 잘하면 사람들에게 넷플릭스를 주는 것들로 낙인이 찍힐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인민들을 보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우리가 이상하다 여기는, 그런 관심과 집중들을, 더욱 열광하고, 좋아하고, 사탄의 삐딱선이 엿보인다 하는 것에 비정상적인 광증을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세계 드라마 순위도 그렇다. 일본은 옛날부터 그렇다. 그들의 괜찮은 드라마들도, 묻히고, 강수지의 유명한 노래 가사 속 멘트, 묻어버리고, 이상한 것들의 계보를, 그렇게 마지막 장관처럼 추구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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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영우를 처음 몇 편 본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서울대 철학과에 늙은 노교수가 있다면, 늙었는데 더 늙었다는 의미에서, 너무 오랫동안 서울대의 시스템에 있다 보니, 그들의 척추를 우리에게 내비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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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부모는, 아무리 굴지의 회사의, 심지어는 대학의, 어떤 관료나, 교수까지 하고 있다고 해도, 전공이 넘치는 흰개미의 영역을 벗어나면, 모르는 것들 투성일 수가 있다. 나이가 들도록, 그런 징검다리나, 어떤 들뢰즈의 그런 것들, 그런 형이상학의 함정이나, 어려움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늘 언제나 고전의 터미널 의식, 유스퀘어나, 센트럴시티 같은 것을 추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있으나, 막상 그런 것을 실천하기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는 그레데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레데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어려운 교수까지도 될 수 없었을 수 있다. 그레데인이었기 때문에, 솔직함을 숨기고, 적당히 아는 척을 했는데, 드디어 조금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에게 새로운, 영원히 차원이 다른, 종합적이고, 아름다운, 전체적이고, 섬세한, 그 환상적인 형이상학 같은 것을 추구하자고 하는 것인가? 그레데인. 그러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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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는 서울대, 정확히 말하면, 서울대 철학과의 죽음 위로 피어나는, 골고다의 어떤 까마귀 떼들 같다.
우리는 까마귀의 목숨을 하나 구해주고, 평생, 서로를 반려자 삼아서 사는 것이다. 그런 일화가 최근에, 그레데인의 영역에 있었다. 거의 모든 인터넷은, 서울대와 연계한, 그레데인들의 각축장 같은 것이다. 축산업 협동조합 같은.
그러니까, 우리 사는 세상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태수미, 티비가 우리를 까마귀로 새롭게 태어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먹은 부모와 함께, 고속도로에서, 휴게소에서, 뭔가를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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