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든지, 알고 보니 니혼진이라든지, 알고 보니 여자들을 가두고 폭행한다든지, 알고 보니 신천지의 리더라든지, 알고 보니 집에 들어가서는, 텔레포메이션으로 얼마든지 지구를 여행할 수 있다든지, 알고 보니 돈이 아주 많다든지, 알고 보니 대통령에 버금가는 국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든지, 알고 보니 글을 아주 잘 써서, 다른 세상사에 무관심할 수 있다든지, 알고 보니 이소룡만 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다든지, 알고 보니 잘 모르는 국가는 하나쯤 전쟁을 일으켜서, 멸절시킬 수 있다든지.....
거의 제로 상태에서 출발하여 상대를 대하지 않고, 확신을 갖고 싸가지가 없기 위해서는, 다만 자기가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처럼 치명적인 오점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숱한 드라마가, 예를 들면 수의사가 어떻게 여자들을 동물병원으로 납치해서, 사진을 찍고, 그런 내용을 볼 때는 내가 혹했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의 모든 드라마가, 사탄과 정식으로 싸우는 것은 없고, 사탄과 싸우기 위해서는 내게 먼저 담력 시험을 해보아야 한다는 꼬드김에 넘어간 케이스들이다. 그렇다고, 정작, 작가나 배우, 그것들이 사탄과 싸운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냥 반복적인 시간인 것이다.
바보와 로봇이 발음이 매우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니고, 만남, 우리가 죽자 사자 공부하고 열심히 살면서 드디어 도착하게 된 반복적인 관념의 세계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이다. 바보 로봇을 들어본 적이 없다. 로봇은 커피도 만들고, 모든 일에 유능한데, 어째서 바보라고 비슷하게 불리게 된 것일까?
잡종들은 드디어 로봇도 되고, 바보도 되고, 유능했다가, 인간적으로는 바보가 됐다가, 그렇다고 하면, 일종의 필연적인 탁구공이 깨지는 공식에 따라, 뭐라도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라면, 끝내 죽을 때가 되지 않겠는가? 결국 까라면 까는, 까라마조프의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까지 말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까라는 러시아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무슨 그런 소설을 썼는지, 나로서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다. 쓰다가 짜증이 났는지, 이반처럼, 정신이 이상하고, 혹은 드미뜨리처럼 정말 완전히 까는 어떤 청년을 엿보는 것 같고, 그랬더니 그루센까, 정말 깠느냐고 어떤 여자가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알료사처럼, 다 깠더니, 알처럼 변한 것인가, 그것으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 같다. 스메르자코프는, 그것들이 기계몸을 갖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뜻인 것 같다. 다만 여자로 있을 때, 여자로 있고, 남자로 있을 때, 남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있을 때, 적극적으로 깐다고 하면, 내가 자주 며칠에 한번씩 자위를 하는 것처럼, 남자로 있을 때, 자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쪽의 신체가 이상하게 되어 있을 것이고, 여자로 있을 때는, 대놓고, 사람이 거대한 전복처럼, 이토 전복이 아니더라도, 거의 전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릴 것이다. 선생님이 분필로 원을 그리는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왜냐하면, 다만 생각만 하더라도, 신체는 먼저 흥분하기 때문이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하지 못하는데, 신체가 그렇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상을 유능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인식 이전에 이해가 있고, 심지어는 이해 이전에 선이해가 있어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인 것이다.
잡종들이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그 모든 이유들도 있고, 나는 다만 다까라, 다 까고 다니는, 항상 까고 다니는, 평범한 마리오네트라는 생각이 있어서이다.
*
결국 공식적인 형식, 형식의 객관적인 이중 접합, 대입의 순차적 전개라는 원리가 있어서, 결국 자기 다까라, 다 까고 다니는 이가 되어서, 그와 같은 소나타 형식 안에서,
나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러시아 대문호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절정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그는, 그와 같은 내용을 집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내용은, 소설은, 오직 사람들의 정신을 함양시키는 것에 있었지, 달걀처럼 될 때까지 엄청 까고 있는 드미뜨리에게, 정말 깠느냐고, 보고 있는데도 묻는 기가 막힌 선문답을 하는 그루센까가, 나갔다가 또 오는 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다만 기숙사에서, 그 비슷한 분위기의 알 수 없는 내용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호올로꼬바가 그나마 아름답다고 기록되어 있지, 그루센까는 늘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자기 닮은 무리들과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아무튼, 도스토예프스키, 그러니까 이삭 토스트가 내게 던진 내용은, 다 까고 다니는 인격을 지나쳐, 나와 매우 비슷한 인격, 글 쓰고, 시 쓰고, 음악 듣고, 그것으로 이야기하고, 음색이 노래하는 것 같고, 까나리아, 혹은 까나리 액젓, 그러나 항상 그런 조롱과는 상관이 없는, 한화 이글스 같은, 미국 이글스 밴드는 같지 않는, 시카고도 같지 않는, 아주 몇 개의 모던 토킹 같은, 그런 질주하는 인격과 층에 마주하여서,
자기의 신념과 철학을 버릴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떡밥과 이미 그들을 먹인 스토리를 다시 담을 수가 없어서
자기 중에 가장 아름다운
그 동심꽃 같은 자기를
까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박정희가 까라면 까라
그런 말은 한 것 같지 않다.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고
박정희도 할 수 있고 하는
순간적인 차원이었지 않나 한다.
대신 이런 필연적인 장엄 미사 같은
까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분명히
그리고 단단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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