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
모든 작품은 사탄의 자랑거리이다. 우리가 그렇지 않을 방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서양에서 작품을 내면, 당연히 서양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기만하며, 기만전술, 어떤 만한, 그런 것들, 그런 것이지 않겠는가? 지금과 같은 정보화, 세계화 시대 속에서, 비서구권에서 작품을 내도 마찬가지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런 쭈꾸미 김치 덮밥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하고, 무엇을 캐치할 수 있어야 하는가? 야구에서 나이스 캐치하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삶과 죽음의 어떤, 그런 추상적이며, 구상적인, 그런 도식적이며, 그래픽적인, 도형적인, 그런 세계에서,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누군가 한 명, 건강하게, 나이스 캐치하는 것은, 전체 숫자 중에서, 셋까지는 옳고 정당하며, 아름다운 것일 것이다. 우리가 그런 나이스 캐치를 열 번 이상 듣기 시작하면, 우리가 그들의 가족이 아닌 경우에는, 존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질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부감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 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심리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일신우일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편단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지나치게 확고부동한, 만고불변의, 하나마나한 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뭔가 진정한 캐치. 일종의 나이스 캐치 같은 것. 달밤에, 배드민턴을 하러 갔는데, 여자가 가볍게, 어렵게, 정말 기가 막히게 받아 올린 셔틀콕을, 남고 다닐 때처럼, 대학생 때부터는 조금 유해지는데, 유해진, 남자가 남고 다닐 때처럼, 반격하니까, 그것에 몸이 맞고, 온갖 짜증이 나서 여자가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는 그 짧은 인터넷 필름이 아니라, 여자가 같은 남고처럼, 받아친다고 하면, 그것도 일종의 나이스 캐치인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충북에 제천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이겠는가? 기껏해야, 단양을 추켜세우기 위해서 있는 것인 것이다. 이런 생각. 일종의 브람스 레퀴엠의 추잠멘하이트 같은 생각. 그런 생각은 사실 헤겔조차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헤겔이 철학을 할 때는, 이미, 그 세계의 전부는, 헤겔이 프랑스의 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헤겔이 누군가를 추켜세운다는, 결국 유한자로서의 최종 논리를 갖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수 많은 가족들이, 잔잔한 비극으로 죽어갈 때도, 우리는 헤겔이 최고고, 우리가 헤겔을 공부하다가, 독일 여자와 조금 사귀다가 죽어도, 우리는 니체처럼, 일종의 정당방위적인 영겁회귀라고 여길 수 있었다. 우리는 철학이, 심리적인 진행으로나마, 그렇게 압도적인 감각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프랑스 수필적인 잔챙이, 그러니까 장 뽈 벨몽도, 얀세니즘, 그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끄리, 그런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중후한 관념들을 내뱉을 때는, 금세 신학자들도 자기 있던 천년의 오피스를 내줄 판이었던 것이다. 그것의 비극과 긴장은, 누군가에게는 비극인, 그런 것은, 아직도 잔존하고 있어서, 한국에서 헤겔을 신학적으로 연구하고자, 유학을 온다고 하면, 네오나치즘이 준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갑자기. 그런데 그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 독일인들은, 학생들은,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이 신학적이고, 어떤 부분이 중국 수나라 수필적이며, 어떤 부분이 철학적인지, 그것의 접점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요원은 그런, 철학적인 드라마, 영화를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으나, 어떤 중마동 아줌마들, 그런 드라마로 생을 다할 것 같은 것이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일종의 사회 문화적인 로봇 가설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나, 정확히 이것이다, 원인이 이것이고, 논리가 이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성덕여왕. 그러니까 칼이 맑은 물에 담겨 있는데, 그것이 굴곡져 보이는 드라마적 효과에서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만족하였는지 모른다. 미실이. 고현정이 어떤 것으로부터, 뭐라고 했었는데, 음소거된, 또 피 뿌리는 아일랜드, 그런 것에서 우리가 작품 관계를 마쳤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항상 그렇지 않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드라마를 보지 않는 것처럼, 다만 일본 에이브이를 보는 것처럼 군다. 한번 에이브이를 보면, 영원히 우리 있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바로 그와 같은 고통이, 비극이, 어쩌면 창작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담양이 있는 이유도, 광주를 위한 것이며, 광주가 있는 이유도, 무등산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드넓은 산야, 그것은 폴 드만, 화순을 위한 것인 것이다. 화순이 있는 것은, 구례와 곡성을 위한 것이며, 구례와 곡성은 지리산 산청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질 들뢰즈의 사상을, 형이상학을 조금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고구마가 더 굵다 말하기가 그런 것이다. 고구마 앞에서, 우리는 평범하고, 평균하며, 평등하다. 누군가 언제부터 고구마가 캐지기 시작했는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인지, 고구마 먹고, 바로 나가서 쟁취하는 관념이 고작해야 그런 것인지, 하는 것으로다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는 소중하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로서, 그러하다. 그러니 그것에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전은 옥천을 위해 있는 것이며, 그런 와중에 단양의 한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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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을 여행한 사람들이면, 단번에 이상한 생각들을 많이 가진다. 일본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 시골을 가면, 우리와 똑같다는 말은, 그다지 좋은 곳을 다니지 못해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곳들조차, 아름다운 승급의 것들이 굉장히 많다. 중국은 그리고 매우 넓다. 그래서 누군가 일본인이라고 하면, 그런 니콘 카메라를 많이 갖고 있을 것만 같다.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각진, 가방들을 어려서부터 들고 다니는 것은, 거기 안에다, 일단은 영상교육을 위해서, 니콘이나 소니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가 보통 체하면, 응급처지로, 바늘로 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내게 하는 것이 있듯이, 일본인들은 그런 면에서 특화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에 있고, 마땅한 우리들 손가락으로서의 중지가 모이지 않고 있다.
일본은 동양의 독일이다. 그렇게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러니 일본인들은, 다만 그런 독일문화적인 애호로다가, 독도는 자기들 땅이라고, 혐한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반하지만. 그렇게 반복하다가, 결국 삭발 시위를 하고, 그런 심중의 문학적 지조로서의 토양이 없음이나 부족함을 두고, 어떤 문학가는 비참하게, 전통적으로다가, 죽기도 하였었다. 그러니까 일본을 이렇게 말하면서, 정확히 어디가 일본이고, 대마도고, 부산이며, 조선반도이다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들끼리, 질 들뢰즈, 통할 수도 있다. 조선은 일본을 위해 있을 수 있고, 일본은 드디어 한국을 위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을 위해 있을 수 있고, 중국과 대만은, 제주도를 위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제주도는, 갑자기, 아이리쉬 문학을 위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끼리는 넷이고, 그러니까 하나 둘 셋, 넷이고, 그것들끼리는 높이가 없이, 각진 횡이나, 돌아가기나, 블록체인지 같은 것으로, 경남 통영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벌건 대낮에 벼락이 일고, 자기들 머리가 대머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세키가 그래서 비상한 데가 있었는데, 문학적 작품 이전에 생의 연속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헤겔의 시대에 진입하는 것이고, 우리는 일본 에이브이처럼 꼼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질 들뢰즈의 유혹이 너무나 강하고, 그것들끼리의 커넥션이나, 아일랜드가, 너무나 매혹적이고, 누군가의 템프테이션, 노래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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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한 번의 헤겔 문학을 갖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그것의 징후가, 죽은 후에, 몇 번의 기회를 가져 본 것이, 틴토 브라스의 어떤 육체파 여배우의 작품 하나와, 검색해도 아닌 것 같고, 아무튼 그것 하나와 프랑스 삼색 시리즈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영화보다 소설이나 시가 좀 더 영혼적이고, 미술적이며, 민주적인지, 그런 가치 판단이 가능한지, 궁금하게 된다. 영화나, 미술, 그리고 음악 같은 것은, 다만 정상을 갈구할 뿐인 것이다. 누구도 커넥션이나, 아일랜드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다. 철없는 아이들이나, 성기가 타는 것처럼 구할 것이다. 그리고 시각적인 정상성을, 스토리 안에서 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믿고, 의뢰하고, 신뢰한다고, 장이모우 감독의 신뢰,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파편적인 미실의 대사를 갖고 평생을 사는 것인지 모른다, 반드시 끝에 도달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남녀가 서로 헤어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남녀가 서로 헤어지지 않고, 그들 민족의 아이들을 새로 낳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기들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러나 정신만큼은 보다 진보하고, 완벽하며, 철학적인 것이 되기를 갈망해서가 아니겠는가? 옛날부터, 수나라 수필, 그와 같은 영화보다는 소설이나 시를 우리가 높게 치는 것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적이며 이론적인 문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소설을 읽고서도 결론은 영화를 본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수가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서도, 그냥 영화관까지 이동하고, 극장을 다녀온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일 수가 있는 것처럼, 그것들끼리는 수학적으로 반드시 카라 니콜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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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일본이 가장 놀라는 것은, 자기들의 전봇대 간격이 그처럼 치밀한데도 불구하고, 주고받는 전력량이, 개인에게 축적되는 내용이, 그렇게 치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만 충전기 같은 인간으로서는 얼마든지......
그래서 커넥션 같은 것이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스위스에 다녀오고 나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스위스에 가서, 가끔 청소하기도 한다고 한다.
한국은 고구마만 먹어도, 빛이 좋은 달동네에서, 갑자기 유머일번지가 시작되고.....
즈비뉴 프라이스너의 블루 ost를 듣다 보면,
바람 부는 날에,
세계정신 전체를 놓고
다만 달동네에 살아도
연탄불을 갈고 있는
그의 커넥션이 엿보이는 것 같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일부러 가난한 것이
그와 같은 원죄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심증만 갈 뿐
연탄불만 갈 뿐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절대정신이다 할 만 한 이들이 없었다.
그런 작품이 삼대
거의 없었다.....
*
별사탕도 그렇다.
항상 별사탕만 먹고 싶기도 했다.
우리는 작품과
문인과
학생 시절의
어떤 커넥션을
그와 같은 비유와
달콤함으로
지냈던 것 같다......
숨은
선점의 밤하늘은
온통
그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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