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슬픈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득하게 오래 공부하는 선을 갖고 있다. 입시위주의 어떤 입시정책, 그런 정책, 전원책,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그런 암자들을 망각하게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이 그렇게 꼭 나쁜 것이 아닌 것은, 결국 공부라는 것이 정치에 의해 드러나고, 꽃이 피고, 맹자, 순자, 문화에 의해 드러나고, 활짝 피며, 과학으로서 입증이 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공부의 재미, 입각점, 즐거움, 환희, 그런 것을 갖기 전에, 미처 꽃 다 핀 꽃 한 송이처럼, 그렇게 입시와 취직 위주의 공부에 빠지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목적이고, 목적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목적이 우리를 먼저 괴롭히고, 서로 헤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것이 나라냐?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사요나라인 것이다. 또한 장나라, 나나, 많이 있다. 우리는 나라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에는, 좋아하고, 우리는 나라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때는 나라를 매우 욕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서울 모든, 혹은 어린 학생들 전부, 그것들의 심정인 것이다. 우리가 목사의 설교를 듣고자 하나, 감히 목사의 기반과 실체, 전제는 무시하지 못해도, 어느 때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목사 자신도, 하나님 나라의 잔잔한 평화적 전진, 세계 살림적인 교류는 할 수 있어도, 막상 사탄과의 싸움은 해본 적이 없고, 조용기 목사가 몇 번 사탄을 언급하면서, 싸울라치면, 싸울아비, 그것이 그만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기독교적 수사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개마고원에 가본 적도 없고, 압록강, 두만강에도 가본 적이 없다. 다만, 섬진강 상류, 압록이라는 곳은 수차례, 지날 때마다 지난 적이 있다. 나는 아무 것도 없었고, 당시에는 최신형 소형 디지털 카메라였지만, 그것은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서, 던지는 나의 투구 같은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일종의 투표권을 받는다. 점심 식사 입장권 같은 것을 받는다. 압록강의 뗏목을 말할 수 있는 자격권 같은 것을 받는다. 아무 것도, 그것의 통나무 싱그러운, 칼럼을 언급할 수가 없다. 둘은 너무나도 차이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라스를 붙여주니, 우리는 그만큼 지식이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티비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분명 우리 삶에 대해서는 차이나는 클라스인 것이다. 처음에는 다만 도자기 세트로만 있었다. 불굴의 정신으로, 어쩌면 클라스가 전진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낭패하고, 우리는 채널이 맞지 않는다. 우리들의 역사는, 어쩌면 만행의 전시장 같다. 만행 항용웅 같다. 동시대적이라는 것은, 컨템퍼러리, 사람들이 멋지게 북을 치고, 컨템퍼러리 뮤직을 발표하면, 우리는 비로소, 동시대적인 것에 눈을 뜬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늘, 어떤 분위기, 사도 세자가 날마다 죽는 것 같은 것이다. 만행에 눈을 뜨고, 늘 잠기고, 그렇다 보면, 사탄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나, 컨템퍼러리 뮤직에 눈을 뜨고, 발표한 다음에,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 뒷풀이라도 함께 참석하려고 한다면, 그 좋은 마음에, 그와 같은 기준으로써, 사탄이 너무 쉽게 적발이 되는 것이다. 태극 같은, 손쉬운, 태극 같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준으로써, 또한 너무나 쉽게 발견이 되는 것이다. 앙드레 가뇽의 음악과 함께, 내가 아까운 목재들을, 뗏목을 만들어, 드디어 압록강을 타려고 하면, 거의 전부가 사탄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것도 나쁜 것이다. 그것도 형식이라면, 차라리 만행 항용웅적인 역사 공부에 빠져, 모든 민족은 그런 앙드레 가뇽적인 사탄인 것으로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나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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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있는 선은, 선이다. 그것이 어떤 선인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김한길 사람 속인 것이다. 그것이 꽃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공부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예술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착한 마음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다. 노력하고, 채용하고, 취직하고, 함께 노력하면, 반드시 영토가 되고, 민들레, 대지가 되며, 그와 같은 돈이 되고, 점수가 된다. 하지만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공부는 처음부터, 다만 수다로만 이뤄져 있고, 그러다가 정이 로봇처럼, 그만 의식이 그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차이나는 클라스가 이어 받아서, 목을 치는 일본 놈의 새끼, 만행 항용웅을 찬양하는 역사 의식 고취를 하는 것은, 어쩌면 비유의 원죄가 될 것이다. 모든 비유는, 목을 치는 일본 놈의 새끼, 만행 항용웅을 찬양하는, 아이젠 하워 버그, 크로쓰, 그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나아가는, 대단한 어떤 스펙타클, 일종의 점조직 같은 사탄에다가, 갑자기 거대 사탄이 나타나, 프렌차이즈를 운영할 것 같은 구조와 운명을 갖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한약을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천에다가, 막대를 집어 넣어, 짜내지 않는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비유의 한계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국문학적 의지일 것이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그런 기자재와 전파력, 빛 광, 사람들의 운집하는 어떤 설치 미술, 아무런 컨템퍼러리도 없는, 로봇 같은 정의심 같은 것은, 분명 형식적인 것이고, 개인의 생각 같은 것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다. 사탄은 능력이 있고, 순간에 강하며, 영원에도 강하다. 우리의 뇌는 짓눌리고, 그렇게 반복되다 보면, 무의식으로 그것의 구조가 영원히 가라앉게 된다. 때로는 매우 선한 곳에서도, 악한 것들이 용맹하게 만행 항용웅을 저지르는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자기도 그런 것쯤은 알아도, 그럴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그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방송국처럼, 로봇처럼, 살아, 나타나, 나타샤, 그렇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학에 빠지고, 고고학에 빠지면, 영원히 사탄을 적발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헤겔의 역사철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사탄의 고고학적, 고대 노예 의학적 전쟁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유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탄으로부터 벗어나지만,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처럼, 메디컬 드라마에 또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도 전부 빠지지 않지만, 마침내 희뿌연 사랑 드라마에, 연애 신변 잡기 드라마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우리 베드로 같은 운명에, 예수님은 너무 늦게 도착하시고, 때로는 실망하시고, 때로는 비웃으시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의식은 겨우 사탄을 견디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참고, 인내하고, 어떤 드라마처럼, 참지 말라고 하는 정신과 의사를 우리가 발견하고, 눈에서 볼케이노가 터져 나온 적이 있는데, 그것은 심리학의 원리도 아니고, 삶의 과정도 아니며, 아무런 예술적인 기본적인 소나타 형식도 아닌 것이다. 그냥 사탄의 유혹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생각의 연장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순식간에 우리의 뇌를 스위치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방송국, 그것은 극작가, 그것은 어떤 방송 권력, 기자재, 연출, 콘티,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나의 어떤 평론에 의해서, 그때도 압록강을 내려가는 뗏목과 같은 컬럼니스트, 노오란 샤츠 입은, 말 없는 칼럼니스트가 우리가 좋은 것처럼,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한 낮에 밝고, 환하게, 폭넓은 맥락을 갖고 이야기를 했더니만, 갑자기 드라마 내용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우리가 지켜보기도 하고, 몇몇 사람만 엿을 집어, 음미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중국은 늘 언제나 겨우 사탄을 견디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한국 사람들은 선이, 언제나 조금씩, 그 무엇이든지, 공부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특징이 있으나, 일본과 중국은, 다만 악에서 구해지는 것으로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선한 삶의, 컨템퍼러리 한 삶의 기억을 갖고, 참고 견디면서 살다가, 사탄의 유혹에 폭발하게 되는 것은, 아무런 역사의식이 없는, 역사학자들의 오직 만행만을 기억하는, 만행적인 영겁 회귀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유물을 기억한다고 해도, 말들이 그렇게 단순하고, 최면 같고, 유홍준 같고, 거기서 거기 같고, 자기들 문화답사기 같고, 그리고는 코메디언이 되어서, 어딘가에서 세계 문화답사기나 하고 싶은 마음으로, 떠드는 것 같고 그러는 것이다. 사탄이 세계 인류의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과 유혹이 굴뚝 같아도, 참는 것은, 우리가 지키고 있고, 본질적으로 둘이 서로 많이 관련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너무 우리들의 방송이, 끊임없이, 공부를 처음부터 못하기 시작하는 행렬을 노출하게 되면, 그들이 일본이나 중국에게, 못된 짓을 시키기도 전에, 때로는 그들이 참는 것일 수 있는데, 그래서 매우 원거리에 있는 불의 그레고리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우리나라는 그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가 이처럼 오랫동안 혼자 지내면서, 불굴의 글들을 쓰는 동안, 다만 옛날 노래의 추억만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그런 객관적인 문장, 단 한 개도 쓰는 이가 없다 보면, 사탄이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들의 유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재밌었다. 그리고 꾸준히 재밌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마따나, 홍이포라는 것도 서양에서 건너온 것인 것이다. 하지만, 같은 포신을 갖고, 같은 화약이나 터뜨리는 것을 가지고, 매우 색다른 총을 쏘는 것도 아니고, 홍이포, 청이포, 심청포, 터뜨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와 같은 가능성과 해석도, 우리로 하여금 못지않게 실색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뭐든지, 발전하지 못하고, 사탄적인 지능의 퇴행을 겪는 것은, 부모와 집안, 가족과 사회가, 만행 한용웅에 빠져, 그와 같은 역사만을 가르치고, 가문의 역사만을 가르치고, 어려서부터 전사로 키우며,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고, 무기로 키우며, 아이들을 어떤 아가멤논적인 우주로 키우며, 에게해로 만들고, 에이지언씨, 회피하는 기능을 키우며, 유물론적인 도입을 하면, 평생을 어떤 간사한것들을 데리고 와서, 또한 유물론적인 퇴행을 시키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즉흥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제 일차대전, 이차대전, 크림 전쟁의 내용들이었다. 그것을 배워도, 디제네레이션, 퇴행의 기미를 우리는 읽지 못하고,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쇼트트랙이나, 김연아 같은 것들을 추앙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한국 사람들이 같은 동반 자살이나 퇴행을 하였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잠시 경제 정치 문화발전을 했던, 그런 서태지의 레전드를 갖고 있던, 코리안 시리즈, 그런 손석희나 손석구 나라의 퀸즈랜드나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불쌍한 김지선이나, 못생긴 박지선은, 앙드레 가뇽의 음악 속에서 아직도 살아, 그나마 나의 칼럼들을 향한다. 하지만 아무리 심각한 사탄의 세계 난동이 있어도, 나를 돕기 위해 나타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모순이다. 그래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다만 불쌍한 김지선이나, 못생긴 박지선이 되는 것이다.
소음 같은 것이 된다......
그것은 매우 즉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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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우 하찮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글 소설을 쓰고, 칼럼을 쓰면, 그것에 공명할 만한 벽이나, 담양은 되는 것이다. 그런 담양이 우리일 수도 있고, 담양 뒤에서, 뒤늦게 나타나는 청학동 같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내가 영어로, 아포리즘들을 쓰면, 그것에 반응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들은 구띠에레즈, 그러니까 스페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는 매우 철학적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철학과가 사람들을 모두 합격시킬 수 없는 것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들 철학과 학생들이 철학을 하지 못하는 것은, 교수들이 겨우 못생긴 박지선으로나마 만족하여 살기 때문일 수가 있다. 철학은 처음에는 문법이지만, 나중에는 영혼이기 때문이다. 문법은 나이가 들면, 율법은 나이가 들면,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아이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것도, 기적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문법은 기억나지 않고, 영혼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대충 밀어넣고, 시간이 되었다고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과 학생들이 예로부터 머리가 멍한 것은, 특별히 우연적이거나, 기적과 같은 현상이 아니라, 충분히 철학적인 내용인 것이다. 우리가 만행 항용웅 같은 역사주의에 빠지고, 시간의 으름장 같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같은, 유홍준의 일본식 우동 같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었더라도, 유물답사기에서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고 하면, 당연히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모두 사라졌던 때를 논리적으로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도바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교회의 입장이 그렇게 소비가 되고, 웃기고, 이런 것이 운명이다면서 자부하였던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들 빌립보 사람들이 모두 깡패들과 카지노나 운영하는 한국 사람들이 된 다음에는, 뒤늦게 이건 아니잖아 개그 헌법 몇 장 몇 절을 발견하고는, 춤을 추면서, 저항하고, 사람들에게, 그리고 수많은 신들에게, 항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중에 생겼다. 늘 사람들이 사라지는, 국가가 사라지는, 그런 영원한 변경지역에 대한 일종의 후방 침투와 같은 성격을 가졌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철학적인, 길가메시의 이상한 서사시 같은 것이, 호루스의 이상한 내용 같은 것이, 점점 더 대지를, 돈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모든 교회들이, 이 땅에 있지 못하고, 문학을 하지 못하고, 항상 들떠서, 철새들처럼 지역 이동을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문화답사기적인, 매우 강력한 지남철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학 공부를 못하는 것은, 성경 신학을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공부의 선이 강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태양과 지구, 달과 같은 너무 강력한 자석이 옆에 있어서, 우리들의 기초적인 철분 성격까지 끌어당기고자 하는데, 그와 같은 조건에서, 만남, 어쩌면 할렐루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후방침투의 것은 지금까지 꾸준히 이뤄져 왔다.
영어권 사람들이 셰익스피어 문장을 조금도 하지 못하고, 티비 같은 것을 봐도, 한 번도 그런 연속을 경험하지 못하고, 독일 사람들은 헤겔이 누군지도 모르고, 핀란드, 노르웨이 사람들처럼, 핀란디아 교향곡, 그렇게 지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인도 사람들이,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좋고, 중국 사람 같고, 중국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늘 언제나 오랑캐 같은 것은, 이처럼 깊은 이유, 유럽 연합이 있는 것이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발음을 할 때마다,
우스운 것은
에일리나
아이비
혹은 스탠퍼드나
시카고 때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