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잡채
요즘 우리 게 유행하는 말 중에 <잡채>라는 것이 있다. 예전에는 띵작, 그런 말이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그 그래픽한 뜻을 알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머리가 띵한, 그런 고생스러운, 그런 작품을 가리켜, 띵작, 띵작, 그런 줄 알았다. 하긴 같은 것이긴 할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이와 같은 <뜻>이라는 말을 갖고, 그것이 세로획을 잡아주지 못해서, 마치 어떤 멋진 풍경 앞에 선 것처럼, 다만 흔들리는 세로획처럼, 그래서 그것이 없는 것처럼 있는지, 이 한글의 운명에 관해 원망할 만한 대상이 없는 것인가? <따뜻>도 그렇다. 우리가 뜻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따뜻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옛날에는 그렇게 먹을 것이 없었어도, 배는 고팠어도, 이상하게 따뜻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
작품은 우리의 어떤 고속 성장과 관련이 있다.
관련이 없어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좋다. 마땅한 작품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박정권의 경제 성장이 학생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 둘이, 관련이 없다면, 우리는 겨우 잡채라도 얻지 못하고, 낭패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배급을 받는데, 북한 사람들처럼, 따뜻하고 맛있는 잡채를, 그릇 가득히 얻어가는 사람이 있고,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팽이만 뱅글뱅글 도는 것을, 그것만 보다가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잡채보다 좋은 음식이 있다면, 그것을 얻거나, 하거나, 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것도, 하나도 없다면, 잡채라도 얻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잡채는 유도와 같은 기술이 있고, 힘이 있고, 손에 쥐는 악력이 있다. 유도복은 찢어지지 않는다. 그 얇고, 가냘픈, 힘이 없는 잡채가, 사람들을 쥐는 악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상징할 만한 작품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옛날 영화이고, 벽 속의 여자는, 너무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고, 나만 아는 것이고, 황진이, 겨울 여자, 바보 선언, 그것들의 행진도, 결국 신파의 겨울 풍경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일단 관객이, 관객의 영원함이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의 멱살을, 유도 선수처럼, 잡고 있는 것이 있다. 그러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님들과 같다. 영원히 가라앉는,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원형이고, 그것은 원주이며, 그것은 영주이다.
이번 넷플릭스 영화 정이만 보더라도, 우리는 내 말을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 스트레스와 국가 부도 사태와 같은 액션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비평이 사실 훌륭한 것이다. 평안하고, 정적인 것은 결코, 이로울 수가 없다. 내용과 이상, 목적과 성실을 약속한 다음에는,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들 졸업하기 때문이다. 졸업이라는 것은, 어쩌면 일본식으로 말하면 할복과 같은 것이다. 발음이 묘하게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졸업하면, 학생 때의 어떤 정이 로봇 같은 시간을 잊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잘 조성해 주어서, 그런 것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학생 때, 모두가 신학과이며, 모두가 문학과이며, 모두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듣고, 어떤 엔지오 같은, 모두가 유도학과이며, 모두가 태권도 학과인 것이다. 졸업하면, 할복하게 되고, 우리는 그와 같은 정보산업공학과가 끝이 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 경제 성장은, 국가적 발전은, 오직 학생 운동이라는 영화에서, 겨우 연속이 되었었다. 그것의 미세한 연결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학생들은 엄청났었다. 일본은, 할복당하고, 참수당했으나, 한국에서 학생들이, 시민들이, 틈만 나면 새들도 하늘을 뜨는구나, 그와 같은 아주 약한 잠정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블리자드, 정신이 그만 나가는 것 같았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학생들을 지원하고, 학원들을 조성하고, 학원들을 만들고, 양영학원, 대성학원, 그럴 수 있고, 신문사들을 지원하고, 문화 산업, 드디어 사탄의 거대한 새둥지 같은 방송국이 떡하니 자리하고 나니까, 경제 발전을 통해, 학생들이 하늘에서, 마치 얄개시대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던 것이다. 학생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그 학생들이 나중에도 있는 것이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작품을 알고 비평을 안다면, 그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농자가 천하지 대본야이면, 어떤 광해군의 업적과 철학처럼, 대동법과 같은 의식의 비행은, 비평의 칼날은, 이론의 중흥과 가능성은, 그러니까 비평가는 중국의 계속되는 황제인 것이다.
우리들 학생은, 옛날에는,
피를 흘리면서, 작품과 이념, 세계와 기독교적 이념, 그런 것들을 사랑했으나, 육십 년대, 칠십 년대, 팔십 년대에 이르러서는, 그 학생들의, 제일의 물결, J의 물결, 누군가의 콩트를 받자면, 그리고 제삼의 불길 속에서, 그런 계속되는 것들 속에서 네오 맑시스트 같은 이가 나오지나 않을까, 세계 모두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을 흡수 통일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예측을 했었다. 우리가 많이, 김용과 같았었고, 그 한정 없는 효과음을, 한낮에도 매일 같이 듣고 보고 했던 때이기 때문에, 가능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비평은 어렵다. 비평의 칼날을, 커터칼처럼 많이 사용하다가, 그것을 드르르륵 집어넣으면, 이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부끄럽드.드.르륵.... 그것도 매우 같은 어감을 갖고 있다. 반드시 장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비평을 하기에는, 대학의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비평의 코드에 자기가 접속해서, 두뇌의 어떤 변경을 발견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한 삼백 시간 정도라고 하면, 우리의 순수 공부 시간을 추출해서, 만일 김현주 같은 여학생을 알아서, 다시 공부하려고 하면, 그것이 백 시간 정도로 훌쩍 줄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씨네마 패러디소......
할복보다 슬픈......
그렇다면, 여자를 사귀지 않고, 드라마는 절대 보지 않고, 그렇게 지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할 것이다.
하지만 비평은 작품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학생 운동도, 군인들이 경제 성장을 이뤄줬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강당에서, 극장에서, 카페에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의 단차는, 깊고, 그것의 차이는, 차별은, 그것의 차원의 변곡점은 어마어마하다. 여자가 깍두기를 담글 때, 우리는 그와 같은 백색의 기둥들을 모두 헤쳐나갈 수가 없다. 우리는 경주에 가야 하며, 경주에 가야, 그와 같은 고분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우영우처럼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하면, 절대로 비평가가 될 수 없고, 오마이뉴스 정도의 글쓰기는 겨우 공을 던져볼 수 있는 것이며, 몇 개의 것을 절제한다고 해도, 정이 로봇, 정삼, 정사 로봇을 가져본다고 해도, 나는 한 정오 로봇 정도 되는데, 사상가까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 것이다. 불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절을 태우는, 활활 타고 있는 절일 것이나, 황룡사 목탑처럼, 그렇고 나면, 남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통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리고 공부를 했다고 하나, 겉으로만 한 것이면, 그런 영원한 본질에나 입마하고 마는 것이다.
내가 김윤식을 좋아하는 것은, 김윤식이 그런 반죽음의 상태를 갖고 있고, 죽은 것인가 보면, 산 것 같고, 산 것인가 보면, 서울 바닥 어딘가에서 죽은 것 같고, 그런 희한한 형태를 가져서일 것이다....
사탄은 당연히 작품들을 시녀처럼 거느린다. 그것은 어쩌면 눈이 가득 내린 미시령 같기도 하다.
이름들도 그러하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 살지 않는, 주거 형태가 아닌, 경기도 어딘가의 타운 하우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그림자가 없고, 그림자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며, 거리가 있는 것 같으나, 굉장히 가까이 접근해서 타격을 준다.
우리들의 지나온 시간의 전체는, 역사는, 사회는, 학문은, 대학은, 교육 시스템은, 교육부 장관은, 그런 피에 예수에서만 겨우, 거울이 비쳐진다......
누가 정확히 사탄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비평가가 될 수 없는가? 어째서 비평을 훈련하던 학생들은, 순수한 작품들에게 희생이 되고, 그것들의 가슴에 훈장처럼 안기게 되는 것인가?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사상가가 나올 수 없는 것인가? 도서관은 아무리 봐도, 연극하거나, 영화, 음악 하는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부모가 이억 정도 남겨주면, 고시원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도서관에 다니고, 그러다 보면 반드시 한 명쯤은, 네오 헤겔리언 사상 유행의 태조로서의 인물이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틈만 나면, 작품이라는 괴물이 나타나, 일본 사람들을 괴롭히고, 좋아하면서, 괴롭히고, 좋아하지만, 악몽이 또한 엄습하고, 어딘가에서 분명 할복하게 할 것이니, 차라리 통일교라고 하자, 신천지나, 어떤 것들이라고 하자,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하자, 혐한 어떤 것 하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유럽 연합, 그러니까 다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굴곡이 깊은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신약 성서 같은, 그것의 아름다운 단차 같은, 나뿐일 것이다. 내가 그와 같은 것을 위해 노력했다기보다는, 나만의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그런 객관성의 객관성이 마침내 들어맞았다 여길 수 있게 된 것일 것이다.
원래 철학 자체는, 비평과도 거리가 있어서, 함부로 세상 일에 언급하지 않고, 특히 작품 비평은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나, 네오 헤겔리언니즘, 언니즘, 그런 식으로 백과사전을 검색하면, 대한민국, 예를 들면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신현균, 그렇게 나온다고 할 때, 철학적인 수상을 적고, 그런 것을 보름에 한 번 연재를 신문에다 하는데, 다만 그것만 읽어도, 나중에 철학과 학생이 졸업 논문으로 뭔가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고, 거기에서, 정이 로봇과 같은 것을 언급한다면, 또한 뭔가가 맞지 않고, 어떤 침대 같다고 해도, 고대 고사처럼 잔인하지 않고, 포근하고, 재밌고, 그런 일이 발견될 수 있지 않겠는가? 작품은 사탄이 다시금, 그것의 상투를 잡아채려고 하지만, 여자들의 비녀를, 하지만 그와 같은 이상한 학생 운동 육사 출신의 사람이 신문에 비평한 것을 두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일거에,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탄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경제 발전 이후로
그런 경제를 갖고
사탄들이 중흥하는 새로운 작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고
학생 운동은 없었던 것으로
북한이나 찬양하는 이상한 물줄기나 만들고
비평가는 오마이 뉴스 수준으로
다들 세계 모든, 일본어로 신분,
그런 사탄의 지령을 받는 것으로
임세령
끝이 나는 것은
이것이 다
우리가 로봇보다 값싼
생체 로봇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보면
얼마나 우리나라
현대 역사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었는가
놀라워하면서
재발견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어딘가에
비평가들이 몇 명 배출되었고,
네오 맑시즘을 선방하고
네오 헤겔리언니즘
언니
그런 사람이
몇몇 나왔다는 것이다......
서울의 가족들과 함께
정발산역을 돌 때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실제는 아니지만
기운은 조금 뻗은 것으로
미래를 향해......
나의
잡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