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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에 관한 종말론적 외인구단적 사유

by 마음대로다 2021. 8. 4.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에 관한 종말론적 외인구단적 사유

 

 

 

 

 

 

 

 

 

 

 

하나의 멋진 야구 유니폼과 같은 첨성대를 보면, 그만한 것이 또 없다는 것에서 우리는 모가디슈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이, 경북 영주, 혹은 충남 아산에 하나 더 있다고 한다면, 별로 재미없다고 여길 것이다. 첨성대를 자세히 보면, 자주 있는 것 같고, 많이 있는 것 같고, 우리가 콜라병 몸매라고 말하듯이, 찾으면 분명 있는 것들인 것이다. 귀하고, 없고, 드물고, 거의 없고,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결혼반지를, 그렇게 드물고, 그런 것 같아도, 비싸고, 결혼반지로, 혹은 그냥 반지로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희소성이라는 것에, 묘한, 반감 같은 것, 묘한, 그런 것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잘못된 일루젼 같은 것, 스트라잌 아웃인데, 포볼이라고 여겨서 일루로 가는 일루젼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희소하다는 것은, 결국, 사탄의 재산처럼, 우리들의 목숨이 희소한 것이 아니겠는가? 희소하다는 것은, 사탄의 얼굴을 보고, 그것과 내가 줄을 잡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무라이 같은, 그런 격전적인 그림이 그것을 보다 잘 설명해줄 것만 같다. 그러나 희소성은 금세, 비생필품적 가치, 혹은 질이 아주 높은 생필품적인 상품 가치로 나아간다. 그렇게 삶과 죽음, 그리고 풍요와 재산의 앙상블이고 나면, 우리는 한 오백년을 다 사는 것이고, 일평생을 다 사는 것일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고, 올림픽이라고 해서 글을 채워 넣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첨성대를 보면, 그와 같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는 목이 없다. 그러나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래서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그런 뚱딴지 같은 것이, 차라리 나은 관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가려 했고, 온두라스, 그러나 머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고전에, 반열에 있고, 훌륭한 신학자라는 언명은 없다시피 한다. 헤겔이 신학적 관련을 맺고 있다는 연구는, 그런 훌륭한 연구는, 프랑스 서유럽은, 꽤 있고, 찾으면 있고, 읽으면 원하는 음색이 있고 그렇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해석자이고, 사도이며, 신학자라는 말은, 해롤드 블룸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다. 먼저 그것이다. 신학은 진부하고, 이름은 거창하며, 성경은 그것의 오래된 흔적 같은 것이다. 우리가 수술을 할 때, 우리가 옵티컬 메디컬 드라마를 어쩔 수 없이 제작하고, 미국과 일본 것들과 겨뤄야 하는 것이다. 피가 터지고, 사람들은 울상이지만, 날카로운 매쓰 말을 하고, 간호사, 매쓰, 오 형제여 제발, 미디어, 수술을 했는데, 다시 수술을 하는 것을 스치듯 보았는데, 우리들의 고대사라는 것은, 죽음과 새로운 신의 지속적인 투쟁이었던 것이다. 사망의 권세를 이겨내기 위해서, 풀꽃 반지 마취제를 맞겠는가? 아니면, 사망권세를 이겨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첨성대 옷을 갖춰 입어야 하겠는가? 풀꽃 반지 마취제를 갖고 있는, 첨성대 사망 권세 갑옷을 갖춰 입는 것이 해법이고, 회고가 아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회고록인 것이다. 최고봉인 것이다. 우리가 신이라 불린 사나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그 각박한 흐름, 알 수 없는 검은색, 눈빛, 머리 모양, 이현세와의 콜라보, 박봉성을 볼 때, 우리는 그와 같은 무 안에서, 뭔가 유재석보다 나은 유가 창조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표현은 강렬하고, 내용은 대중 진부하며, 그것의 붓터치는 사실 절정의 것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처럼 베트남 상기, 플라톤적인 상기, 그것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영영 잃어버리고, 사물, 잊어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콤파스가 없고, 같은 사물적 위치에서, 주체와 대상의 구분 없이 흔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그와 같은 독백은, 이천년의 서양 신학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을 내가, 수원역에서, 학교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 있어서, 만화방으로 가다 보면, 거기서 다른 몇몇이 똑같이 만화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그런 것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다 하는 것도, 어떻게 만화를 그리다 보면, 웃음이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과감한 셰익스피어 독백적인 불안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피막은, 그와 같은 전진을 방해했고, 난봉꾼과 같은, 정신의, 그런 것의 진행을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우리가 한글을, 종로의 어떤 진흙에서 발견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이차대전, 혹은 이천이십 도쿄 올림픽의 시계가 그렇게 서로 맞물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한글이고, 어떤 신문 기사이며,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것이고, 어째서 어떤 가문의 창고 안에서, 소중한 보와, 종이와, 상자 안에서, 그런 것이 먼저 발견이 되지 않고, 도자기가 그렇게 발견되고, 때로는 땅에서도 발견되는 것처럼, 그런 콜라보가 아니고, 철저하게, 그냥 철저하게, 아무런 문명도 아니고, 철자도 아니고, 질서도 없는, 우연한 투기에다가, 우연한 내쇼날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인지, 너 많이 컸구나, 모르겠는 것으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천년의 신학적 문제로다 수준인 것이다.

 

로미오가 줄리엣더러, 왜 줄리엣이냐고 하는 것도 있다. 로미오가 로마라는 영어와 한자의 조합을 발견하고, 셰익스피어가, 그런 이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린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일차대전과 이차대전이, 순전히, 잘 입힌 사람들의, 청년들의, 남자들의 시체 전시장일 수 있는 것이다. 일루젼이 흔한 것이면, 병사는 그렇게 잘 입힐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로힘이라든지, 여호와라든지, 야훼라든지, 에로스라든지, 하는 것들이 다들, 비슷한 삼차원의 좌표를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정신을 그런 것을 위해 어느 정도, 배워야 하고, 익혀야 하며, 삼차원의 좌표 처음을 경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강촌에까지 가서, 멋진 옷으로 데이트하고, 저녁에는 좋은 모텔에서 하룻밤 지내는 것이 그렇게 꿈인 것은, 젊은 날의 염원이요 꿈인 것은, 다 엘로힘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야구 선수들은, 엘로힘이 뭔지 잘 모를 것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야구 선수들은 알 것이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인들은 제 이의 이스라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스라엘은 멋진 문명국가가 되지 못한 것일까? 뒤늦게 야구에 매진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인문학생들은, 거기서 자기가 스트라잌 아웃을 먹었는지를 모르고, 일루젼으로, 다시금 일루로 뛰어가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샤일록더러, 피를 쏟지 말고, 고기만을 가져가라고 한 말도 있다. 그것은 유대인, 이태리인, 그러니까 로마인, 그리고 영어를 아무런 장애도 없이 쓰는 영국인에게도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의 피가, 한국인이라는 말일 것이다. 아무런 장애도 없는 한국인들은, 또한 그것을 잘 모를 수 있다. 우리가 제이와이피, 그리고 제이피라고, 흡혈적인 용어를 알고 하지 않는가? 우리 어렸을 때는, 모국어를 익히기 위해서, 피를 흘렸다. 그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검수원을, 그 기가 막힌 성의 어린 학생은, 그 처음이 어땠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항상 일정하게 공이 내리면, 선수는, 외야수는 무조건 공도 보지 않고, 그 내리는 곳으로 뛸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무조건 공을 보고, 보이지 않는 높이에 있는 것도 보려고 애를 쓴다. 그것의 피는 소중한 것이고, 결국 컨테이너 항구에서, 그곳에서 일하는 모두가 한 채씩 갖고 있는 성을 드디어 그도 갖게 되는 처음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만성이 되고, 속성이 다만 횟수적으로 꽉 찼다는 말, 더 이상 피를 흘릴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소네트를 읽고, 이 지구상에 셰익스피어 한 사람만 살아남는 것 같듯이, 마치 첨성대처럼, 우리가 웃고 떠드는, 슬퍼하고 놀라는, 연극도 사실 그것의 희소성이 우리들의 목숨과도 같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누가 쓸데없이, 나 같은 이 말고, 셰익스피어가 되려고 노력하겠는가? 그러나 마음으로는 되는,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피를 흘리고, 보다 나은 모국어로, 외국어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보다 많이 피를 흘리고, 세상 모든 한국어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어가 영어에 갖는 저주 같은 것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가 영어에 저주가 되는 것은, 엘로힘의 그 약한, 낮은, 울타리를 통과하지 못해서일 것이고, 요한계시록과 같은 설치미술에 영영히 빠져서일 것이다. 결국 셰익스피어의 연극도 과정인 셈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엘로힘을 모르고, 남의 나라 연극이나, 대사, 주한 일본 대사, 주중 중국 대사 같은 것에 빠져서 무엇하겠는가? 그것의 시계는, 노골적이고, 마침내 간주체적으로다가, 프랑켄슈타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 좋은 것만 잔뜩 모아놓았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서양의 흰 빛이 그렇게 좋고, 멋지고, 아직 사탄이 로마서 전기처럼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을 때이기 때문에, 어색한 것은, 뚱뚱한 것은, 애플이나 찾는 외국어는 오리엔탈적이고, 자기들은 편안하게 정신에서 나와서,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던 것이다. 나머지 국가는 늘 자기들을 따라 하고. 우리가 공부 적당히 하는 아이들이 반장을 따라 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그런 것을 갖고 왈가왈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사탄인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신학이 모든 신학의 으뜸인 것은, 바로 사탄 때문인 것이다. 사탄처럼 생긴 진짜 사탄으로부터 모든 변주가 시작되고, 사방이 퍼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화의, 화를 참음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들을 자주 만나는데, 만날 수 있는데,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니라, 자기의 혼돈으로 이끄는 진짜 사탄 같은 것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적당하고, 조용하여서 항상 아름다운 얼굴이, 자기의 무의식적인 손톱에 당할까 봐, 차를 타고 나가서, 차를 박아버리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무의식과 의식의 숨 가쁜, 삼루 찬스 같은 것이 과연 그들에게는 있는지, 우리가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플로티누스, 우리의 유출을 갖고, 사탄의 불쌍한 유출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드디어 로마서 전기를 갖고, 우리는

 

이런 데까지 온 것이다.

 

 

사탄은 그렇다면, 사탄처럼 생겼느냐? 당연히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때에, 사탄의 가면을 썼으나, 목소리가 한국 사람들 같았던 사람들을 보고, 이제 서로 실내에 이르렀고, 상의도 가볍게 하고, 가면을 벗으라고 했더니, 한 십 분 동안을 우두커니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로마서가 가장 길고, 가장 복잡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한다. 다른 것들에는, 편지에, 사탄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로마서만이, 이름 표면에, 사탄이라는 말이 있고, 겉과 속이 다른, 겉만 많이 사탄 같았던 사람들의 시간, 그리고 그들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많이 둔한, 유둔재 같았던 나도, 뭔가를 느끼고, 가까이 다가가 내내 자연스럽지 않았던 그것들을 만져보았더니,

 

이게 다 뭔가 싶어서, 내가 먼저 눈에서 뱀처럼 눈물이 흘렀고,

그것을 보고, 그들에게서도

 

우리처럼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

 

처음 일본 야구가 전 세계에 히트가 되었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미국 야구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빨래 방망이를 들고 나오고, 방금 빨래한 옷을 입었던 것처럼. 또 옷이 더러워졌던 것처럼

 

그렇게 로마서가 항상 상대성 이론처럼

 

 

지금은 이천이십 도쿄 올림픽에서 그런 것이다.........

 

 

어느 타자는 배가 나왔고, 어느 타자는 잘 칠 것만 같다. 만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재처럼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