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삼국사기
무엇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대충 딴짓하고, 술이나 쳐 마시다가, 티비나 대충 보다가, 잠이 들 수도 있다. 그것은 서울 풍경이다. 지방 풍경이기도 하다. 풍경 소리. 그리고 남녀지간이면, 대충 손 한 번 만져보고, 안녕 내 꿈 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스트로크. 혹은 스매시. 혹은 스플릿트. 무엇으로도 말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언덕을 얼마나 많이 오르는가?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는, 고삐리를 잡고 있고, 한정된 교과와 내용으로 모든 이야기를 꾸려가지만, 대학교 강사나, 특히 교수들은, 한 시간 휴강할 수도 있고, 한 시간 내내, 교과목과 관련 있는, 혹은 없는, 내용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 엠비씨, 선을 넘는 녀석들을 보고, 오늘, 대학교 강사가, 혹은 교수가, 자기 강의 시간에, 특히 문학이나 사학과, 그것을 언급한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만일, 그것을 한국어로 시청하고, 오늘, 자국에서 일본어로 학생들에게 강의한 사람이 있었을까 싶다. 있었다면 반기고, 반기문 사무총장, 없었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풀을 보고 사는 것이지, 다종다양한, 혹은 신성을 때로는 내비칠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없었대도, 있었을 것이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대도, 온통 그 생각만, 님 생각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봐주어야 한다.
나는 사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윤심덕이. 김우진이. 선을 넘는 녀석들로 보자면, 윤심덕이 번민이 심했고, 갑자기 김우진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것은 생소한 것이었고, 생땍 쥐페리 같은 것으로 보였다.
나의 추리는 이와 같다. 윤심덕이, 수많은 똑똑한 여자들 사이에서, 선출되어, 왜냐하면, 김우진처럼 남자들도 선출되어, 정말 이광수처럼 글을 쓸 수 있는지, 얼마든지 쓸 수 있는지, 조사하는 것으로서의 의지를, 입장을, 공통된 관심을, 여자들이라고 해서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심덕이, 누군가의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심덕아. 예. 너는 글을 써야 한다. 무슨 말씀이세요. 너는 소설을 써야 한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는 노래가 좋아요. 그것이 아니다. 이광수와 같은 훌륭한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 무슨 소리에요. 훌륭한 소설가도 있지만, 훌륭한 가수도 있는 것이에요. 가수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 복식호흡만 대충 하면, 사람들이 노래에 따라가고, 빠져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소설가는 그렇지 않지. 소설가는 참지 않지. 소설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단다. 가수보다 더 훌륭한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 소설가도 많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 소설가는 많지만, 먼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까지, 그리고 학생, 선생까지 많지만, 정말 소설가까지 되는 것은 많이 없고, 그래서 소설가들 중에서 진짜 소설가까지 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란다. 그리고 훌륭한 소설가는, 문장이 쉽게 읽히는데, 그것은 소설가가 노래를 좋아했다는 증거이기도 한단다. 노래를 좋아하고, 따라하고, 노래 가사처럼 즐겁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문장을 생각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해야 정말 좋은 진짜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이란다. 이광수가 내 생각에는, 여자인 듯도 하고, 아니면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정말 노래를 좋아하고, 항상 흥얼거리고, 때로는 정신이 없는 상태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너도 노래를 죽을 듯이 연습해서, 마침내는 소설가가 되도록 하여라. 그 말이 그렇게 호소력이 있어서, 지리산 호랑이 같아서, 윤심덕도 마침내, 그렇게 어느 시간에는 변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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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작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렇게 싫어한다. 이번에 도미니카 전에서도, 미국 전에서도, 조상우 선수가 못한 것은, 그 이름이 조ㅅ당우, 그렇게 발음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강백호도 이름이, 농구왕 강백호라는 것이 이미 있었듯이, 사람들에게 자연감을 주지 못하고, 조작감을 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조작을 우리가 싫어해서, 다만 선수들마저도, 시합에 임하여서, 자기가 그리로 톱니바퀴 돌아가는 것이 두렵고, 싫어해서, 플레이가 옛날 영화 더티 댄싱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것을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내 친누나와 보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보고 나오면서, 여자 주인공이 누나와 얼굴이 많이 닮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랬던가 안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승환의 이름을 보면, 경기력이라든지, 상대팀 분석이라든지,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성명론으로만 너무 따지는 것 같으나, 오승환도 이름을 보면, 결국 오승환 조작 돌직구라는 한 길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돌직구를 던지면, 사람들이 진짜 공은 어딨고, 돌을 던지느냐, 같은 편 포수도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경기 외적인 돌직구를 던지는 것이 조작 같은가? 아니면 경기 내적인, 가죽 공을 던지는 것이 조작 같은가? 조작은 더 큰 조작을 만나면 죽게 되어 있다. 오직 자연과, 집단, 개별, 정신만이, 조작을 만나더라도,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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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이 조작 같았다는 것이다. 드디어 소설가를, 소설을 가르쳤던, 아무개가 그런 무거운 말을 심덕에게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심덕은, 번개를 맞은 것처럼, 머리칼이 치솟고, 온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나는 기독교 성경의 조작이요, 다른 하나는, 소설의 민중 선동이었다는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정말 이광수처럼 글을 다시 써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혹은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이, 선동이 되는지, 그와 같은 하늘의 움직임이 인간 내면에는 진정 있는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베로니카, 내일 당장 소설가가 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우리들 시쳇말로 지는. 그러니까, 베로니카, 나는, 나는, 별 하나 같은 나는........
처음에는 이광수가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광수보다 더 나은 소설가가 될 것도 같았다. 비전21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먹고, 남자와도 자주 자는, 극약 처방을 써보아도, 색쓰는 기술만 늘 뿐이지, 도통 어떤 관념이 제시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선동되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안으로는 문예경험이 부족한 때문이요, 밖으로는 일제의 탄압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문예경험을 쌓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비난을 앞장서 하는 것은, 공룡 존만년 똘이 같은 나혜석이나, 비슷한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것들도, 어찌 보면 문예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그림도 잘 그려야 하지만, 심덕에게 슬픈 사회사를 분석하여 알려주었던 이가 보다 현명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영화가 보급이 되었다면, 공룡 존만년 똘이 같은 나혜석이 좋은 영화, 그러다가 좋은 소설, 이광수 같은 소설을 쓰고, 마침내 사람들을 선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노래를 불러주다 보니, 그것이 그렇게 문장의 소리 없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문자가 없으나, 그림 문자, 노래는 가사가 다른 좋은 문장들의 주어와 가능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가 그렇게 훌륭하고, 철저하고 그렇다. 삼국사기가, 그렇게 공중으로 높이 보이는, 사각형의 이상이요 질서 같다면, 그녀는 그것을 분명 찬미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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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우리 러쎌이 한국인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가타부타, 혹은 왈가왈가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맨발의 마라토너와 외국인으로서 비슷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외국인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그는 분명 윤심덕의 필연성을 해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불쌍한 것이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 같으며, 끝이 없는 길 같고, 차라리 자기가 기독교임을 부인하고 싶은 것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마라톤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고 말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홀려서 마라토너가 되지만, 다들 그런 목소리를 실은 들을 수가 없다. 그냥 삼일운동의 박수 소리 같은 소리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손기정이 후쿠자와라는 말은 불가능한 상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이광수를 제외하고는, 한국 지식인에게, 양심에게, 중심이 있는 지식인들에게, 보다 오래 읽히고, 생각의 주제를 주는 것이, 문장의 연결과, 생각의 연결의 경험을 주는 것이, 손기정과 같은 후쿠자와 유키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비극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비극도 이렇게 완벽한 비극이 있을 수 없다. 후쿠자와가 우리 귀에, 캔디, 좋은 말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논리가 없고, 중심이 없으며, 사람들의 관심에 대충 호소하는 것을 제외하면, 언제든 민족이 자결할 수 있는, 선동 가능성의 말을 제외하면, 후쿠자와만한 글이 또한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마라톤을 뛰고, 눈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은, 그가 일본에서 최선을 다하였고, 그가 일본인이든 아니든 간에, 그가 힘든 운동 이후에 솔직하여서 그런 것일 것이다.
맨발의 아베베가 그렇게 알 수 없는 거리를 뛴 것은, 인간이 그렇게, 유리왕의 아들 같아서였을 것이다. 논리가 없고, 정의만 있다면, 반드시 말을 달려서, 땅에 꼽힌 창에 자기 가슴을 내어주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의 또한 논리인데, 그러나 그 섬세한 것을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그를,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고, 세계 사람들이 좋아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옛날에 가난했을 때, 도시의 거리를, 아무런 조작이 없는, 자연스럽고, 그렇게 어린아이들이 달리고, 자동차 라이트와 함께 달리고, 숱한 그림자들 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던 것처럼......
맨발의 아베베가 그 사진들을 저장해놓지 않았으면,
우리는 영영히 그 사실들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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