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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훌륭한 영화 모가디슈

by 마음대로다 2021. 12. 4.

 

 

 

 

 

 

 

우리가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경찰에 쫓기는 미국 흑인처럼, 꼼짝 못하게 되어 있다. 그 꼼짝은, 그 꼼장어는, 운명이고, 미학이며, 반응이고, 센서인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유튜브에서, 미모는 없는 어떤 여자로부터, 이번 대입 시험에서의 헤겔 철학의 지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입 시험의 국문 시험은 대게가 반동적이었다. 나쁜 미국 경찰도 있고, 좋은 흑인도, 죄 없는 흑인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도, 좋은 영화가 아닌 데도, 우리는 꼼짱어가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스치듯 안녕이 매우 오래전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번 내용은 너무나 혁명적이어서, 마음이 많이 어렵게 되었다. 우리는 마치 어느 정도 대입 시험이 반동적이 되어도, 사회적인 그물망, 일급수, 열목어와는 아무 상관 없는지, 지금까지 실험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모가디슈 영화에서처럼, 그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실험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다만 매우 힘들고 슬픈 일인 것이다. 언젠가 나는 오랫동안의 칩거, 초코칩 쿠키를 집에서만 지내면서 먹고, 글을 쓰고, 공부하는, 그런 생활을 거두고, 처음으로 사회적 직업을 구해볼까 했는데, 할 수 있고, 관심 가는 일이 거의 없어서, 보석에 관한 직업 훈련소 내용이 있어서, 그나마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그때에는, 아무런 특이점이 없었는데, 돌아보니, 서울특별시 만한 점이 내 얼굴에, 내 모습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 가장 좋은 옷들을 입고, 날마다, 광주 시내를 날마다, 한 몇 개월 다녔던 것 같다. 그때, 마치 유종의 미처럼,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포토샵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다녔던 것이, 지금 보면, 또한 부산광역시 만한 점이 내 등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영화관이나, 친구와의 카페 만남이 아니고서는, 광주 시내에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밖으로 강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나를 눈처럼 쫓아오는 세력이 넘친다고 여겼을 때, 아무도 나를 돕지 않고, 나의 프로덕션은커녕, 생명마저 홀대할 때, 차라리 데모라도 나고, 그러면 죽을 수도 있고, 전쟁이라도 나고, 그러면 참전하여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있지 않았다. 나는 한 번에 두 편씩 하는 영화관에서, 오래되고, 새로 제작된 홍콩 무협 영화만 보더라도, 가슴에 환풍기를 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직 위대한 비평가의 안목이 아니고서는 발견될 수 없는, 수준의 하락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와 같은 아폴로호의 달의 탐방과 같은 일을 겪고 나서, 처음으로 주자된 신분으로서 뭐든 조금씩 견디는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원효사 몇 번 아래 정거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시내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 유동에 있는 직업훈련소까지 가는 길이 어렵고, 슬프고, 안타깝고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평상시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렇게 좋은 옷들로만 출근을 하고, 등교했다고 출근 센서에 지눌 도장을 찍고 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그때 사람들은 했을 것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의 결혼식에, 마음을 감추고, 좋은 옷을 입고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좋은 옷자락이, 차원을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세계와 교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교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성적인 생각이고, 교통한다는 것이, 일본 교토와 같은 것이고, 작은 고통과 같은 것일 것이다.

 

지금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에스에프적인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은 내가 천주교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생각도 할 수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그와 같은 옷자락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째서 천주교는 나를 유혹하였었는가? 다만, 모든 재능자를 향한, 어장관리적인 어떤 것이었을까? 아니면 진심이었을까? 그것의 단서를 이번, 내게로, 그리고 단군 이래로, 전적으로 전향한, 국어 시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극심한 괴롭힘의 에테르에 있게 되면, 범주적으로 사람이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교로 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냥도 다만 기독교가 싫다는 이유로, 천주교로 가게도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믿음이 너무 강해서, 내가 천주교로 올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변하고, 개종하면, 원래의 것이 바뀌고, 본질적인 것이 역변한다고들 한다. 독서를 좋아하면, 영화를 좋아하게 되고, 커피를 좋아하면, 홍차나, 녹차를 좋아하게 되고, 프랑스를 좋아하면, 영국을 좋아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김치국의 수녀들과, 신부들이, 나를 영광 굴비처럼 바라보면서, 저렇게 사랑이 심하고, 하나님의 감성과, 손과, 목소리가 심한 사람이, 예술적인 여성을 버릴 수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수녀가, 나의 수학적으로 뜨거워진 몸을 감당할 수 있을지, 제비뽑기를 하였을 것이다. 이번 국어 시험의 헤겔 지문은, 내가 누누이 강조한 내용이고, 반복한 내용이기도 했지만, 실은 기성 철학자들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것이고, 지능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에게는 생경하게 들리고, 다시 읽기 조차 힘들며, 그 뜻을 읽은 다음에, 어깨에 짐진 돌들을, 하나라도 더 내려놓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기억나지 않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개신교에도 있고, 관계적인 측면에서는 천주교에도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개신교 신학과 여학생들은 예쁘지 않고, 천주교 수녀들과 처녀들은 예쁜 것인가? 과연 그런 것들까지 정확하게 계산하는 이들이 우리 사는 도시, 서울, 어떤 구로구, 영등포구, 인천이나, 부산 등지에는 있는 것인가? 그것은 믿음 같지가 않고, 섬뜩하며, 철저하다면, 완전 믿음 같은 것일 것이다. 완전 믿음. 그것은 전투적이며, 철저한 것이고, 철저함이 없는 철고는 고철이 되기 쉬우니까, 무언가를 대결하는 것이 틀림없는 것인 것이다. 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서, 헤겔을 동의하기조차 쉽지가 않고, 헤겔 철학을 전공 필수 과목으로 공부하기도 쉽지 않는 것이다. 전공 필수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삶과 죽음적으로, 정말 헤겔 철학적으로, 전공 필수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헤겔을 바라보기는 쉽다. 그러나 오히려 헤겔과 섹스하려고 하려는 천주교 수녀들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은 단계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철학과 학생들이 백 명이면 백 명인 것이다. 헤겔 철학이 가리키는 모든 단계와, 수준, 차원의 내용들은, 실은 당사자들에게는 영원히 요원한 것들인 것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헤겔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고, 종교에 있는 사람들조차, 헤겔의 내용은 부분적이고, 가식적이며, 피상적으로, 표상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단계를 통과해야만 가능한 헤겔 철학이라는 것을, 철학과 겨우 십 대를 넘어선 대학생들이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아주 착한 마음을 가진 여학생이, 그런 여학생과 다를 바가 없는 남학생이, 수만번의 기침 감기를 겪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오직 한 과목만이라도 철저하게 한다면, 그런 병약한 처지를 아는 교수님이, 그녀와 그를 대학원에 입학시키고자 약속하였다면, 헤겔은 그들에게는 밥이자, 생명의 양식이고, 예수님의 피이고, 그들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붓고, 겨우 샴푸로 머리를 감고, 일어나 앉아, 저녁이 다 되어 일어나, 책을 몇 권 읽고, 나머지를 그나마 통독하고, 직관하고, 한국말로, 자기의 겨우 생명의 말로, 재진술을 하고자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래야 누구냐고 누군가 그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그나마 대학원생이라고, 미국 유명 애니메이션 심슨에 나온 내용도 있어서, 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쫓기고, 마음이 아프고, 협착하고, 계곡에 빠져 오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녀와 그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그들이 그들의 대방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돌보는 마음이, 그래도 그들의 명함이나, 대통령 선거나,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있을 때에, 그들이 반드시 벌레는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흰개미가, 우리가 종이에 볼펜으로 선을 그으면, 그렇게 그 선 그은 데만을 기어간다는 실험적 사실이 있는데, 비유가 있는데, 그래도 그런 벌레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반드시 헤겔 철학 하나 만큼은 주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고, 그들은 수준이 없는데도, 헤겔 철학만큼 무섭지 않기 때문에, 거의 절대 다수에 의해서 간택되곤 한다. 그래서 대학교 소재 철학과 그리고 철학생들 중에, 이번 대입 시험의 지문에 나온 내용만큼도 헤겔 철학을 아는 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잘 풀고, 다 맞고 한 학생이면, 도리어 과에 입학해서 썩고 있는 실험실의 학생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것이 그렇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헤겔을 좋아하고, 전공 필수를 한창 공부하고 있는 이들은 분명, 이번 대학 입시의 지문보다 나은 것들을 갖고 있겠지만, 헤겔이 가진 그와 같은 각진 운명을 뚫고, 그것을 풀지 못해도, 다만 겪기만 해도, 나중에는 훌륭한 재산이 될 것이 분명한, 이와 같은, 살아있는 공중의 영혼 같은, 그런 것으로는 헤겔 철학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런 지문을 가질 수 있고, 생명으로 가질 수 있으며, 정확한 지도, 그러니까 시간도 공간도 아닌, 작은 스쿠터, 스즈키 어드레스의 힘으로써 그것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얼마나 서양 천주교가 나를 좋아하고, 자기들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나를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모른다. 행여 자기들 몇몇은 성경을 읽고, 몸과 마음이 정결하게 되었다고 해도, 관계적인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를 좋아할 때마다,

 

그것을 멀리서 볼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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