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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슬픈 이야기, 추 워리어스......

by 마음대로다 2021. 12. 17.

슬픈 이야기, 추 워리어스......

 

 

 

 

 

 

 

 

우리는 슬픈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음악처럼, 그것이 곧 사라지고, 슬프지 않은 어떤 기분이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슬픈 이야기와 공포 이야기는 다르다. 슬픔은 단팥죽 같지만, 공포는 말 그대로 공포, 공한증 같고, 공포 같기 때문이다. 어떤 미학적 감정은 단일한데, 그러나 내용이 부단히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학교는 같은데, 재학생들이 나날이 바뀌는 것도 같은 형식일 것이다. 우리가 티비를 보는데, 자꾸만 채널을 바꾸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말을, 나의 글을 좋아하는 것도, 혼조 스즈,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투기 같고, 수많은 검들 같고, 비평 같고, 장르가 없는 것 같고, 무협 같고, 공포 같고, 연애 같고, 장백지 같고 그렇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시, 촉산 zu warriors를 보았는데, 마음이 다시 그 공포의 시기로 돌아가는 것 같아, 슬프고, 아름답고, 나는 누구인가 싶고, 내가 누구이든지 간에, 어떤 대상을 해석하려는 현자들의 노력이 대단했던 것 같고 그렇다. 아름다운 것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공포가 직접 공포로 나오는 것은, 그냥 장르일 뿐, 참다운 공포가 아닌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점차로, 공포가 되는 것이 정말 공포인 것이다. 우리가 좋고 아름다운 카페를 가서 느끼는 기분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공포가 아닌가? 아름다운 구속 같은 것. 전쟁 같은 사랑 같은 것. 우리가 쉬리를 보고, 그것을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잠실 주경기장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울트라 매니아처럼, 축구 매니아여서 그런 것이고, 우리가 쉬리를 기억하는 것은, 수족관이 있던 가게와, 팔월의 크리스마스의 사진관과 양대산맥처럼, 그리고 남녀 주인공들이 만났던 카페와, 패밀리 레스토랑 때문일 것이다. 사물은 사물이고, 공간은 공간이지만, 우리가 과거의 아름다운 드라마 게임, 티비 문학관에 비추어, 그것의 한국적임을 결코 잊지 않았던 신흥 도시 경관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 있느냐고 찾을 것 같으면, 영화 접속도 있겠지만, 쉬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영화의 서언이 그렇게, 출입하는 장면이 그렇게, 무섭고, 놀라웠던 것은, 나중까지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그것이 어떻게 이 세상에 남을 것인지를, 마치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아름다움이 공포가 되는, 참다운 공포를 우리가 한국의 쉬리를 내세울 것 같으면, 부족한 것이 많을 뿐 아니라, 경쟁작들이 한국에는 너무 많아서, 빛이 사라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나의 이런 공포스러운 영화평을 좋아한다. 홍콩의 유명한 감독의 이름 중에 원화평이 있지 않은가? 만일 나의 영화평을, 제임스 라스트의 겨울바람 소리와 함께, 들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예술이 어떻게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딱딱한, 말들, 단어들, 관념 추종들, 그리고 미사려구들, 하석상대들, 결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운명의 문장들, 그런 것들을 잡지들과 잡놈, 잡년, 게놈 프로젝트 안에서 발견한다면, 우리는 다만 내일 미국으로 가는, 샌프란시스코, 어느 영종도 도시인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만나고야 마는, 우리 말로는 얼굴을 통과하는 것 같고, 번역을 해도, 그 뜻이 널리 태초부터 분명한 것 같은, 그런 말은 반드시 드물고야 마는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친구를 계속 친구로 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분이 하락해서인 것이다. 왕은 다만 권력이 왕이라서 왕인 것이 아니라, 세자, 그러니까 무수한 교육과 지식과, 예법과, 호흡과, 색깔과, 만남과, 그리고 여자 친구, 여자 친구, 그것들 때문에 결국 왕인 것이다. 다만 철권에서 킹을 선택했다고 킹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세상에는 교회가 있고, 세상이 있고, 세속이 있고, 도시가 있으며, 도시남녀, 그렇게 제목만은 입에서 떠나질 않는, 어린 학생들이 있는지 모른다.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우리가 모두 까먹고 말지만, 그래도 그것을 몇 개 기억하는 모범생이 문명의 증거가 되고, 나머지 아이들이 카페에 가는 것은 전쟁 같은 사랑인 것이다. 교육대학교 앞에, 타오르는 강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칸막이가 있었지만, 학생들이 출입하였고, 대학교 앞이고, 그리고 나무들을 많이 가져다 놓아서, 나무 숲의 냄새가 카페에 가득하였었다. 우리는 그것을 타강 타강 불렀었다. 모임을 타강에서 갖는다는 것이었다. 카페에 가면, 그냥 카페인이 되는 것이다. 특별하게 다른 인격을 가질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전형적이고, 새로운 음료수에 대한 탐닉이 있고, 지금과 같으면, 우리가 많이 흥분하고, 두렵고, 원인을 모르지만, 마음을 추스릴 길이 없는데, 다만 카페에 어떤 여행객처럼 앉아 있다 보면, 마음에 그런 여유자금 같은 것을 만드는 것 같았던 것이리라. 나는 타락을 의식하였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불분명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변강쇠가 옹녀와 함께 분명하게 죽듯이. 불분명한 말들은, 그리고 따뜻하지 못한 불온한 말들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그런 이상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만의 바둑판을 갖고 있었고, 늘 언제나, 그 승리하는 수를, 친구들과 나누고자 하였다. 나는 진지했고, 진심이었으며, 친구들에게도 정말 그러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는 내 둘째 누나와 자주, 대학생 되기 전에 그렇게, 중학생일 텐데, 시내로 영화를 보러 자주 갔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가자, 뭘 먹으러 가자. 그랬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은, 수필집을 시험하는 말들 같은 것들은, 남자 친구들을 만났을 때 했을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음식이 맛있다는 말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하는 말들은, 채널이, 친구들과 하는 것과 다르다 할 것이지만, 무슨 이야기를, 마치 데이트 하는 남녀처럼, 나이 차이가 있대도, 시내에서 만나 누나에게 했을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정당한 것이고, 그것은 공기와 같은 것이며, 그것은 컴퓨터의 노후화와 같은 것일 것이다. 나는 지금 무슨 당의 이름들도, 새누리당,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나의 기분도 있지만, 옛날과는 다르게, 지금 사람들도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의 주권을 갖고, 타강에서 나는 친구들을 만났던 것이다. 우리가 서울을 가지 않는가? 기차를 타고 가면, 플랫폼이 있는데, 친구들의 말은 전부 그와 같은 플랫폼과 같다. 장백지가 주인공이 새까맣게 되어 죽자, 울고, 엎드려 울고, 연극적으로 지나갔지만, 나는 내가 첫눈에 희생양이 되고, 계속되는 눈에 희생양이 되어, 어느 고시원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자, 나의 자유가 이제는 사라지는구나 하였던 것이다. 해외여행의 자유. 중국 여행의 자유. 영화를 보면서,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지금 보아도, 그것의 높은 봉우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오르는 강이 있고, 높이 솟은 봉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향해, 제임스 라스트의 눈바람 같은 모습으로 질주하는 이는, 아무래도 드물 것이다. 남이 내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세상이 그처럼 원래 박탈이라고 하다면, 나는 무수한 글을 쓰면서, 그러면서 내가 내게 자유를 주고, 중국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하였던 것 같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의 나의 주관을 향한 첫눈은 무서운 것이지만, 매서운 것이지만, 지금처럼 나이가 든 다음에는, 그것들은 분명 객관적인 세포와 같은 것이다.

 

나는 하나도 객관적인 글들을 읽을 수가 없었고, 왜냐하면 그와 같은 자유가 박탈당해서, 우리가 연대를 가려고 책을 읽고, 고대, 서울대, 동경대를 가려고 책을 읽는데, 세상이 나를 위협한다고 하면, 갈 대학이 하나도 없게 되고, 그와 같은 길과 철로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려고 책을 읽은 것인가 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러려고 책을 읽는 것인 것이다. 그래서 취미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책방이나, 출판사가 만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대상이 불분명한 책 읽기는, 그 시절의 나와 다를 바가 없고, 철로가 끊긴 상태에서, 그것을 내다보면서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마치 신체가 절단된 것처럼, 더 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었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은 책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원래 그러려고 고전이라는 것들이 있겠지만, 내용의 모든 것들을 오직, 첫눈이 어떻게 발생하며, 그로 인해서 인간이 어떻게 가사 상태가 되는지 하는 것들의 의학적인 인사이트 같은 것만 나는 요구하였던 것 같다.

 

그 모습을, 고시원에서 글을 쓰던 것들을, 그렇게 잘 해석하고, 기존의 있던 것과 해석하고, 사탄과 대결하는 나의 모습까지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오직 촉산 추 워리어스만 같을 것이다.

 

첫눈은 핵전쟁과 같고, 내부 핵전쟁, 지하 핵실험과 같고, 그것은 심지어는 남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신혼여행을 갔더니, 처음 보는 서로의 모습에, 마음이 핵전쟁과 같아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신혼여행이면, 나머지 것들은, 성경의 표현처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무엇하겠는가? 사람들이 만나서 무엇하겠는가? 잘나고, 레토릭이 훌륭한 말은, 다만 남에게 잘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실의 철로와 같기 때문인 것이다. 자유가 박탈되어, 철로와 여유가 하나도 없는 이가, 만나서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리장성으로만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고, 거기서 내릴 수도 없으며, 잠시 멈추거나, 잠을 깊이 들 수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삶이 있을 수 있는가? 영화가 내게 그런 거울을 비추니, 나는 얼마나 순간 잠이 드는 것 같고, 피로가 조금 달아나는 것 같고, 장백지가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 같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그것까지도, 내가 내게 부여하는 자유를 잘 포착하였던 것일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남녀의 만남을 좋아하고, 그것을 어느 때는 만들어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유는 없는 법이다. 둘이 공중에서 합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아무리 정당한 것만, 맞는 것만 놓여져 있대도, 진실로는 맞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당장 먹을 수 있는 말만 하였다. 그것은 대학도 아니었고, 카페도, 아름다운 정원도 아니었다. 내가 영화 정도로, 스크린 같은, 스크린을 짜는 것 같은, 시위대처럼, 잠시 있다가 나오는 것 같았었다. 내가 고전을 읽을 때, 그리고 이 고전을 모두 읽으면 죽으리라 하였다.

 

다만 장백지가 그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았고, 나도 그것은 과한 것 같다고 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속 검의 태극이, 작지만 그렇게 적절하고, 아름다웠으며, 장쯔이도 태평양의 작은 섬처럼 사라지는 존재의 여성적 가능성을 붙잡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영화는 고전 전체의 분위기를 내게 고지하는 것 같았고, 아니면 내가 그렇게 독특하게 읽는 것인지, 전체 학자와는 전혀 다를 지라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런 미미한 것의 계승 같은 모습일지라도, 그와 같은 관심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나, 중국 영화 촉산전 추 워리어스가, 나를 찬양하는 영화로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필명이 신 휘일 진대, 쉬리라는 영화가 나를 찬양하는 영화로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여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너무 찬양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좋아하면, 사람이 사라질 수 있는 것처럼. 너무 아름다우면, 바로 여기서부터 공포가 시작되는데, 그 원리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레토릭을 신경 써야 하고, 그것이 바로 존재의 모든 첫눈이 당하는 심적인 고통, 내부 핵전쟁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나의 그 시절의 인터넷 글쓰기는, 사라지는 묘미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정형화된 정형외과 같은, 그런 말들을 내가 좋아하지 않고, 쓰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때는 더욱 그러했다. 정말 사탄하고만 싸우는 것 같았다. 마지못해서 문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성 출간의 책들이 다루는 것들은, 대게 숫자가 한 여섯 자리 정도 되는데, 그것으로는 사탄에게 인간 존재 전체가 먹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의 두 배나, 두 배 반의 숫자를 발견하려 노력하였고, 그렇게 되면, 오직 그것으로만 글을 쓰고자 하였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다. 여섯 자리 숫자까지 가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다만 그것이 전부인 것 같은 제스처를 내보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도 그것은 비슷한 조건이고 처지이다.

 

우리가 눈 내리는 도시, 대학교 근처, 어느 카페를 지나갈 때가 있지 않은가? 카페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돌아가지는 않지 않는가?

 

주자는 친구를 만날 수 없다.

 

친구는 나이가 들고

신분이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직 여자만

 

 

남해 어딘가에

여자만이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