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째서 전쟁의 숫자로 돌아가는 것일까?
군에서였다. 그때까지 나는 그런 그늘을 보지 못했었다. 세상에 그런 아름다운 그늘이 있는 것이다. 이등병이 훈련을 잘할 수 없었고, 마치 남의 등에 업혀 모든 위치를 행군한 것 같은 다음에, 남들이 하는 정비를 따라 하였었다. 정숙함이란 것. 익숙함이란 것. 그것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숙함이란 것. 그것도 좋아하는 연예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정숙하였고, 세상은 조용하였었다. 저마다 정비 품목이 있었는데, 군장이나, 야삽, 얍삽하다는 것이 아니라, 군장이나, 군장 덮개나, 판초우의, 텐트 같은 것을 걷어다가, 흐르는 물에 씻고, 모포나 침낭 같은 것은 햇빛에 말리고 하였었다. 판초우의를 걷어다가, 흐르는 물에 씻는 것을 하였다. 흐르는 물에, 두 번 판초우의를 씻을 수 없다는 그리스 격언이 있지 않은가? 없다면 하는 수 없다. 대대 건물이 연병장과, 통합 건물, 그리고 식당의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지만, 돌아가는 모든 외벽들을 놓고 보면, 엄청난 대지가 있었다. 그 안으로, 대암산에서 내리는 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바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과 같은 기준이면, 대대 안쪽에 흐르는 물의 정원이 가볍게 있는데, 그리로 씻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팔을 꺼내다가, 붙이고, 발을 꺼내다가 붙이고, 얼굴도, 돌려서 맞추고, 남의 다리가 퉁퉁 붓고, 발도 물집이 잡히고, 까져서, 마치 무접점 키보드처럼, 운동화를 신었어도, 그렇게 또각또각 걸어야 했었다. 그런데, 항상, 쉬는 시간 십 분도 없이, 신병들을 부리다가, 어려운 훈련을 끝내고, 판초우의 같은 것도 모두 말리는 자리에서, 이웃 소대의 선임이 나머지 후임들에게, 어디 가지 말고, 그늘에서 눈을 붙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한없는 믿음 속에서 휴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천구백육십년대 같았고, 칠십년대 같았다. 갑질하다는 갑에다가, 돌아본다는 환을 붙여서, 그 모든 규격을 돌아다보면, 곧 있으면 환갑하다 보면, 그것은 전쟁 이후의 느낌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 말은 무엇인가? 우리 말은, 판초 같은 것인가? 노래도 있었지 않은가? 판초의 뜻을 아느냐고. 나의 머리는 거대하고, 나의 머리는 슬픈 메두사와 같고, 나의 머리는 거대한 한강과 같았다. 존중이 없었고, 오직 예수, 오직 슬픔만이 가득하였다. 한 시간을 잤는데도, 선임이 나타나 괴롭히지 않고, 두 시간을 잤는데도, 해는 아름답고, 물은 깨끗하고, 냄새나던 군용품들도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홍해와도 같았다. 사람들이 날 더러 이스라엘 민족이냐고 묻는다면, 정신없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슬픔의 이스라엘 민족인 것이다. 강변의 모래와 같은 감성과, 지성의 존재들인 것이다. 사람들이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고, 머리에 똥만 차면, 슬픔만 차면, 이제는 나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도하게 말하면, 내가 이리로 가라 하면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라 하면 저리로 가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와 같은 사태에 다다르게 되었는가?
우리가 늘, 순천 드라마 세트장이 떠오르고, 그 정상에 있는 교회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것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믿음을 놓치고, 학교에 입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법을 공부하다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다음에, 지심귀명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의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믿음에 귀의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학교를 졸업하여 오만하게 결혼도 하고, 오만 원권을 많이 갖고 있고, 이런저런 카드들을 많이 갖고 있다면, 그래서 더욱 학교적인 규율과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눈에 띄게 되는 것인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영문학적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영문학적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끌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는 얼마나 슬픈가? 국사학과 남학생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당연한 것인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난파선과, 고고학적 발굴과, 그런 것들의 박물지적인 정리 밖에 유물론적으로 남는 것이 없는 것이다. 역사철학 탐구 같은 것은, 헤겔의 철학 같은 것은, 그런 배달 음식은 선배들이 행여 가져다줄 것처럼 여겼었다. 그러나, 은마는 오지 않는 것처럼, 그와 같은 선배가, 그들의 고고학적 발굴 탐사대에게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배가 큰 방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세미나도 하고, 때로는 선배의 방을 강탈해서, 선배를 내쫓고, 시대의 규칙과, 앞으로의 어떤, 그런 것들, 그런 것을 세우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선배가 자기 먹으려고 사온 술을, 함께 나누면서, 자기 먹으려고 사온 오징어 게임을, 모두가 게임을 하면서 둘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역사철학적 탐구라는 것은, 오직 사라짐인 것이다. 세상에 그런 롤랑 바르트의 책 이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예언가였던 것이다. 우리가 어째서 이방원 일파를 보고, 정몽헌과 정몽주의 모습을 우리가 보지 않을 수 없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이 겨우, 체스판이나, 장기판에 도달해서, 사라질 것인지 스스로 바라봄과 같은 것이다. 바둑판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사뭇 전자기판을 닮았다고 해서, 장기판보다는 덜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사람은, 흑백이 되면, 육체에 쉽게 장악되게 되어 있다. 육체는 여자들의 입에서, 헌법이 쏟아져 나온다. 흑백은, 그런 돼지 소리와 같은 박력이 없다. 우리가 입산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들을 카세트로 여기는 것처럼, 입산하여서도 우리는 그와 똑같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스타 플레이어와 같다. 그래서 그런 플레이어가 사라지면, 우리가 고속 전투기를 타고 가다가, 미사일이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으면, 그와 같은 플레이어가 사라지는, 그런 어떤 불꽃 놀이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것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지식은, 훈련 중에 냄새나는 판초우의와 같다. 우리가 삼손을 다만 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장사, 그러니까 커멀스라고 생각하면, 눈이 더욱 번쩍 뜨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장사에 실패하여서도,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자연의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교육시키는 것은, 그와 같은 스타플레이어에게는 쉬운 일이다. 아이도, 그런 아버지를 하늘처럼 보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대게의 장사들은, 태생이 그와 같지 못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힘이 없는 것은, 그와 같은 원리를 아직 몰라서인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구대륙과 같고, 신대륙과 같다.
믿음의 형이상학적 뜻과, 도형도식적인 뜻은 늘 변한다. 그것은 마치 태극기와 같다. 사뭇 일장기 같은 데도 있다.
경험하지 못한 단어는 사라지게 되어 있지만, 경험이 없더라도, 열 명 정도의 사람이 의미와 형식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면, 티비 프로그램의 의미와 깊이, 수준이 하락하게 되면, 그 섬세하고 아름다웠던 옛날이 그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옛날이기보다는, 믿음과 같은 것이고, 그 뜻이 모호하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총명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나머지 책들을 읽는지. 우리는 아직 성경을 충분히 읽지 못한 시간으로도, 그것만으로도, 바람 부는 날의 게처럼 걷고, 합정역에서, 웃고 하게 되는데.......
찾아보면
그와 같은 풍경과
노래가 부지기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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