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과 슬벽집
젊었을 때의 이어령이 생각난다. 나는 옆집이 별로 없는 안암동에 살고 있었고, 수유리에도 살고 있었고, 그래서 별명이 무등산 제조기, 무등산 호랑이, 무등산, 등산하지 않는 그런 식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나이가 많았다. 나는 나의 과거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값비싼 전축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다가 이것저것을 돌리고 듣고 놀고 있었다. 흐르는 물이 맑은 것이 그렇게 눈물이 나왔다. 점차로, 한강이나 영산강, 광주천이 더럽게 되는 것이, 한 번쯤 그렇게 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일 것이다. 내가 경치 좋고, 값이 싼, 그런 타산지석 같은 곳에다가 집을 구해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내리고, 물이 흐르면, 그것은 나의 얼굴 같았다. 사람들이 근처에 살아서, 그와 같은 그늘을 좋아하였다. 우리가 흑백 티비나, 영화, 그런 것을 좋아했던 것은, 그것의 그늘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군사정권도 그늘이 있었고, 우리들의 아카데미도 그늘이 있었다.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학자라고 하면, 학자라고 하면, 학자라고 하면, 아무도 생각나지 않겠지만, 이생강, 그래도 학자라고 하면, 갈릴레아의 예수, 안병무 정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글이 훌륭하고, 완벽하고, 완벽하게 토종, 한국 신학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의 대상이 훌륭하고, 워낙에 난해해서 그럴 것이다. 학문이라고 하면 모름지기, 신학인 것이고, 신학이라고 하면, 서양의 해석학적 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이었다. 민중신학이라고 하면, 문동환, 김창선, 박남정,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우정, 정우성, 우크라이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렇지 않고, 거의 안병무 혼자서, 잠깐 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김경재 교수는 어디에 있나, 사람들은 갑자기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재 교수는, 사실, 필력이, 갈릴레아의 예수 안병무 젊은 시절에 영영히 좇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째서 그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내가 신학과 교수가 되어서, 훌륭한 적당한 선배 선임 교수의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내가 현대 방송국적 눈사태에 직면해서, 그 모든 것이 엉클어진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비상한 중국군이 방한하여서, 나를 그들 대학으로 청빙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더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같았으면 같았지, 차라리 다시 신학과의 교수가 되어서, 남은 십 몇 년을 지내는 것이 수월할 것이다 여길 것이다. 안병무 교수의 그 책은, 차라리 돌과 같고, 석정수 같고, 그런 이름이 있었다, 슬픈 혼자 만의 겨울 같았으며, 그런 노래도 있다, 세계 신학과 학문에, 다만 동방의 있음의 증거가 되었었다. 그것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대상이 워낙에 훌륭하고, 난해하고, 접촉, 불가촉, 그런 접근 불가능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광장 같은 것은, 다만 여행에 불과하다. 여주인공이 있고, 젊어서 발레를 어렵게 배운, 그런 북한 공훈 배우가, 서양 여행을 잠깐 한 것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갈릴레아의 예수는, 도무지 아무런 자료도 없고, 아무런 내용도 없이, 다만 비평적 착상과 입장만을 가지고, 밭을 갈고 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장관일 수 있고, 환호를 살 만한 것이지만, 나와 같은 글쓰기 전문가가 보기에는, 불쌍하고, 짠하고, 아무 것도 없고, 집에 책도 없는 사람 같은 것이다. 인용도 없고, 자세히 보면, 혼자 어떻게 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도 가장 현명하고, 장래가 어떻게 보였던 이가, 김경재보다도, 김춘삼보다도, 안병무보다도, 나이 어린 윤평중보다도, 이어령이었다. 나에게는 수필적 생기가 있었다. 그렇게 프랑스의 식민지 같은 느낌을 주면, 쉽게, 공산주의가 침공하고, 미국의 전쟁터가 될 것만 같다. 우리가 페인트를, 하늘 색으로, 집의 안과 밖을, 안과 밖이라는 것도 있었다, 칠하면, 금세 프랑스 그 어린이 만화가 된다. 도대체 어디에 흐르는 물이 있는가? 어린이들이 소독차를 향해 뛰어가면, 그 흐르는 물을 잠깐, 우리들의 지적인 흐름, 그것의 문예사조를 만드는 것 같은 것이다. 김지하는 약간 부족했고, 정말 지하에서 나온 것 같은 연기를 하였다. 자칫하면, 김지하가 안병무마저 데려갈 공산이 있었다. 김대중도 김지하가 데려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기초단체장 같은 흐름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어령이 그와 같은 남의 민주주의 같은 폭력성이 없었다. 그것이 항상 말썽이었고, 나에게는 고민이었다. 우리는 밀란 쿤데라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헤밍웨이, 해미읍성, 햄이 없다는 그 유명한 격언을 놓고 볼 때, 결코 단순한 인물은 아닌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좋아했다면, 사람들이 눈이 캐스퍼 자동차처럼 동그래지게 되어 있다. 내가 보르헤스를 좋아하고, 마르케스를 좋아하고, 그랬다면, 당연히 밀란 쿤데라도 좋아하는 것이다. 문제는 항상, 한국에서는 불쌍한 안병무의 독백을 능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밀란 쿤데라를 좋아했다. 그것의 육성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한번 재밌게 읽고는, 쉬지 않고, 나머지 책들을, 담뱃값도 아쉬운 시절에, 구입해서 읽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농담은 정말 좋아했었다. 그리고 불멸을 내가 좋아할 뻔 했다. 내가 형숙이를 만나, 사귀고, 사랑했을 때, 내가 그녀를 바라보는 기초적인 프레임이 불멸의 어떤 것과 매우 흡사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결정적으로 아무런 맥심도 없어서, 가벼웠고, 농담은 기초적으로, 하나의 흐름만, 대상만, 어떤 사전적인 대상만 파고드는 것 같아서, 그것의 황갈색이 좋았으나, 밝은 노란 색이 좋았으나, 내가 늘 하는 농담에 항상 미치지 못했었다. 만일 농담이 세계적인, 서양적인, 그와 같은 정신적인 위계를 갖고 있다면, 갖고 있는 것이라면, 나의 농담은, 무등산 제국주의 폭격기와 같은, 만든 곳을 잘 모르겠는데, 늘 등이 터지는 것 같은 고통을 선사했던 것이다. 나는 작품을 수사하고 있었고, 그것이 인간의 정신에 어떠한 수상한 점이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서울 소재의 양심과, 젊은 청년단, 검은 사제단, 청년 자본주의 생산모임, 이화여대 알오티씨, 그들도 그와 같은 비상한 포커스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령은 한국에서 쿤데라가 아니었고, 그냥, 서울을 지나고 있으면, 만나게 되는, 백색의 가루 같았었다. 지적인 장애와, 한계, 따뜻한 가슴 속 담배갑 속의 돗대와 같은, 그런 남의 나라 어용 지식인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헤밍웨이도, 쿤데라도, 필사적으로 집필하였기 때문에, 이어령도 그 정도의 글쓰기가, 나를 알고, 혼자 지내면서,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사탄과 만나서, 사람들을 살인하고 다닐 정도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약간 박근혜 같은 느낌은 있었다. 때로는 현정화 같은 느낌은 있었다. 그러니, 수필의 문학적 성격과 가치, 그것의 남성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가면라이더 같고, 반면교사와 같은지 모른다. 우리가 중고차를 고를 때, 케이카, 가장 놀라는 것은 휠디자인이지 않는가? 그것이 무더기로 나올 때는, 아무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물이 흐르고, 그것이 수필과 만나 번뜩이는 검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우리들의 육체를 무찌를 때, 지금의 휠디자인이 매우 아름답고, 원래의 우리들의 미감 같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으면, 다음 이야기의 벽돌이 있을 수가 없고, 카메라가 잡지 않으면, 다시금 내가 가져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답답함의 사진 같은 것의, 그것의 피사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파사드는 외국 말이지만, 파닭은 우리나라 말이고, 현대적인 상품이지만, 내가 착상하면, 그만 이런 문장, 저런 문장으로,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이어령의 그와 같은 흰 빛과 같은 독서적인 난문이, 모여서, 우리들 옛날의 휠디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대표하였고, 쓰여지지 않는 어용문학이 되었으며, 그리고 우리를 결코 대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 나도 젊었을 때, 이어령을 만나, 공부를 안 하는 것이냐, 아니면 조금 멍청한 것이냐 했더니, 자기는 고민이 많고, 비판보다는, 어떤 여성적인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솔직한 진단이었고, 그 정도의 비상한 이름표와 의식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기 이름이 그래서 그런 것이냐 그랬고, 결코 그렇지 않다 하였다. 안병무는 군인과 같은 데가 있었고, 그래서 책을 별로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김창락은 약간 정신착란 같은 것을 공부의 에너지로 삼는 비상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엇박자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가 때때로 홍수를 만나고, 서울이 그것의 꼼짝없는 대상이 된다 싶으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들의 소설가나, 작가, 만화가, 영화가, 그리고 평론가들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고, 방송 기자나, 관훈 클럽, 라이언즈 클럽, 로타리 클럽에서 가져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한 달이 지나면, 다시금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원래의 거리를 되찾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과 몸은, 의식은 꼼짝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나타나, 세상을 다시 밝고 환하게 만들었다는 신화 같은 것은, 우리에게는 마땅치 않았다. 군사정권은 그런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낮에는 경제발전을 이루고, 김경재, 저녁에는 지식인 노동자, 그리고 학생들을 천자문 고문하는 것 같았다. 이어령은, 우리에게 홍수가 났을 때만, 방배동에 홍수가 났을 때만, 단순하고, 평범한, 그러나 조금은 빼어난, 그런 식민지 지식인에서, 비상한 기지를 갖고, 압도적인 문학적 능력을 갖고, 동서양의 지식과 지혜를 아우르는, 우리들의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기에, 막상 그 심란한 자연과 도시를 내다 보면, 그렇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응집력이, 의도치 않는 개인에게,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이냐 할 것이다. 그것은 만화 같고, 민화 같고, 이다희가 출연한 이상한 에스에프 드라마 루카의 세계관 같고 하다 할 것이다.
*
사탄이 아름답고, 지식이 넘치고, 문학의 전부를 장악하고 있다 여기는 것은 우주 전쟁의 서막이고, 시작일 뿐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오로지 기쁨과, 코메디일 뿐이다. 이어령은 그런데에도, 그랑데, 박수를, 그러니까 일본어로서의 하수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러나, 이어령, 그 마지막 풍경소리처럼, 그렇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그래도, 한번 다 읽은 책도 없는 그를 좋아했던 것은, 그런 군사정권의 이어령과 메시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예쁘면, 우리가 박수치지 않은가? 이문열이 사람의 아들을 지으니, 박정희가 박수를 쳤지 않은가?
사탄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탄이 그랬다면, 그는 이미 중국인이고, 나중에는 경제개발 계획에 의거, 천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지식이 있고, 예쁘면, 사탄에게서는
저녁에는 그렇게 빨리 슬픔이 도지게 되는 것이다.
사탄에게 플라톤이 있고, 성경이 있고, 문학과 예술이 있고, 여행이 있고, 사탄에게 교육이 있고, 리그가 있고, 그렇다면, 저녁에는 그만 풍경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오천년 중국 배우의 역사를 갖는다는 것은, 천장지구, 그들의 지배와 인구가 스스로의 힘으로, 많이 줄어들기를 기다린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양의 기독교가, 박해를 받아서, 남보다 세 배는 빨리 죽었을 때, 평균적으로, 그들이 기뻐했던 것은, 그와 같은 구조보다도 역사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섹스를 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아프리오리가 있고, 그것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것은, 예술적으로, 아프리오리가 완벽한 것이고, 그래서 죽는 순간에도, 너무나 도취되어 있어서, 죽음의 위협이 없는 것인 것이다.
다만 우리들의 영원한 리얼리티 속에서, 하나 허용이 되는 기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관한 플라톤의 위로가 있다면, 그들 영혼의 고향은 있다는 것일 것이다.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은 그래서, 신학대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늘 아침 이슬 같고, 섹스가 굉장히 가깝다. 숨쉬기도 엇박자 같고. 남자는 모두 남궁원, 여자들은 지금, 따로 육체파 배우가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정신의 역사가, 세상 모든 국가의 밀란처럼, 원래 그래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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